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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마흔 여덟 번째] 부산 팬을 닮은 '화약고(火藥庫)', 공필성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3. 2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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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5. 25

 

지난 5월 19일, 롯데 자이언츠가 팀의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던 1992년 당시 멤버들의 유니폼을 입고 나섰던 사직 홈경기에서 시구와 시타자로 등장한 것은 윤형배와 공필성이었다. 당시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상대팀 이글스의 에이스 정민철과 맞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따내며 우승의 발판을 놓은 윤형배 그리고 입단 3년차였던 그 해부터 주전급으로 성장하며 쏠쏠한 방망이와 화려한 다이빙캐치 수비로 야수진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던 공필성. 사직구장을 가득 메운 3만여 관중들은 그들을 보며 잠시 우승의 향수에 젖어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고, 윤형배가 선 마운드에서 그 해 한국시리즈 MVP 박동희의 그림자를 느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  윤형배의 시구에 맞는 시타자, 공필성 코치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오랜만에 관중석을 가득 채운 3만의 함성 속에서 윤형배는 92년 그 해와 다름없는 폼으로 직구를 던졌다. 그러나 그 공은 포수 미트가 아닌 시타자의 몸을 향했고, 꿈쩍 않고 그 자리에서 공을 기다린 공필성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몸에 맞는 시구'. 공필성은 헬멧을 집어던지고 마운드로 달려 나왔고, 시타자가 시구자에게 엉겨 붙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 순간 '와'하고 웃음을 터뜨리던 관중석의 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은밀한 코드를 읽어낸 공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윤형배와 공필성은 한 목소리로 '연출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하필 공을 맞은 시타자가 공필성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야기가 곧이들리지는 않는다. 공필성이라면, 그가 오랜만에 홈구장을 가득 채워준 팬들에게 16년 전 우승의 아련한 꿈을 선물하고 싶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몸짓이야말로 '피하지 않고 공에 맞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움직이는 화약고 

 

1990년, 1차 지명을 받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공필성은 꽤나 기대를 모으는 신인이었다. 1년 후배 박정태와 함께 부산야구에서도 변방이었던 경성대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던, 국가대표 내야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뷔 첫 해 그가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2할 3푼을 간신히 넘긴 타율에 단 한 개의 홈런. 그리고 이따금 교체로 들어와 몇 번 되지도 않는 수비기회에서 연출한 어이없는 '알까기'들. 아니, 어떤 때는 그림 같이 공을 잡아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무엇에 홀린 듯 더듬고 흘리고 놓쳐 상대 공격에 불을 붙이던 속 터지는 몸짓들. 그래서 슬그머니 그에게 붙기 시작한 별명은 '움직이는 화약고'였다.

 

 공필성 코치(왼쪽)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흔히 동네 족구 판에서라면 '구멍'이라거나 '블랙홀'로 번역되어 붙었을 별명이었다. 그 화약고에서 반갑지 않은 불꽃이 피어오를 때마다 팬들은 흔히 '국가대표 출신이라더니…'를 되뇌며 혀를 찼다. 그 해보다도 더 내려가 2할 1푼대 타율로 주저앉았던 2년차의 91년까지도 공필성은 팬들에게 불안과 걱정 말고는 별다른 것을 남기지 못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1992년, 기회가 오기 시작했다. 한 때 3할대를 치던 주전 3루수 한영준이 서른 줄에 접어들며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고, 그 사이 조금씩 수비를 다듬고 방망이에 날을 세운 공필성에게 자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처음으로 100경기를 채워 출장한 공필성은 0.286의 날카로운 방망이를 휘둘렀다. 김민호, 김응국, 이종운, 전준호, 박정태까지 다섯 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하며 기록했던 팀타율 0.288에 조금 밑돌긴 했지만, 하위타선에서도 쉬어갈 곳을 찾지 못했던 상대 투수들의 지뢰밭이 그의 자리였다. 물론 그래 봐야 팀에서도 두드러지지 못하는 공격력이었고 여전히 빈 틈 많은 수비였지만, 그라운드에 나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팬들도 그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절대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독한 근성, 바로 그것 말이다. 

 

절대 피하지 않는 '사구왕' 

 

 

그는 상대투수가 바깥쪽 결정구의 공간을 벌기 위해 몸 쪽으로 찔러오는 공에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찔하게 몸을 스쳐가는 공이 들어온 다음 순간이면 타석으로 반걸음을 더 붙어 서서 마운드를 노려봤다. 그래도 몸 쪽으로 다시 공이 날아온다면 반갑게 몸으로 맞이해 1루로 달려 나갔고, 바깥쪽으로 피해가는 공이라면 기다렸다는 듯 바짝 올려 잡은 방망이를 휘둘러 안타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아주 결정적인 순간이면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꾸물꾸물 몸을 우겨넣으며 투수의 심기를 헤집었다. 일단 그가 공에 맞고서라도 1루에 살아나가면, 투수가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두 배가 되곤 했다. 공필성은 타석이 아닌 누상에서도 투수와 격렬한 투쟁을 계속하는 선수였다.

 

▲  공필성 코치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그는 빠른 발을 가졌지만 깔끔하게 도루를 하는 대신 끊임없이 예비동작만 취하며 투수의 신경을 긁었고, 견제 타이밍에 신경이 흩어진 투수는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서 무너지곤 했다. 그래서 공필성은 항상 타점보다 많은 득점을 기록했고, 또 그가 흔들어 놓은 상대투수로부터 팀 동료들이 더 많은 타점과 득점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수였다. 수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강한 타구가 많이 날아들어 '핫코너'라 불리는 3루에서, 그는 마치 공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도록 훈련받은 군견이라도 되는 듯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곤 했다.

 

그래서 애초에 위치 선정이나 순발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타구가 수비지역을 뚫고나가는 순간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다면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물론 그 중 몇 개의 공은 그 저돌적인 글러브 안으로 빨려들었지만, 또 생각보다 많은 공들이 허무하게 바람소리만 남겨놓은 채 좌익수 앞으로 굴렀다. 심지어 마른 날 불규칙하게 튀어 오른 공을 그는 가슴이나 얼굴로 받아내기도 했고, 그렇게 떨어뜨려 놓은 처절한 공을 1루로 던지고는 곧장 그라운드에 쓰러져 나뒹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를 수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수비형 3루수로 각인시켰던 그림 같은 다이빙캐치들은, 그의 반사 신경과 수비기술보다는 독한 근성과 헌신적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타석에서든 그라운드에서든, 공이 그의 몸을 향하면 뭔가 화끈한 일이 일어났다. 안타든, 삼진이든, 아니면 몸에 맞는 공이든. 그리고 상대의 기를 짓밟아버리는 그림 같은 다이빙캐치든, 어이없는 실책이든, 아니면 아웃카운트 한 개와 바꾼 시커먼 피멍이든 말이다. 그래서 '화약고'라는 별명은 조금 달라진 뜻을 담은 채 그의 것으로 굳어져갔다. 

 

초라한 성적, 그래도 열광하는 팬들 

 

2000년까지 열 한 번의 시즌동안 그는 단 한 번도 3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94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리지도 못했고, 반대로 해마다 열 댓 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95년 한 해 동안 스물 두 번이나 공에 맞으며 세웠던 '신기록'(82년 김인식의 18개 기록을 갈아 치웠다가, 99년 31개를 맞은 박종호에 의해 깨졌다)정도가 자랑거리가 될까, 통산 0.248에 41홈런, 119실책은 평범한 선에서도 빠지는 기록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직구장을 찾는 부산팬들이 가장 즐겨 입는 유니폼은 박정태의 16번과 더불어 공필성의 0번이다.

 

▲  공필성 코치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그들은 0이라는 기괴한 번호를 등에 새기고 나서, 그 숫자를 누런 황토색으로 물들이고 나서야 물러났던 한 보잘 것 없는 선수에게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자이언츠는 종종 재미있는 야구를 한다. 비록 성적과 투지 모든 면에서 옛날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구석에선가는 마치 넙치가 되도록 얻어 터져 코피로 범벅이 되고도 고사리 만한 주먹 움켜쥐고 '덤벼'를 외치던 어느 골목의 독한 땅꼬마처럼, 눈 가늘게 뜨고 다시 보게 만드는 근성이 그래도 한 번 씩은 불끈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산 팬들은 항상 재미있다. 자이언츠의 플레이가 마치 허무한 불규칙바운드처럼 기대와 사랑을 배신하고 흘러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라운드를 향해 어이없는 다이빙을 날리듯 한결 같이 처절하게 환호하고 고함치며 타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사직구장의 관중석을 볼 때마다 공필성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최동원과 박정태가 신화라면, 공필성은 그들의 몸속으로 스며든 기질이고 습관 같은, 몸의 기억인 듯해서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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