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야구의 추억, 마흔 번째] 2할 4푼대의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박재용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4. 8. 15:51

본문

2007. 03. 28

 

1986년부터 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긴 '해태왕조'의 공수의 핵은 선동열과 김성한이었다. 그 기간 동안 선동열과 김성한은 각각 투수와 타자에 관련된 거의 모든 부문에서 독보적인 전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각각 팀 마운드와 타선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해냈다.

해태의 전설과 '선동열-김성한의 전설'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선동열은 일본 무대로 진출했고 김성한은 은퇴했다.

그래서 타이거즈가 선동열과 김성한 없이 맞이했던 첫 번째 시즌인 96년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었다. 특히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에게는, 자신들이 단순히 선동열과 김성한의 들러리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입증해야 하는 중대한 시험대였다. 그 해 개막 전 6번의 시범경기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거둔 승리는 단 한 번 뿐이었다.

한 번의 무승부와 네 번의 패배. 선동열과 김성한을 대신해야 할 이대진과 이종범이 아직 방위병 신분으로 묶여있었고, 삼십대 후반으로 넘어가던 이순철의 플레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차·포를 떼고서야 김응룡 감독인들 무슨 수가 있겠느냐는 수군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동열-김성한' 없이 맞이한 96년

▲  96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취점의 주인공 박재용(왼쪽)과 쐐기점의 주인공 최해식(오른쪽)이 서로 마주치고 있다. / ⓒ 해태 타이거즈 홈페이지

 

개막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타이거즈는 꼴찌라는 낯선 구석에 몰려있었다. 5승 9패. 어떤 이는 그것을 '대이변'이라고 표현했고, 또 어떤 이들은 선동열과 김성한이 남긴 '예정된' 공백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그 해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면, '해태왕조'의 신화는 그저 선동열과 김성한이라는 걸출한 개인에 의존했던 허약했던 시기를 대변하는 빈약한 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거즈는 차와 포를 떼고서도 다시 우승을 일구어냈다. 그것도 그때껏 그들 자신 외에는 누구도 이루어본 적이 없던 '연속 우승'이었다. 96년과 97년은 해태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고등학생 시절 혹사에서 비롯된 어깨부상으로 또 한 명의 '비운의 천재'로 기억될 뻔했던 조계현은 5월부터 8월까지 완봉승 세 번을 곁들이며 12연승을 질주했고, 5월에 방위복무를 마치고 합류한 이대진은 16승, 이종범은 3할3푼2리에 25홈런으로 각각 힘을 보탰다. 이강철은 8년째 연속 10승대를 이어갔고, 이순철과 이호성이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큰 자리에 버티고 선 걸출한 스타들의 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워낙 거대한 바윗돌이 빠진 자리를 채우다보니 아직은 각자 조금씩 모자라고 남는 장점과 단점들이 빚는 공백들을 피할 수 없었고, 그 틈을 훌륭하게 메워준 '반토막 짜리 벽돌' 같은 살림꾼들이 없었다면 그 두 해의 연속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 두 해 동안 연속으로 지명타자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던 왼손타자 박재용이 그런 선수였다.

신일고와 단국대를 졸업하고 실업무대를 거치면서 국가대표를 지낸 경력까지 있었지만 박재용은 주목할 만한 강점은 없는 선수였다. 땅딸막한 체격이 한눈에 알려주듯 발이 느렸고, 동작도 민첩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주로 외야수로 뛰어왔지만 수비범위와 수비동작 모두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방망이가 쓸 만 했지만 어느 팀에서든 지명타자로 한 시즌을 맡길 만한 파괴력은 없었다. 그는 그저 나쁠 것도 없지만 딱히 탐나는 구석도 없는 수많은 선수들 중 하나였다.

박재용이 들어갈 왼손의 빈틈

그러나 천하의 해태 타이거즈에도 딱 박재용이 들어갈 만큼의 빈틈이 있었다. 바로 오른손 일색으로 채워진 균형없는 타선이었다.

왼손타자란 우선 밖에서 안으로 휘어들어오는 변화구를 던지는 오른손 잠수함 투수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하다. 또 우타자보다 한 발 앞서 1루로 출발하기 때문에 기습번트 성공률이 높다. 그리고 서있는 동안 포수의 시야를 가려 1루 주자의 리드 거리를 확보해줄 수도 있다. 그래서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 명 수준급 왼손타자가 없는 타선은 대체로 단조롭고 허약하다.

프로 원년 이래 이때까지 해태 타이거즈에는 변변한 왼손타자가 거의 없었다. 왼손타자 자체가 드물기도 했지만, 다른 팀에서 괜찮은 왼손 타자를 데려다 앉혀 놓아도 하나같이 부진에 빠지는 것을 보고 하나의 '저주'라고 할 만도 했다. 천재 박노준이 그랬고, 타격왕 출신 김상훈이 그랬으며 공수주 삼박자 겸비의 '이상적인 2번 타자' 동봉철이 그랬다.

그래서 그나마 지명타자로 좋은 활약을 해주던 박철우가 쌍방울 레이더스로 떠나버린 94년, 박재용은 타이거즈 타선의 유일한 좌타자였다.

2년차였던 95년, 주로 대타로 나서며 83경기에서 2할8푼4리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한 박재용은 96년을 앞두고 붙박이 지명타자로 낙점을 받게 된다. 그리고 96년과 97년,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2년 연속 수상하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물론 두 해 모두 2할 5푼을 채 넘기지 못한 타율에 각각 4개, 7개의 홈런. 수비부담이 전혀 없는 지명타자의 공격성적으로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상 최대 행운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라는 비아냥거림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실제로 그 두 해 모두 지명타자부문 터줏대감이던 김기태가 1루수로 자리를 잡는 바람에 윤덕규를 제외하면 마땅한 경쟁자를 찾기 어려운 행운도 있었다. 그러나 열 명의 선수가 엮이고 이어지며 점수를 내기도 하고 막기도 하며, 작전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받기도 하는 야구에서 개인기록의 의미는 항상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두 해 동안 박재용의 활약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

잊지 못할 97년 6월 29일 만루홈런

 

박재용은 96~97년 2년 연속 지명타자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 ⓒ 사진제공 : 박재용 선수

 

신생팀 현대의 정명원에게 한국시리즈 사상 첫 노히트노런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고전했던 96년 한국시리즈에서 최고의 활약을 해준 타이거즈 타자는 박재용이었다.

1차전, 2회말 선제점을 뽑아내며 기선을 제압하는 솔로홈런과 3승 2패로 맞선 상태에서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던 6차전 4회초 1대 1의 팽팽한 긴장을 깨뜨린 3루타와 역전득점을 비롯해 그는 한국시리즈에서 19타수 8안타의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그 시리즈 MVP는 3차전 완봉승을 비롯해 2승 1세이브를 기록한 이강철에게 돌아갔지만, 박재용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우승의 주역이었다.

박재용은 스피드나 잔재주도 없고 남다른 센스도 없었지만 집중력이 좋았고 우직했다. 그래서 찬스에 강한 타자였다. 열 번 나와 열 번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나서도 별다른 노림수는 없을망정 얄팍하게 자포자기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방망이 불끈 움켜쥐고 마운드를 노려보는 선수였다. 그래서 마치 라이온즈의 이만수가 그랬듯, 그 역시 투박하고 실수도 많지만 밉지 않게 기대를 심어주는 선수였다.

97년 6월 29일, LG 트윈스전은 여러 해동안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된 경기였다. 그날 9회 초 원아웃, 두 점을 뒤진 상황에서 철벽 마무리 이상훈과 마주한 박재용은 만루홈런을 날려 경기를 뒤집었다.

그러나 9회말, 거꾸로 두 점의 리드를 지키기 위해 나선 해태의 또 다른 철벽 마무리 임창용이 김동수에게 역전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승리를 날려버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양 팀 팬들을 놓아주지 않았던 3시간 40분의 드라마였다.

박재용은 흔치 않은 홈런, 많지 않았던 안타나마 모두가 포기하려는 순간에 터뜨려 경기 흐름을 바꾸었다. 그것이 꼭 승리의 열쇠가 되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주연으로든 조연으로든 경기의 중요한 고비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찬스에 강하다고 해도 전담 공격요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명타자로서 2할 5푼에 못 미치는 타율은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좌타자라고는 해도 발이 느린데다가 번트를 비롯한 작전수행능력이 떨어지는 스타일이라 '좌타자의 타순'으로 불리는 2번 타자에 기용되기 어려운 것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래서 냉정하게 보자면 박재용이라는 선수의 가치란 오로지 좌타자가 전무하다시피 한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의 특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사이 96년에 입단한 장성호가 무럭무럭 성장해 98년부터는 그 뒤로 다시는 내려앉지 않은 3할대 타율에 안착했고, 99년에는 이미 리그 최고의 좌타자로 군림하던 양준혁이 타이거즈로 영입되기에 이른다. 거기에 더해 용병 좌타자 샌더스까지 가세하면서 좌타자의 불모지 타이거즈가 하루아침에 최강의 좌타자 클린업트리오를 보유한 팀으로 변모했다.

짧았던 영광, 박재용의 몰락

그러나 박재용은 97년 이후 오히려 거듭된 부진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미 서른줄에 올라서 발전가능성 면에서도 큰 전망을 보여주지 못한 그는 냉정하게 트레이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 해, 그가 갈 수 있었던 팀은 IMF 와중에 주축선수들을 모두 팔아 치워버린 '유령팀' 쌍방울 레이더스 뿐이었다.

사면초가. 딱히 탈출구가 마땅치 않았던 그 순간, 그의 선수생명은 주위의 걱정보다도 훨씬 일찍 끝이 나버리고 만다. 2000년 초의 선수협의회 파동이었다.

'현대판 노비문서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던 선수협의회의 깃발에 맞서 박용오 KBO 총재가 '선수협의회가 생기는 순간 프로야구 사업을 그만두겠다'고 맞서던 살벌한 시절. 그리고 심정수니 마해영이니 하는 거물들이 보복성 트레이드의 피바람에 날아가던 시절. 단순하고 우직했던 그가 아니었다면, 그런 환경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선수협의회' 명단에 덥석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SK 와이번스로 흡수되던 그 해 봄, 그는 20명의 선수협의회 선수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그 와중에 그 해 그가 나설 수 있었던 경기는 단 여섯 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2000년 11월 말, SK 와이번스는 무려 21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정리해고방침을 발표했다. 레이더스로부터 그대로 받아 안았던 선수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던 것인데, 신인왕 출신의 박정현, 홈런왕 출신 김성래, 그리고 선수협의회 대변인 강병규 등이 그와 함께 거리로 내몰렸다.

아직 삼십대 초반의 나쁘지 않은 대타요원 박재용은, 선수협의회만 아니었다면 조금 더 선수생명이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실업팀을 거치느라, 동기들에 비해 두 해 늦게 데뷔했던 프로무대에서 그가 뛰었던 것은 겨우 일곱 시즌이었다. 그 사이 기록한 통산 2할4푼6리의 통산타율에 23개의 홈런이라는 평범한, 아니 초라한 성적. 그러나 두 번의 팀 우승과 두 번의 골든글러브.

선수협 파동으로 일찍 끝나버린 선수 생명

박재용은 현재 사회인야구팀에서 중심타자 겸 마무리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 ⓒ 한국유학원 야구팀


다른 해였다면 어림없었을 성적으로 골든글러브를 두 번이나 따낸 그를, 많은 이들은 '행운의 선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삶 역시 만만치 않은 도전과 땀내 가득한 조그만 성공들로 가득한 것이었다.

어릴 적 앓았던 병 뒤끝에 한쪽 귀의 청력을 잃다시피 했음에도 야구선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 이미 그는 중요한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그리고 뚝심으로만, 혹은 성실함으로만 헤쳐가기 어려운 프로무대에서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생기 넘치는 플레이로 그라운드를 달구었을 때 다시 성공한 것이고, '벌어놓은 돈도 없고 딱히 믿을 성적도 없는 주제에' 앞뒤 가리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나서는 순간 또 중요한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200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프로무대를 떠났지만, 박재용은 아직도 '현직 선수'다. 물론 낮에는 모교인 신일고 수석코치로 밥을 먹지만, 주말이면 구리야구장이나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는 사회인야구팀 '한국유학원'의 코치 겸 선수다. 프로무대에서는 지명타자라는 이름의 '반쪽짜리' 선수였지만 지금은 중심타자에다가 위기에는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마무리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뛰고 있다. 그는 평생을 두고 야구를 즐기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아본 바로는, '즐겁게 하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어른들 말씀도 사실과는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즐겁게 하는' 것이 '최고가 되는'것 못지않은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용코치' 박재용을 통해 배우는 것이 그렇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