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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의 母音]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20:14

본문

1
법정스님어린 왕자!
 
자금 밖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호(窓戶)에 번지는 하오의 햇살이 지극히 선하다.
 
이런 시각에 나는 티없이 맑은 네 목소리를 듣는다. 구슬같은 눈매를 본다. 하루에도 몇번씩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그 눈매를 그린다. 그리고 이런 메아리가 들려온다.
 
"나하고 친하자,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어린 왕자!
 
이제 너는 내게서 무연(無緣한 남이 아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낯익은 식구다. 지금까지 너를 스무번도 더 읽은 나는 이제 새삼스럼게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 책장을 훌훌 넘기기만 하여도 네 세계를 넘어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간(行間)에 쓰여진 사연까지도, 여백(餘白)에 스며 있는 목소리까지도 죄다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몇해 전, 그러니까 1965년 5월, 너와 마주친 것은 하나의 해후(邂逅)였다. 너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관계의 바탕을 인식할 수 있었고, 세계와 나의 촌수를 헤아리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너를 통해서 내 자신과 마주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가난한 사거(書架)에는 너의 동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애들은 메마른 나의 가지에 푸른 수액(樹液)을 돌게 했다. 솔바람소리처럼 무심한 세계로 나를 이끄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재임을 투명하게 깨우쳐주었다.
 
더러는 그저 괜히 창문을 열 때가 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귀를 기울인다. 방울처럼 울려올 네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그리고 혼자 웃음을 머금는다. 이런 나를 곁에서 이상히 여긴다면, 네가 가르쳐준대로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난 언제나 웃음이 나네-
 
2
법정스님어린 왕자!
 
너의 아저씨(생 떽쥐베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더라.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동무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분들은 '그 동무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 같은 걸 채집 하느냐?' 아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느냐? 그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이것이 그분들이 묻는 말이다. 그제서야 그 동무를 아는줄 안다.-
 
지금 우리 동네에서는 숫자놀음이 한창이다. 두 차례 선거를 치르고 나서 물가가 뛰어오르고, 수출고가 예상보다 처지고, 국민소득이 어렵다는 등. 그러니 잘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숫자와 단위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스리는 사람들은 이 숫자에 최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숫자가 늘어나면 으시대고, 줄어들면 마구 화를 낸다. 말하자면 자기 목숨의 심지가 얼마쯤 남았는지는 무관심하면서, 눈에 보이는 숫자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시적(可視的)인 숫자의 놀음으로 해서 불가시적인 인간의 영역이 날로 위축되고 메말라간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똑같은 물을 마사는 데도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든다는 비유가 있지만, 숫자를 다루는 그 당사자의 인간적인 바탕이 문제다. 그런데 흔히 내노라 하는 어른들은 인간의 대지(大地)를 떠나 둥둥 겉돌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구나.
 
어린 왕자!
 
너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버섯'이라고 했었지?
 
-그는 꽃향기를 맡아본 일도 없고, 별을 바라본 일도 없고, 누구를 사랑해본 일도 없다. 더하기밖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그러면서도 온종일, 나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착한 사람이다 하고 되뇌이고만 있어.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잔뜩 교만을 부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야. 버섯이야!-
 
그래, 네가 여우한테서 얻어들은 비밀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한 모서리에 불과해. 보다 크고 넓은 마음으로 느꺄야지. 그런데 어른들은 어디 그래? 눈앞에 나타나야만 보인다고 하거든. 정말 눈뜬 장님들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뀌뚫어 볼 수 있는 그 슬기가 현대인에겐 아쉽다는 말이야.
 
3
법정스님어린 왕자!
 
너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꽃인 줄 알았다가, 그 꽃과 같은 많은 장미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풀밭에 엎드려 울었었지? 그때에 여우가 나타나 '길들인다'는 말을 가르쳐주었어. 그건 너무 잊혀진 말이라고 하면서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길들이기 전에는 서로가 아직은 몇천 몇만의 흔해빠진 비슷한 존재에 불과하여 아쉽거나 그립지도 않지만, 일단 길을 들이게 되면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고 만나다는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생활은 해가 돋는 것처럼 환해질 거야. 난 어느 발소리하고도 다른 발소리를 알게 될 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이 되어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여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밀밭이 어린 왕자의 머리가 금빛이라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황금빛이 감도는 밀을 보면 그리워지고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좋아질 거라고 했지.
 
그토록 절실한 관계가 오늘의 인간세게에서는 퇴색해버렸어. 서로를 이해와 타산으로 이용하려 들거든. 정말 각박한 세상이지? 나와 너의 관계가 없어지고 만 거야. '나'는 나고, '너'는 너로 끊어지고 말았어. 이와같이 뿔뿔이 흩어져버렸기 때문에 나와 너는 더욱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거야. 인관관계가 회복되려면 '나', '너' 사이에 '와'가 개재되어야 해. 그래야만 '우리'가 될 수 있거든.
 
다시 네 동무인 여우의 목소리를 들어 볼까.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 시간조차 없어지고 말았어. 다 만들어놓은 물건을 가게에서 사면 되니까. 하지만 친구를 팔아주는 장사꾼이란 없으므로 사람들은 친구가 없게 됐단다. 친구가 갖고 싶거든 날 길들여.-
 
길들인다는 뜻을 알아차린 어린 왕자 너는 그 장미꽃을 위해 보낸 시간 때문에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임을 알고 이렇게 말했지.
 
-내 장미꽃 하나만으로 수천 수만의 장미꽃을 당하고도 남아. 그건 내가 물을 준 꽃이니까. 내가 고깔을 씌워주고 병풍으로 바람을 막아준 꽃이니까. 그건 내 장미꽃이니까.- 
 
그러면서 자기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자기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너는 네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4
법정스님-사람들은 특급열차를 집어타지만, 무얼 찾아가는 지를 몰라.-
 
그렇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고 잇다. 시간에 쫓기고 일에 밀리고 돈에 추격당하면서 정신없이 산다. 어기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피로회복제를 마셔가며 그저 바쁘게만 뛰어다니려고 한다.
 
전혀 길들일 줄을 모른다. 그래서 한 정원에 몇천 그루의 꽃을 가꾸면서도 자기네들이 찾는 걸 거기서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 한송이의 꽃이나 한모금의 물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너는 또 이렇게 말했지.
 
-그저 아이들만이 자기네들이 찾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 아이들은 헝겊으로 만든 인형 하나 때문에도 시간을 허비하고, 그래서 그 인형이 아주 중요한 것이 돼버려. 그러니까 누가 그걸 뺏으면 우는 거야-
 
어린 왕자!
 
너는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드구나. 이 육신을 묵은 허물로 비유하면서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드구나.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더라.
 
그렇다, 이 우주의 근원을 넘나드는 사람에겐 죽음 같은 게 아무것도 아니야.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니까. 어린왕자, 너의 실체는 그 묵은 허물 같은 것이 아닐 거야. 그건 낡은 옷이니까. 옷이 낡으면 새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들의 육싱도 그럴 거야. 그리고 네가 살던 별나라로 돌아가려면 사실 그 몸뚱이를 가지고 가기에는 거추장스러울 거야.
 
-그건 내버린 묵은 허물 같은 거야. 묵은 허물 그건 슬프지 않아. 이봐 아저씨, 그건 아득할 거야. 나두 별을 쳐다볼래. 모든 별들이 녹슨 도르래 달린 우물이 될 거야. 모든 별들이 내게 물을 마셔줄 거야-
 
5
법정스님어린 왕자!
 
이제는 너를 길들인 후 내 둘레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어린 왕자>라는 책을 처음으로 내게 소개해 준 벗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한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벗이다. 너를 대할 때마다 거듭거듭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벗은 나에게 하나의 운명 같은 것을 만나게해 주었으니까.
 
지금까지 읽은 책도 적지 않지만, 너에게서처럼 커다란 감동을 받은 책은 많지 않앗다. 그러기 때문에 나한테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經典)이라고 한다고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누가 나더러 지묵(紙墨)으로 된 한두 권의 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화엄경(華嚴經)>과 함께 선뜻 너를 고르겠다.
 
가까운 친지들에게 <어린 왕자>를 아마 서른 권도 넘게 사주었을 것이다. 너를 읽고 좋아하는 사람한테서는 이내 신뢰감과 친화력을 느끼게 된다. 설사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내 벗이 될 수 있어. 내가 아는 프랑스 신부 한 사람과 뉴질랜드 노처녀 하나는 너로 해서 가까와진 외국인이다.
 
너를 읽고도 별 감흥이 없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나와 칫수가 잘 맞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다. 어떤 사람이 나와 친해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너를 읽고난 그 반응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는 사람의 폭을 재는 한 개의 자(尺度)다. 적어도 내게서는.
 
그리고 네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누워서 들어. 그래야 네 목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야.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날아다닐 수 있는 거야. 네 목소리는 들을수록 새롭기만 해. 그건 영원의 모음(母音)이야.
 
아. 이토록 네가 나를 흔들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네 영혼이 너무도 아름답고 착하고 조금은 슬프기 때문일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샘물이 고여 있어서 그렇듯이.
 
네 소중한 장미와 고삐 없는 양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너는 항시 나와 함께 있다.
 
안녕.
 
1971년 11월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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