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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의 母音] 그림자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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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함께 살던 이웃이 문득 이 지상(地上)의 적(籍)에서 사라져버린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것은 손때가 묻은 약간의 유물(遺物)뿐. 그것들은 무심(無心)해서 말이 없지만 보는 사람으로하여금 만가지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그러기 때문에 남이 보기엔 하찮은 것일지라도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소중히 간직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이 남는 것일까?
 
몇 장의 인상적인 기억, 그것이 때로는 저녁놀 같은 빛을 지니고 우리 앞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청담(靑潭)스님이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가버린 뒤 스님이 남긴 것도 그러한 그림자 뿐이다.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의 일모(日暮)에 선학원(禪學院)으로 스님을 뵈러 갔더니 스님은 난롯가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새기고 있으셨다. 알고 보니 바가지에 전각(篆刻)을 하시는 것이었다. 돋보기를 벗고 빙그레 웃으시더니 상자를 하나 내놓으셨다.
 
그 안에는 생긴대로 전각을 한 바가지 조각이 여남은 개나 들어 있었다.
 
"잘 새겼제?"
 
인주를 묻혀 화선지에 찍어보는 나를 보고 자랑이셨다. 속으로 나는, 이 노장님이 언제 이런 걸 다 익혔나, 하고 놀랐었다. 
 
" 스님, 제법입니다."
 
당돌하게 대답하고 함께 웃었다. 스님은 그 후로도 가끔 전각을 하여 당신이 쓴 글씨에 낙관도 하고 곁에서 새겨달라고하면 기꺼이 새겨주곤 했다.
 
글씨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스님은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도 여가만 있으면 즐겨 글씨를 썼다. 그중에서도 부처불(佛)자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이 썼을 것이다.
 
스님의 글씨는 물론 격(格)에서 벗어난 글씨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그 글씨가 추사(秋史) 이래 독보적이라거나 우리나라에서는 알 사람이 없고 유럽에 가야 알아줄 거라는 그런 류의 찬양에는 공감이 가지 않지만, 전각이나 글씨를 통해서 스님의 인간적인 뜰을, 무심한 그 여백을 넘어다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스님은 수석(水石)을 즐겨 방안에 항상 수반을 두고 돌과 이끼를 가꾸었다. 도선사 백운정사(白雲精舍) 곁에 마련된 연못은 스님이 남긴 조원(造園)의 솜씨다. 이런 취미는 스님의 무심한 듯 하면서도 자상한 성품에도 연유하겠지만, 젊은 시절 일본 사원에서 수업(修業)할 때 익힌 솜씨가 아일까 싶다.
 
또 스님은 한동안 카메라에도 적잖은 열을 기울였었다. 노장님들 사이에서는 간혹 주착이 없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어디 가실 때는 시자는 안데리고 가도 카메라만은 반드시 대동하였다. 그런데 사진의 구조나 촬영의 솜씨가 아마튜어급은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스님이 남긴 유물 가운데서 사진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말을 문도를 통해 들었다.   
 
아는 사람은 익히 알고 있지만, 스님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형편 이하였다. 남의 사정을 전혀 도외시(度外視)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스님에게 강연 같은 것을 부탁한 주최측은 시간 때문에 노상 쩔쩔매었다. 몇번이고 '시간이 지났습니다'라는 쪽지를 내야만 마지못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 미당(未堂) 시백(詩伯)은 함께 강연초청을 받고 갔었는데, 스님이 내려오지 않아서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고 하였다.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있을 때였다. 아침공양이 끝나면 으레 공사(대중을 모아놓고 하는 회의)가 뒤따랐다. 그것은 회의의 성격과는 달리 후학들에게 하는 법문(法門)으로 귀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공사가 아침공양 끝에 시작하면 바리때를 올려놓지도 못한 채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점심공양을 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러는 변소에 가는 척하고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는 빈 자리가 났었다.
 
한번은 득도식(得度式), 즉 승려가 되는 의식이 있어 스님이 오계(五戒)를 설하던 참이었다. 그때 마침 홍류동(紅流洞) 골짜기에는 산불이 일어나 대중들은 모두 불을 끄러 갔었다. 불을 끄고 너댓시간 후에 돌아와 보니 그때까지 스님은 법상(法床)에 앉은 채 설계(說戒)하고 있었다. 보통 반시간이면 마칠 것을 장장 다섯 시간이 넘도록 설법을 한 것이다. 도중에 변소에를 한번 다녀와서 설법했다는 말을 듣고 대중들은 웃지도 못했다.
 
스님은 말년에 육환장(六環杖)을 노상 짚고 다녔었다. 회의 장소고 차 안이고 가리지 않고 몸에 그림자처럼 지녔다. 승가에서 육환장은 걸식(乞食)하는 비구(比丘)라면 누구나 짚고 다니도록 되어 있다. 부처님 때 어느 비구가 밥을 빌러 갔는데 임신한 여인이 불쑥 나타난 그 비구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유산을 했다. 그때부터 지팡이에 쇠고리를 달아 그 울리는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게 했던 것이다. 여섯 개의 고리는 수행덕목(修行德目)인 6바라밀(波羅蜜)을 상징한 것.
 
그런데 스님은 이 육환장의 용도를 다양하게 썼다. 길을 가다 발끝에 채일 돌멩이나 유리병 조각 혹은 휴지 나부랑이가 있으면 반드시 육환장으로 한쪽에 치워놓는 것이었다. 비가 와서 빗물이 고인 마당에도 이 육환장 끝으로 물길을 터 빗물이 빠지게 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권위(權威)를 위해 휴대하는 걸로 오해했을 지도 모르지만 스님은 그러한 용도로 썼던 것이다.
 
이제는 육환장도 그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됐다. 회의가 다 끝날 무렵 "잠깐, 일분간만 말하겠소"하고 일어날 사람도 없다. 법문(法門) 도중에 시간이 지났다고 쪽지를 띄울 일도 이제는 없어졌다.
 
사람은 가고 기억의 그림자만 남는 것인가.
 
1972년 1월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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