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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에는 꽃이 피네] 행복(幸福)의 조건(條件)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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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침묵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언젠가 명동에 있는 카톨릭 여학생관에서 무슨 강론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만일 성서를 편찬했다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기 전에 무거운 침묵이 있었노라고 기록했을 것이라고. 그러자 어떤 남자 신도가 불쑥 일어나더니 그게 아니라며 태초에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혼을 올릴 수 있는 말씀이라면 무거운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 침묵은 모든 삼라만상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나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배경엔 늘 침묵이 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과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안에 있는 것을 늘 밖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침묵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밖으로 쳐다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안으로 들여다보는 데서 침묵을 캐낼 수가 있다. 침묵은 자기 정화의, 또는 자기 질서의 지름길이다. 온갖 소음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려면 침묵의 의미를 몸에 익혀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잡다한 지식의 홍수에서 어떻게 놓여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의 홍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또 하나는 넘쳐나는 물량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다음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은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선별하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러다 보면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의지에 의해 삶이 끌려 다닌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또는 여행길에서도 우리들은 조용히 자기 내면을 관찰할 기회가 별로 없다. 이것은 외부적인 소음 때문이다. 마침내는 거기에 중독된 나머지 늘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요구하게 된다.
 
내가 산중에 있다가 밖에 나올 때 문득 느끼는 것이 저질 문화의 홍수다. 저질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문화의 홍수에 우리가 휘말려 있다는 것을 문득 느끼게 된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저질 문화의 홍수에 맹종할 게 아니라 분명한 자기 질서를 갖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지금까지 받아들여온 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말이 적은 사람,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도 이제 가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말수가 적은 사람들한테는 오히려 내가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어진다.
 
사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아내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습관이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비어 있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떤 낡은 자로써,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우리는 넘치는 물량 속에 살고 있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 가면 얼마나 물건들이 많은가. 한때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 앞에서 흔들린다. 자기 억제 능력이 없으면 그 앞에서 우리는 그냥 무릎을 꿇고 만다.
 
이렇게 물량이 넘치다 보니까 전에 없던 낭비벽이 생겼다. 어느덧 불필요하게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어떤 의미에선 과시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 남도 가지고 있으니 나도 가져야 한다는 심리에서 물건을 사들인다. 물건을 함부로 다루기 때문에 물건에 대한 고마움을 모른다. 새로 사면 되니까, 옛날 같으면 양말도 꿰매서 신을 걸 지금은 내던져 버린다. 그리하여 검소하고 소탈한 인간의 기품이 자꾸만 허물어져 가고 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이들은 높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외부의 형태에만 관심을 갖는다.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그들은 똑같은 상품을 대형화시키고 자꾸 비싼 값으로 만들어낸다. 값싸고 유익한 물건은 이윤이 적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선택의 압력을 가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세계 지성들이 다 같이 걱정하는 바다. 지성들뿐이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현상이다. 세계의 지성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철저한 내적 변화만이 그릇된 가치의식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적 변화는 생활의 질서에서 얻어진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적게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욱 적을수록 더욱 귀하다. 더욱 사랑할 수 있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갖고자 하는 희망이 있다.
 
가령 가게에 새로운 옷이 나왔다고 해서 단박에 사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한 며칠 입다가 시들해진다. 그러나 지금 형편이 안 좋거나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다음으로 미루어 보라. 월말에 또는 이 가을 지날 때, 겨울로. 새봄으로. 그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부푼다. 그 옷이 아직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필요하다고 해서 당장에 사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 아니면 자꾸 뒤로 미뤄 보라. 그러면 세월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인지, 없어도 좋은 것인지 그 기간에 판단이 선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저 필요하다고 그때그때 잔뜩 사들여 보라. 그것은 추한 삶이다. 결국에는 물건 더미에 깔려 옴짝 못하게 된다. 구하지 않아도 좋았을 그런 물건들이 우리의 집안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 시간이 있어서 미술관에 갔는데, 그곳에 200호에 가까운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너무 크다. 이제는 작은 소품을 만나기 어렵다. 분명히 작은 것이 아름다운데도, 우리 주위엔 거대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행복의 조건은 우리 곁에 늘 깔려 있다. 들길을 가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한 무더기 구절초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또 시장 골목을 지나치든가  무슨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환하게 웃는 미소를 만난다면 그 미소를 통해서도 적어도 하루의 행복은 보장된다.
 
큰 것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 둘레에 그렇게 널려 있는 무수히 많은 행복과 고마움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사람들은 삶을 제대로 살 줄 알아야 한다. 소유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우리들의 자유로운 날개를 쇠사슬로 묶어 버린다. 그것은 또한 자기 실현을 방해한다.
 
무엇을 갖고 싶다는 것은 비이성적인 열정이다. 비이성적인 열정에 들뜰 때 그것은 벌써 정신적으로 병든 것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삶의 부피보다는 질을 문제삼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삶을 살 줄 알 때 사람일 수가 있다. 채우려고만 하지말고 텅 비울 수 있어야 한다. 텅 빈곳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려 나온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에 있다.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의 청정한 본성인 사랑과 지혜에 가치 척도를 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물질이나 정신이나, 밖으로나 안으로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또 온갖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에라도 얽매이면 자주적인 인간 구실을 할 수 없다.
 
무슨 일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 일을 하되 그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얽매이면 그 일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 일을 하되 얽매이지 않으려면 저마다 자신의 청정한 본성에, 곧 지혜와 사랑에 가치의식을 두어야 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해탈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이 되묻는다. 누가 너를 일찍이 묶어놓았느냐. 이것이 답이다. 누가 너를 일찍이 묶어놓았는가. 인간은 본래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생활 습관이 잘못 들어 그 소용돌이에 스스로가 말려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 안에 영성이 있고 불성이 있다. 집에서 살림을 하든 밖에서 일을 하든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소재이다. 사실 따로 참선하고 염불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 심성 자체가 지극히 신령스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영성과 불성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대개 일시적인 충동과 변덕과 기분과 습관 등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일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그런 훈련이 필요하다.
 
인생을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선 자리에서 내 인생을 심화시킬 것에 마음을 둬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한지 아닌지, 수시로 따져봐야 한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다면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한 달 전의 나와 한 달 후의 내가 똑같다면 나 스스로를 그렇게 가두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없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삶이 침체된다. 삶에 나날이 변화를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일상이 진부하고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삶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라고 말한다.
 
삶은 늘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위로 오르든 날고 떨어지든 되어가는 어디에도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매달려 버리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정지되어 버린다.
 
우리들 자신을 안으로 항상 성찰해야 한다. 안으로 되살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사람은 한 번 죽지만, 잘못 사는 사람은 수백 번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을 아무렇게나 탕진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행복은 늘 단순한 데 있다. 가을날 창호지를 바르면서 아무 방해받지 않고 창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 때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가.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 버리면 자기에게 주어진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 도배가 되었든 청소가 되었든 집 고치는 일이 되었든 내 손으로 할 때 행복이 체험된다. 그것을 남한테 맡겨 버리면 내게 주어진 행복의 소재가 소멸된다.
 
행복하려면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몸에 대해선 얼마나 애지중지하는가. 얼굴에 기미가 끼었는가 말았는가, 체중이 얼마나 불었는가 줄었는가에 최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우리들 정신의 무게가, 정신의 투명도가 어떻다는 것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내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자기 분수를 헤아려 거듭거듭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잇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건 한때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자극으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을 채워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어디쯤에 왔는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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