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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에는 꽃이 피네] 자기(自己) 안을 들여다 보라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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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내가 불일암에서 17년이나 살다보니 삶이 단조로워졌다.
 
새롭게 뭔가를 시작해 보고 싶어서 떠난 곳이 강원도 산골이다. 물론 아는 사람이 빈집을 연결해 줘서 인연 닿은 대로 가서 살게 된 것이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문명의 이기가 들어오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전기와 전화가 없어 처음엔 아주 답답하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바깥에 나오면 전등불이 너무 밝게 느껴지고 전화벨 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다.
 
수행 생활하면서도 이름이 알려져 너무 번다하게 살다가 이제 자연에 묻혀 사니 내 안에 낀 때가 벗겨지는 것 같다. 또 자연으로부터 얻는 교훈과 배움이 많아서 그렇게 살고 있다.
 
나는 지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내가 사는 환경이 궁핍하고 거의 원시 상태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우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그냥 그곳에 잠시 있을 뿐이다. 나그네처럼 있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영원한 거처가 어디 있는가.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 때 아는 스님이 묵화 한 점을 그려준 적이 있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 압정으로 벽에다가 붙여놓고 보았다. 그런 그림은 격식 없이 그린 것이기 때문에 족자 같은데 가둬 놓으면 그림이 죽는다. 그냥 그대로 꽂아 놓고 보아야 한다.

그림의 글이 고고봉정립(高高峯頂立) 심심해저행(深深海底行), 때로는 높이높이 산 위로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는 교훈이었다. 옛 선사의 게송이다.

세상 속에서 번잡하게 살다보면 너무 노출되기 쉽고 세상물이 든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이 좀 묻혀서, 좀 덜 노출된 채 자기의 잠재력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내가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그런 의미에서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려는 일과 상통한다.
 
신앙인과 수행자들은 시시각각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절에 가면 선방 앞 섬돌에 이런 표찰이 붙어 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비칠 '조', 돌아볼 '고', 아래 '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살피라는 뜻이다. 자기가 서 있는, 지금 자기의 현실을 살피라는 것이다.

섬돌 위에다가 그런 표찰을 붙여 놓는 것은 신발을 바르게 벗으라는 뜻도 되지만, 그건 지엽적인 뜻이다. 본질적인 뜻은 그런 교훈을 통해서 현재 자기가 서 있는 자리, 그 현실을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절에서든 교회에서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 보고 듣고 배운 것만 갖고도 부처나 성인이 되고도 남는다. 보는 것, 배우는 것, 듣는 것, 그 자체만 갖고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의미가 없다. 그것이 일상 생활에 실행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는 이론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이라 해도 그것은 이론서에 불과하다. 가이드북일 뿐이다. 그것을 가지고 실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행위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나 자신도 이 얘기를 하면서 반성을 한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거길 뭐하러 가지?' 지금도 강원도에 눈이 온다. '눈 오는 날, 거길 뭐하러 가지?' 물론 일요 법회가 있어서 가긴 하지만 나 스스로 자문을 했다. '도대체 이렇게 내가 나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뭣 때문에 대중 앞에 나가서 떠드는가?'
 
그래서 나는 속으로 무척 자기 저항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괜히 남 앞에 가서 이래라 저래라 떠드는 게 마음에 저항이 된다는 말이다.

종교는 한 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보살행, 자비행은 깨달은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익혀 가는 정진이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쌓은 행의 축적이 마침내는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몰랐던 것을 아는 것,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본래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꽃씨를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면 그것이 시절 인연을 만나 꽃 피고 열매 맺는 것,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본래 우리 마음 가운데 깨달음이 갖춰져 있다. 본래 밝은 마음이다. 헛눈 파느라고, 불필요한 데 신경 쓰느라고 제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다. 참선도 행이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경을 읽든 모두가 일종의 행이다. 닦는 행인 것이다. 행을 통해 본래 자기 마음의 빛이 드러난다. 행하면서 하루하루 살다 보니까 그 결과가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부처의 전생 얘기를 보면 주로 두 가지다. 보시와 인욕이다. 남에게 베풂, 어려움을 나눔, 눈도 뽑아 주고, 필요하다면 팔도 잘라 주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줘 버린다. 상징적인 얘기지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푼다. 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욕, 곧 욕된 것을 참는다.
 
그 결과 부처는 금생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행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내가 기독교 신자로서 불교 신자로서 과연 그 가르침대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야 한다.

신앙인들은 그런 물음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 그런 물음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감이 없다. 스스로 물어야 한다. 누가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내 행위에 대해서, 내 발끝을 돌아보듯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물음을 던져야 한다.

<화엄경(華嚴經)>의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없다. 행하는 것, 그것이 도를 구하는, 진리를 구하는 진실한 모습이다.'
 
듣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이 절 저 절을 다니면서, 또는 이 교회 저 교회 저 성당을 기웃거리면서 많은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걸 갖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문이나 잡지 보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문사수(聞思修), 들을 '문', 생각 '사', 닦을 '수', 들었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은 자기를 여과시키라는 뜻이다. 자신의 체로 걸러 받음이다. 그리고 나서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상에 옮기라는 것이다.
 
같은 경전에 또 이런 비유가 있다.
 
'맛있는 것을 보고서 먹지 않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온갖 약과 치료법을 잘 알고 있는 의사도 병에 걸려 낫지 못하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보라. 의사도 병에 걸려 죽지 않는가.
 
'가난한 사람이 밤낮없이 남의 돈을 세어도 자신은 한 푼도 차지할 수 없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지만, 옛날 인도에서는 부자들이 아마 가난한 사람을 시켜서 돈을 세게 한 모양이다. 돈을 세봤자 거기서 팁이나 일당이나 받았지, 실제적인 자기 것은 없다는 말이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알 수 없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스스로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도를 구하는 진실한 모습이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란 경전이 있다. 인도로부터 최초로 중국에 들어왔다고 전해지는 경전 중 하나다. 이 사십이장경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많이 듣는 것으로써 도를 사랑한다면 도는 끝내 얻기 어렵다. 뜻을 굳게 지켜 진리를 받들어 행함으로써 그 도는 크게 이루어진다.'
 
불교의 모든 경전에 보면 신수봉행(信受奉行)이란 말이 있다.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한다는 뜻이다. 모든 경전 끝에 가서, 신수봉행하라, 이런 부처님의 설법을 잘 듣고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한다.
 
나 자신도 많이 반성하지만, 신앙인들은 많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 안이 시끄러워질 뿐이다. 자기 본심대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다. 본심, 우리의 근본 바탕은 똑같다. 부처나 보살이나 내 자신이나 똑같다. 불성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고, 듣는 것에 너무 팔리지 말고, 자기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본래 천진한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진이다.
 
<금강경(金剛經)>에 보면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라는 구절이 있다. 진리도 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진리 아닌 것이랴! 바깥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설령 부처의 말이라 해도, 그건 그 상황에서 그렇게 얘기된 것이다. 오늘 내가 그 얘기를 들었다면 오늘 상황에 맞도록 그와 같이 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의 질서이다. 하루 한 가지씩 작은 선이라도 행해야 한다.

그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거듭거듭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넘어진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경전을 많이 봤다고 해서, 법문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룻동안에 한 가지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는가.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는 행동을 했는가 안 했는가에 의해서 그날 하루를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그 실행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거듭거듭 일으켜 세워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룻동안에 한 가지라도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결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이 말을 거듭 명심해야 한다.
 
만남은 시절 인연이 와야 이루어진다고 선가에서는 말한다. 그 이전에 만날 수 있는 씨앗이나 요인은 다 갖추어져 있지만 시절이 맞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다. 만날 수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가 시절 인연이 와서 비로소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만남이란 일종의 자기 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종교적인 생각이나 빛깔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될 때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열리면 사람과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나는 가끔 카톨릭 장익 주교님을 만난다. 그분을 만날 때 우리 사이에는 자신이 무슨 승려라거나 상대방이 사제라거나 하는 의식이 전혀 없다. 그런 것 없이 마음을 터놓고 만나다 보니 전혀 벽도 없고 또 종교간의 거리도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다. 또 우리는 만나서 거의 종교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또 한 사람의 사제로서, 서로가 인간적으로 만나며 그 만남 속에서 모든 것이 융화된다.
 
모든 종교에는 독단적인 요소가 있다.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요소가 끼어들면 인간 교류 자체가 불가능하다. 종교간에 벽이 허물어지려면 우선 대화가 있어야 하고, 대화를 가지려면 독단적인 울타리를 넘어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윤리, 공동선 같은 것이 서로 통할 수 있다.
 
몇 해 전 로마에 갔을 때 장익 주교님이 안내해 몇 군데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었다. 수비야코의 베네틱트 성인, 내가 좋아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들의 유적지들을 돌아보는데 마치 인도 불교 성지 순례할 때의 그런 성스러움, 옛 성인들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이 우러나왔다. 여러 가지로 많이 배우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였다.
 
이런 비유가 있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 길은 달라도 다 정상으로 통하는 루트들이다. 그런데 자기가 오르는 루트만이 가장 옳다고 고집하게 되면 결국에는 히말라야에 못 오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종파적인 종교를 통해서 마침내 보편적인 종교의 세계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종파적인 종교라는 것은 나무로 치면 가지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을 전부라고 고집하면 나무 전체를 알 수 없다. 마하트마 간디가 즐겨 쓰던 비유이다.
 
종파적인 벽이나 독단적인 요소만 극복할 수 있다면 모든 종교를 하나로 보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분쟁이 일고 있는 종교적인 갈등은 종파적인 벽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다른 종교를 무시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진정으로 불교를 알려면 불교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불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진정한 불교를 알 수 없다. 부처에 얽매이면 참부처를 볼 수 없고, 보살에 얽매이면 진짜 보살행을 할 수 없다.
 
참선하는 사람은 오로지 참선만이 전부이고 염불해서는 깨닫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만이 오로지 지름길이며 참선해서는 구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갖는 건 좋다. 또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오직 전부라고 고집한다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인도 고전인 리그 베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적인 자비는 사실 똑같은 것이다. 사랑은 가볍고 자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다른 표현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의 삶으로 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말 자체에 집착하게 되면 뜻은 놓치고 모순에 빠진다.
 
<열반경(涅槃經)>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을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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