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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에는 꽃이 피네] 적게 가져야 많이 얻는다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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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내가 사는 데는 아직도 얼음이 얼어 있고 눈이 잔뜩 쌓여 있는데 이곳 남쪽에 오니까 꽃이 피어 있다.
 
내가 아마도 욕심이 많기 때문에 무소유를 그렇게 강조하게 된 듯하다. 내가 늘 가만히 반성해 본다. 지금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오두막 살림에서 보면 다기도 한두 벌이면 될 텐데 서너 벌 있고, 또 생활 도구도 이것저것 가진 게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소유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만큼 편리한 것도 있지만 소유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측면이 있다. 부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 파손됐거나 또는 잃어 버렸을 때 정신적인 상처도 뒤따른다. 가진 것만큼 집착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갖지 않아도 좋은 것은 갖지 말아야 한다.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의식이 그만큼 분산되고, 사람이 단순해지지 못하고, 더 불순해지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가진 것이 적어야 한다. 가진 것이 적어야 마음이 편하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 것도 없이 이 세상에 와서, 아무 것도 없이 떠날 뿐이다. 모든 것은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잘 쓰기 위해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선하게 쓸 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잘 쓰지도 않고 묵혀 두는 건 죄악이다. 왜냐하면 남이 가질 몫까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가진 것이 적어야 마음이 홀가분하다. 내가 무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넘치는 세상일수록 가난의 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선택한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 성서에도 있듯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가난에서 오는 복이라는 개념이 요즘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사람을 이루고 있는 가장 밝은 요소가 복이다.
 
내가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시작하자 잘 아는 스님이 어떻게 그런 머리 무거운 일을 해나가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면서 어떻게 그런 마음을 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이 밥값을 해야 되겠지'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관여하고 있는 이 일이 밥값을 하는 일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알겠다.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씨앗을 지니고 나온다. 그것을 불성 또는 영성이라 이름한다. 그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피우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보람이다.

영성과 불성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피우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을 맑히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 마음을 맑혀라.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절에서 많이 한다. 원래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지극히 관념적인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자기 마음을 맑히라니 어떻게 맑힐 것인가. 마음을 비우라니 어떻게 비울 것인가. 열심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옹졸하고 막혀 있어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관념적인 것을 갖고는 마음이 맑아지지 않는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이나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관념화되기 쉽다. 현실적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 선행을 함으로써 저절로 우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진다. 마치 시절 인연이 와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그렇게 맑아진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나쁜 짓 하지말고 착한 일을 두루 하라. 그러면 저절로 그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바로 모든 부처들의 가르침이다.' 법구경에도 나오고 여러 문헌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맑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 둘레가 점점 맑아져서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 예수나 부처 같은 분들의 맑은 마음이 메아리 되고 두루 비쳐서 오늘날까지도 사방을 맑게 비추고 있다. 만일 그런 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불우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눈물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진 한쪽 가지가 그렇게 아파하기 때문에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메아리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로움과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이다.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제대로 건널 수 있다.

육바라밀(여섯 가지 지혜) 가운데 보시 바라밀을 첫째 가는 바라밀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라밀이라는 것은 세상을 사는 일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 도달하는 일, 나루를 건너가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사는 문제이다. 그 중에서도 첫째 가는 것이 나눠 갖는 일, 보시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몇 곱으로 늘어난다. 반대로 괴로움과 슬픔을 나눠 가질 때, 그 괴로움과 슬픔은 몇 곱으로 줄어든다. 나눔에는 이렇듯 미묘한 율동이 따른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 관계가 우리들 자신을 만들어간다.
 
모든 것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시들고 쭈그러든다. 내 글만 읽고 나를 현품대조하러 온 사람들이 가끔 깜짝 놀란다. 법정 스님하면 잘 생기고 싱싱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별 볼 것 없고 바짝 마르고 쭈글쭈글하니 실망의 기색이 역력하다. 그때 마다 나는 속으로 미안해한다.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진다. 늘 새차일 수가 없다. 끌고 다니다보면 고장도 나고 쥐어박아서 찌그러들기도 한다. 육신을 오십 년, 육십 년 끌고 다니다 보면 폐차 직전까지 도달한다. 거죽은 언젠가는 허물어진다. 생로병사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 한다.

그러나 보라.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 나이가 있는가.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빨리 시든다. 세상의 유행을 쫓다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중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새롭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중심이 잡혀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피어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크고 많은 것을 추구하다 보니 무뎌져서 작고 적은 것에 고마워할 줄 모르게 되었다.

내가 가끔 시내에 나오면 편지가 와 있다. 편지는 받지만 답장을 자주 쓰지는 못한다. 지난 겨울 어느날 밖에는 눈이 오고 뒷골에선 노루 울음소리 들려 내 마음도 소년처럼 약간 부풀어올랐다. 그래서 묵은 편지를 뒤적이다 답장을 몇 군데 써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 벼루에 먹을 갈았다.

마땅한 종이가 없어 뒤적이다가 도배하고 남은 종이 사이에서 화선지 두 장을 발견했다. 그것도 전지가 아니고 쪼가리였다. 그걸 오려서 편지를 몇 통 썼는데, 종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아껴 써야 했다. 자연히 종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때는 글씨도 크게 써서 끝내곤 했는데 그날은 아주 잔글씨로 써서 몇 군데 띄워 보냈다. 그때 적은 것이 참 살뜰하고 고맙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갔다가 지물포에서 화선지를 스무 장 남짓 사 갖고 왔다. 그랬더니 쪼가리 두 장 가졌을 때의 오붓하고 살뜰하고 고맙던 정이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것은 그런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들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내가 잘 아는 친구가 인도 여행을 갔는데 거리에서 파는 금속 공예품이 마음에 들어 흥정을 시작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이 빤히 쳐다보더니 천 루피를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우리 돈으로 치면 사만원 정도인데 인도에서 천 루피면 굉장히 큰 돈이다. 사람 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백 루피만 하자고 십분의 일로 깎자 백오십 루피만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칠십 루피만 하자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그냥 나오려니까 주인은 할 수 없이 가져가라고 했다. 천 루피짜리를 칠십 루피에 산 것이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런데 값을 지불하고 나오려고 하니까 주인이 뒤에서 '아 유 해피?'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당신 행복하냐고, 그렇게 싼값에 물건을 사서 정말로 행복하냐고, 이 말을 듣고 친구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더라고 했다. 그건 행복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건 행복이 될 수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렇게 얘기하더라는 것이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그러나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다.'

그래서 그 친구가 거기서 행복에 대해 큰 교훈을 얻었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다.
 
물건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소유물은 오히려 우리를 소유해 버린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면 안 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부처가 마지막 설한 <유교경(遺敎經)>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알면 항상 넉넉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령 천국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자연의 질서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며 소우주이다. 가령 날씨가 찌푸둥하고 저기압일 때 우리 몸도 쑤시고 결린다. 날씨가 화창하면 우리들 몸과 마음도 경쾌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 자체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베풀어 주고 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듯이 우리에게 주고 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따뜻한 햇살, 논밭의 기름진 흙, 천연의 생수와 강물, 침묵에 잠긴 고요,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름다운 꽃과 새소리 등 온종일 주워 세도 모자랄 정도로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거저 준다. 전혀 대가도 없이.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받고도 고마운 줄 모른다. 함부로 허물고 더럽히고 끝없이 학대하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생활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삶 자체가 생태계 순환 속에 들어있고, 우리들 인간의 행위가 자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 행위는 다시 결과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현상이 인과 법칙이고 우주 질서이다.
 
들짐승들은 자신들이 사는 둥지를 결코 더럽히지 않는다. 사람들만이, 소위 문명인이라는 인간들만이 자신들의 생활 환경을 끝없이 허물고 더럽힌다. 만신창이가 되어 앓고 있는 자연의 신음소리는 곧 우리들 자신의 질병이다. 동시에 그 신음소리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신음소리이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인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허물어지고 오염되면 우리가 기댈 곳이 어디인가. 그렇게 되면 우리들 자신의 영역이 허물어지고 오염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물건은 지구상의 한정된 자원의 일부이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 당대에서 써버리고 탕진할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물건은 공장에서 기계와 기름과 화공약품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과도한 소비는 반드시 자연의 훼손과 환경의 오염을 가져온다.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 가전제품 한 가지, 가구 하나를 만들어 내는 데는 그만큼 매연과 산업 쓰레기와 더러운 물이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생명력은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곧 자정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그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것이 생명력이다.

인간이나 자연 모두 마찬가지이다. 자연에게 너무 과다한 짐을 지우니까, 너무 착취하니까 자기 정화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잃어 버렸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삶 자체도 병들어 버린다. 우리들 스스로가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꽃들은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는다. 매화는 매화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진달래는 진달래다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 피어날 뿐 어느 꽃에게도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는다.

비교하지 않고 자신답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는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삶의 질서가 필요하다. 물건을 사들여 한동안 간직하고 쓰다가 시들해지면 내다 버리고 다시 새것으로 사들이는 이런 소모의 악순환에 사로 잡혀 있는 한 내적인 평온이나 맑은 기쁨은 결코 얻을 수 없다.
 
크고 많은 것, 그것은 허한 것이다. 소유를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적게 가져야 더 많이 얻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늘 지켜보는 일이다. 그 다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그 씨앗이,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맑혀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몸담아 사는 세상을, 그리고 마음을, 그 속에서 의지해 살다가 언젠가는 그 품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길 자연을 향기롭게 가꿔야 한다.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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