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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비화] 수방사 복싱부의 창단과 묻혀진 추억들

--조영섭 복싱

by econo0706 2022. 11.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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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3. 05.

 

최근 중국을 방문했던 필자는 신의주가 눈 앞에 보이는 랴오닝성 단둥시에 들렸다. 단둥 앞엔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압록강 강변에 정박한 중국해군 함정에서 병사들이 복싱 타격훈련을 하고 있었다. 맨주먹으로 직선과 곡선의 하모니를 이루며 쏟아내는 연타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1934년 조선권투연맹이 발족됐을 때 복싱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긴장하며 최후에 일순까지 싸우고 마는 운동은 없다는 취지문 내용처럼 군인정신과 복싱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동시에 1988년 중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윤필용 장군이 창단시킨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복싱부가 떠올랐다

 

▲ 고명승 수방사 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는 유제두, 안래기, 유명우, 임종대, 박병수(왼쪽부터) / 조영섭 관장


수경사 복싱부는 1970년 1월 사령관에 부임한 윤필용 장군이 허버트 강을 세계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그해 5월 팀을 창단했다. 오전에 근무하고 오후엔 서울 을지로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훈련한 뒤 귀대했던 수경사 복싱팀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던 유제두였다. 1970년 4월 이안사노(본명 이병태)와 국내 타이틀을 불과 3일 남겨놓고 입영통지서가 나온 그는 결국 논산훈련소에 차출돼 교육을 받았다. 이후 수경사에 복싱부가 창단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연락을 취해 극적으로 배치됐다.

 

1971년 4월 이안사노를 1회 KO로, 석달 뒤 케시어스 나이또에 6회 KO승을 거두고 국내와 동양을 각각 석권한 유제두는 1973년 수경사에서 35개월 군복무를 마쳤다. 그는 그때 받은 파이트머니로 마포에 유덕체육관을 설립했고 결혼과 함께 윤필용 장군의 도움으로 해태그룹에서 지속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훈련에 몰입, 2년 후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는 발판을 마련했으니 1석4조의 효과를 수경사 복싱부에서 창출해 낸 것이다. 후임으로 들어온 홍수환도 일병 때 WBA 밴텀급 세계정상에 올랐고, 염동균도 제대 후 WBC 슈퍼밴텀급 정상에 올라 명 복서 반열에 진입했으니 프로복서들에겐 수경사 복싱부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는지 모른다.

1979년 10·26과 12·12사태 와중에 한차례 해체된 수경사 복싱부는 1982년 수방사 복싱부로 재창단, 유제두·오영세 투톱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후 이승훈을 비롯해 백인철, 유명우, 장태일, 박영균, 이경연 등 세계챔피언이 탄생하면서 한국복싱 중흥기에 한축을 담당했지만 1988년 중반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 서부권투회 모임에서 안래기와 임종대(오른쪽) / 조영섭 관장

 

수경사를 거쳐간 숱한 복서중 WBC 플라이급 1위 안래기와 1984년 MBC 신인왕출신 임종대 두 복서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둘은 유명우, 박병수와 함께 1964년생 동기생이다. 1981년 5월 데뷔한 안래기는 1983년 유명우와 대결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12전 9승 2무 1패 4KO를 기록한 그는 11전승을 기록한 유명우와 8회전 경기에서 손에 땀을 쥐게하는 치열한 타격전을 펼쳤다. 누구의 손이 올라가도 이견이 없는 팽팽한 접전이었다. 비록 근소한 차로 판정패 했지만 유명우가 식겁했을 정도로 대등한 경기였다. 1985년 2월엔 임하식과 맞대결에서 7회 KO승을 거두며 급부상했다. 임하식은 최점환, 김봉준, 최창호, 김용강, 유명우 등 세계챔피언들과 격돌 2승3패를 기록한 베테랑 복서였지만 안래기의 강타에 KO패를 당했다. 이후 양회열과 이재연 등을 상대로 KO퍼레이드를 연출하자 안래기는 전문가들로부터 차세대 챔피언 후보로 주목을 받았다.

 

이 같은 절정기에 안래기는 수방사에 입대했다. 하지만 첫 경기부터 녹다운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85년 9월 김석봉에 판정승한 이후 국제경기에서 5연승(3KO승)을 거뒀지만 입대 전에 보여줬던 임팩트있고 생동감 넘치는 복싱은 담배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군생활이 체질적으로 걸림돌이 되었던 모양이다. 특히 1985년 12월 5일 메르세데스와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야유를 들어야 할 정도로 졸전을 펼쳤다.

 

반면 숙적 유명우는 1985년 12월 8일 군입대를 디딤돌삼아 WBA 쥬니어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등극과 함께 넘치는 체력으로 롱런가도를 향한 가속 페달을 밟는 등 묘한 대조를 이뤘다. 1987년 9월 WBC 플라이급 1위로 테국의 챔피언 치타라타에 도전한 안래기는 4회 KO패로 정상정복에 실패했다. 그나마 계백장군의 최후의 격전지인 황산벌이 있는 논산시 연산면이 그의 출생지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임전무퇴의 투철한 군인정신이 정상참작돼 영창행은 면했다.

 

▲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유명우와 안래기(오른쪽) / 조영섭 관장

 

그에 동료인 1984년 주니어 페더급 신인왕 출신의 임종대는 리드미컬한 스트레이트가 주무기인 테크니션이었다. 1983년 3월 데뷔해 신인왕전에서 5전 전승의 보라매체육관 곽승주와 88체육관의 돌주먹 김두산 등 강적을 차례로 잡아낸 후 결승에서는 김우천을 꺽으며 주니어 페더급 1984년 MBC신인왕에 등극했다. 이후 수방사에 입대해 전찬중과 무승부를, 강타자 최봉호에 연승을 거둔 막강 황현재와 치열한 난타전끝에 무승부를 기록하며 진가를 발휘했다.

 

구기철, 김용래, 조억기 등 정상급 복서들을 꺾은 7전 전승 유망주 표명길을 판정으로 제압한데 이어 상승세의 안창배 마져도 피스톤같은 연타로 맹폭, 4회 KO승을 거두자 일약 신데렐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당시 12승 7KO를 기록한 동아체육관 김진홍에 10회 한차례 녹다운을 내주며 2-1 판정패를 당하자 영창에 들어갔다.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군인의 기본정신인 수사불패 (雖死不敗)를 역행했다는 죄목(罪目)이었다. 이에 임종대는 군 제대와 함께 자연스레 은퇴를 했다.

 

▲ 신인왕전 1회전.곽승주에게 스트레이트를 때리는 임종대(왼쪽) / 조영섭 관장

 

이렇듯 수많은 복서들의 사연이 잉태된 수방사시절 추억은 그들에겐 잊을 수 없는 젊음의 한 페이지였다. 수방사 복싱부가 다시 부활하고 더 나아가 해군과 공군 복싱팀도 창단해서 3군 복싱대회를 개최하면 복싱 활성화에 기폭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 군 부대 내에서 윤 일병 집단 폭행사건 등 끊임없이 자행되는 구타사건, 가혹행위에 대한 해결책으로 병사들에세 복싱을 적극 권장하는 문제도 고려해 볼 만하다 생각한다. 멕시코에 있는 세레소 체투말이라는 교도소에는 불만이 있으면 복싱으로 해결하는 곳이다. 갈등이 있는 수감자들에게 복싱글러브를 제공해 2회전씩 치고 받는 경기를 펼쳐 갈등도 풀고 체력을 기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고있다. 이 때문에 10년간 교도소 내에서 단 한건의 폭력사태도 없었다고 한다.

수방사 복싱부 재건과 함께 복싱이 다시 한번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종목으로 자리매김하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조명철 /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아시아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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