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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비화] 아마와 프로의 갈림길에서 방항했던 짱돌복서 김창덕

--조영섭 복싱

by econo0706 2022. 11. 1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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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2. 26

 

‘봄처녀 제 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던 홍난파의 ‘봄 처녀’란 가곡이 입에서 절로 나오는 쾌창한 지난 주말이었다. 1982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과 1984년 LA올림픽 최종선발전 라이트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한국체대 출신의 진행범이 제주도에서 상경, 망중한(忙中閑)을 이용 필자의 체육관에 잠시 들렀다. 때마침 같이 참석한 한국체대 선배이자 현 배재고 체육부장인 이번 복싱비화의 주인공인 김창덕과 함께하며 오래만에 회포를 풀었다.

김창덕은 1960년 충북 청주출신이다. 청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직지심경을 1377년 흥덕사에서 탄생시킨 고장이다. 직지심경은 독일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도 78년 앞서 간행된 소중한 민족유산이다. 또 청주는 세계 3대 광천수인 초정 약수터가 있는 명소인데 이곳은 직무에 시달리느라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 불리는 조선시대 세종이 사계월간 머무르며 요양을 하면서 피부병, 안질, 위장병을 치료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필자는 20년전 청주시 남일면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 복싱강사로 1년동안 출퇴근 하면서 청주와 인연을 맺은적이 있는데 이때 느낀 점은 청주란 도시는 스포츠 각 종목을 대표하는 탑스타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한 스포츠 강도(强都)란 사실을 알게됐다.

 

▲ 김창덕, 박형춘 전 한국체대 감독, 장한곤 여자대표 감독, 정지복 전 아미복싱협회 전무(왼쪽부터) / 조영섭 관장

 

복싱에 홍기호, 축구의 최순호, 이운재, 양궁의 김수녕, 태권도 이동준, 유도 박종학, 레슬링 이정근, 야구 송진우, 장종훈 등 한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이 청주에서 성장하고 발전을 이룩했다. 이채로운 사실은 1983년 논개란 곡을 공전에 히트시키면서 당시 가요톱 10에서 조용필을 2위로 밀어내고 1등을 차지한 청주 세광고출신 가수 이동기도 한때 복싱 유망주였다는 사실이다. 1973년 제54회 전국체전 고등부 페더급에서 충북대표로 출전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페더급 금메달은 전북대표였던 유종만이었다.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란 김창덕은 복싱의 명문 청주농고 출신이다. 청주농고는 프로복싱 동양챔피언으로 명성을 날렸던 정상일과 정순현의 모교다. 본래 레슬링 선수였던 김창덕은 1976년 청주농고에 입학하면서 복싱으로 전향했다.

작지만 단단한 체형의 김창덕이 강렬하게 뿜어대던 양 훅에 선후배 동료들은 그를 짱돌주먹이라 불렀다. 당시 청주에는 2개의 체육관이 양분되어 있었다. 전재완, 정재룡 두 관장이 운영하는 청주체육관과 청주동양체육관에는 기라성같은 복서들을 다수 배출했다. 전재완은 홍기호, 김기석, 김재만을, 정재룡은 김창덕을 비롯해서 이충섭, 송경섭, 김원한, 박광천, 성낙준 등을 발탁·조련했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관계처럼 치열한 대립각을 세운 두 체육관에는 LF급에 청주동양의 짱돌주먹 김창덕과 면도날복서 김기석 두 맞수가 있었다. 이들은 ‘죽어도 지기싫은, 절대로 질수없는’ 숙적이자 라이벌이었다

이들은 전국체전과 대통령배 충북 선발전 등에서 세 차례 걸쳐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위빙과 더킹 등 보디웍에 능한 파이터 김창덕과 면도날처럼 예리한 카운터펀치가 돋보이는 정통파 김기석의 맞대결은 승패를 떠나 마치 허영모·문성길의 대결처럼 호각세였다. 선배 김기석이 1976년 5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1977년 한국체대에 1기로 진학하자 후배 김창덕은 프로전향을 염두에 둔다. 스타일상 프로에 적합한 스타일였기 때문이다.

 

▲ 1979년 전국선수권 플라이급 결승에서 임현식에게 라이트훅을 때리는 김창덕(왼쪽) / 조영섭 관장

 

바로 그때 김창덕의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충청프로모션의 대부 최승철 회장이었다. 최승철은 정순현, 정상일 쌍두마차를 포함해서 박남용, 박철희 등 중견급 복서들을 보유한 유명한 프로모터였다. 이런 그가 김창덕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후 최승철 자택에서 김창덕은 합숙하며 프로전향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벽에 부딪친 그는 아마와 프로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면서 결국 1년을 유급했다. 김창덕은 일년만 아마추어로 활동한 후 프로로 전향하기로 하고 1979년 제9회 대통령배에 충북대표로 출전했다.

상대는 경남대표 김철규였다. 1979년도 뉴욕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한국체대 출신 선수였다. 접전 끝에 판정에 패한 김창덕은 그해 전국선수권대회에서 매서운 짱돌주먹을 폭발시키며 파죽의 5연승(3KO)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인천대표 임현식에 아쉽게 패했지만 ‘복싱계 페스탈로치’ 한국체대 박형춘 선생은 킹스컵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임현식과 대등한 경기를 벌인 그의 기량을 높이 평가해 스카웃의사를 전달했다. 결국 1980년 한국체대에 진학함으로써 그의 프로행은 물거품이 됐다.

인생의 기회는 3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지구도 주기적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밤과 낮 그리고 사계절이 순환되듯이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작은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이를 라이프 사이클이라 한다. 그는 적절한 사이클의 타이밍에 맞춰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다. 김창덕은 대학 2학년대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국가대표 박권순을 판정으로 잡아내며 기염을 토했다. 그의 복싱 역사에 최대의 하이라이트였다.

 

▲ 김창덕과 최승철 충청프로모션 대표의 아내 홍원옥 여사 / 조영섭 관장

 

박권순은 허영모에 밀려 대표팀에서 탈락할 때까지 에이스로 활약던 복서였고 그 해 김명복배에서 우승한 복서였기에 김창덕의 기량도 간과할 수 없는 정상급 실력임을 공인받은 것이다. 1982년 대학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4전 전승(2KO승)을 거두면서 우승한 김창덕은 이듬해 한국체대를 졸업했다. 그 후 1987년 배재고에 교사로 채용되어 현재는 체육부장으로 전 종목을 아우르며 진두지휘하면서 33년째 봉직하고 있다. 1990년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위촉된데 이어 현재는 대한복싱협회 기술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김창덕은 삶의 분수령에서 자신의 진로를 정해준 박형춘 선생에게 결초보은(結草報恩)하며 지내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문득 1979년 3월 동아대학에 재학 중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한 천재복서 박찬희의 비화가 생각난다. 당시 그의 스승인 손영찬 선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 은퇴 후 동아대 교수자리를 약속했지만 당시 한 경기 당 3000만원의 파이트머니를 받던 그는 교수직을 거부했다. 당시 월 급여 50만원에 불과한 교수직이 내키지 않아 마음의문을 닫았던 것이다.

대문을 열면 도둑이 들어오지만 마음을 열면 기회와 행운이 들어온다 사람의 마음은 낙하산과 같은 것이다. 펴지 않으면 쓸수가 없는 것이다. 청년기의 잘못된 판단은 중년기의 고투, 늙어서는 후회로 연결된다. 프로복싱의 세계챔피언의 화려한 왕관도 잘못 관리하면 향기없는 해바라기로 전락하는 법이다. 정답이 없는 인생사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조명섭

 

아시아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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