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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⑮ 제2의 인생, 농구해설가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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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1. 05.

 

초유의 방송 2개사 동시 해설 

1984년 5월부터 KBS에서 농구 해설을 시작해 1997년 남자농구가 프로화되면서 그만두었다. KBS는 계속하기를 원했지만, 공무원 신분(체육부 서기관)으로 프로스포츠 해설에 대한 내부의 거부감이 있었다. 해설자 마이크를 내려놓을 때 아쉬움도 있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농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고 팬들의 사랑을 원 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좋다. 명쾌하다, 설명을 쉽게 한다.’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미움을 받은 적도 많이 있었다. 패한 팀의 관계자로부터 편파적 해설을 했다고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해설 멘트는 이기고 있는 팀 위주로 하게 되어있다. 지고 있는데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패한 분풀이를 해설자에게 하는구나 싶어 이해하고 웃어넘겼다.

 

타고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 덕분에 13년간 KBS의 간판 해설자로 활약했다. 스포츠 해설은 매우 어려운 분야다. 순발력이 있어야 하고 분석과 진단을 잘해야 한다. 게다가 예상과 예측이 맞으면 금상첨화다. 멘트대로 이루어질 때는 기분이 좋을뿐더러 명해설자라는 평까지 받는다.

1978년 삼성과 현대가 농구단을 동시에 창단했다. 라이벌 재벌 기업인 까닭에 두 팀 경기는 마치 전쟁터 같은 분위기였다. 해설자도 덩달아 긴장한다. 경기가 끝나면 패한 팀의 열성 팬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친다. 코치진도 불만이 많다. 지도자의 작전 실패로 졌다는 것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조심은 하지만 분위기에 편승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 자리를 빌려 송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해설은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됐다. 전두환 정부 시절, 정권에 대한 불만 해소 차원으로 스포츠 육성정책에 주력했다. 프로야구, 축구가 이때(1982년) 출범했다. 비중이 크지 않은 대회에도 위성중계를 하도록 청와대가 압력을 넣었다. 대만에서 열리는 윌리엄존스컵 농구대회를 생중계 할 정도였다.

 

1984년 5월, 쿠바 아바나에서 LA 올림픽 여자농구 예선경기가 열렸다. 동구권 등 12개국이 참가했다. 위성중계가 결정됐다. 쿠바 아바나에 KBS, MBC 양 방송사 중계팀이 파견되었다. 쿠바가 공산국가여서 국정원과 체육부 관계자가 선수단에 합류했고 체육부 소속이던 내가 임원에 포함됐다. 쿠바로 출국하기 전, 직감적으로 해설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암리에 준비했다. 경기상황을 적어놓고 반복적으로 연습했다. 가능하면 짧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훈련을 했다. 예측한 대로 KBS 스포츠 담당 PD로부터 연락이 왔다. 쿠바 현지 해설을 부탁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방송팀의 주관사는 MBC였다. 개막 경기를 문화방송에서 맡았다. MBC는 해설자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쿠바에 왔다. 나에게 개막전 해설을 부탁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KBS와 구두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쪽의 양해를 구하라고 했다. KBS는 막무가내였다. 자신들이 먼저 계약했다는 것이다. 언론사 체육부 기자들이 많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는지 MBC는 나를 고집했다. 양사 관계자가 밤을 새우며 협상을 했고, 결국, MBC. KBS 양 방송의 해설을 내가 모두 맏기로 했다. 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TV뿐만 아니라 라디오 중계까지 도맡아 아바나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었다.

경기의 성과가 좋았더라면 내 해설이 빛났을 텐데, 성적이 좋지 않았다. LA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고, 중국에 30점 차로 대패했다. 그러나 여자농구는 운 좋게 동구권 국가가 올림픽에 불참하는 바람에 대타로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연일 흥행이었던 농구대잔치


그 후 KBS 전속 농구해설자가 되었다. 나에게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컸다. 당시 공무원 급여가 너무 적었다. 대기업 절반 수준이었다. 전속 계약으로 매달 받는 해설수당은 대외 활동하는데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1983년 농구 점보시리즈가 출범했다. 외래어 표기라는 지적에 그 후 농구대잔치로 명칭이 바뀌었다. 첫해부터 인기가 폭발했다. 실내스포츠로 키가 크고 훤칠한 미남선수들이 많아 여학생의 우상이 되었다. 허재, 강동희, 이충희, 김현준 시대에 이어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서장훈, 현주엽 등이 등장하면서 남자농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 폭발에 불을 붙였다. 여학생 팬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오빠 부대’라는 명칭이 이때 생겨났다.

1994년 연세대의 전성시대에 올림픽공원 체조 경기장에서 삼성과의 경기가 있었다. 1만3000 석의 입장권이 매진됐다. 입장 못 한 관중 수천 명이 밖에서 아우성쳐댔다. 해설하기 위해 입장하는데 수십 명의 여성이 내 옷을 잡고 입장시켜 달라고 울부짖었다.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 틈에서 중년 여인이 눈에 띄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하소연하는데 “연세대 경기를 보려고 미국 LA에서 어제 왔습니다. 이 경기를 꼭 보고 가야 합니다.”라며 애원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입장권 한 장을 구해서 몰래 손에 쥐어줬다. 경기가 끝난 후 잊고 있었다. 다음날 해설자석으로 그분이 찾아와 감사의 인사와 함께 고급 위스키‘로열 살루트’ 한 병을 놓고 갔다. 흐뭇한 보람을 느꼈다.

잊지 못할 원조 드림팀 

나는 체육부에 근무하면서 모든 국제대회에 본부 임원으로 파견되어 현장에서 한국선수단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올림픽도 예외가 아니다. 그 덕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최초의 미국 드림팀 경기를 직접 관전하는 행운도 누렸다. 미국 드림팀에는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스코티 피펜, 찰스 바클리, 칼 말론,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등 연봉 200억이 넘는 선수들의 경기를 가까이서 보았다. 한마디로 매직이었다. 환상이었다. 공중을 나는 새 같았다. 날아다니며 덩크슛을 날렸다. 8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8경기 모두 100점 이상 득점을 했고 30점 이상 점수 차로 승리했다. 크로아티아와 결승전 점수가 117-85였다. 12명 선수의 기량 차이가 나지 않아 후보선수가 투입되어도 점수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대회 내내 작전타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앙골라(116-48)는 작전타임 중 미국 선수의 사인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는 진풍경도 있었다. 그들에게 드림팀은 영웅이고 우상이기 때문에 체면도 없었다.

체육관 앞 도로 양옆에 많은 사람이 “I need a ticket” 피켓을 들고 티켓을 사려고 하지만, 허사였다. 드림팀이 구성되자마자, 미국팀 경기 입장권은 곧바로 매진되었고, 현장 판매는 없었다. 한국대표팀은 참가하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다른 나라 경기 해설을 했지만, 장소가 방송센터의 작은 방이어서 흥이 나지 않았다.

스포츠 해설자의 지위와 인기가 높아진 것은 컬러TV 시대부터다. 내가 선수로 뛰던 6~70년대에는 라디오로 생중계를 했다. 해설자도 없었다. ‘이광재’ 아나운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1인 2역을 했다.

13년간의 농구 해설이 힘도 들었지만, 보람도 많았다. 내가 몸소 뛰며 코트 위를 종횡무진 누볐던 선수 시절도 중요하지만, 치열하고 맹렬히 경쟁하는 다른 선수들을 또 다른 차원과 관점에서 바라보며 즐겼던 해설자 시절도 나의 농구 인생에서는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시기였음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 덕분에 얼굴이 알려져 간간이 사인요구를 받았던 일도 웃음과 함께 떠오르는 잊지 못할 추억이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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