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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⑬ 거친 코트의 반항아 박수교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3.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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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4. 08

 

1980년대 여성 팬을 사로잡은 외모와는 달리, 코트 위 박수교는 한 마리 성난 표범과도 같았다. 당시 기준으로 장신 가드에 속했던 그는 드리블, 패스, 슛 삼박자를 모두 갖춘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의 계보를 이었다. 그는 시대의 슈터 이충희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던 시대의 가드였다. 

 

Q. 처음 농구공을 잡았을 때가 궁금합니다.

 

청운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공 잡았다가 한 달도 안 돼서 포기를 했죠. 당시 과외를 했었는데, 과외 시간도 빼먹고 농구를 하는 바람에 과외 선생님이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엄청 혼났어요. 군부 시절인데다가 아버지가 군인이셨기 때문에 더 엄하셨죠. 그래서 농구를 그만 뒀어요.


Q. 그럼, 다시 시작한 것은 언제였나요?


인창중학교 2학년 때죠. 중학교 들어가서 당시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최인선 씨 공 잡아주면서 시작했죠. 아버지도 한참 반대하시다가 중학교 2학년 때 “농구를 할 거면 제대로 해라”라고 하셔서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Q. 그 이후로는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주셨나요?


인창중학교 뒤에 인왕산을 매일 올라갔죠. 형도 운동을 했었는데, 항상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러 나갔어요. 추운 겨울에도 유니폼을 밖에다 내다놓으셨죠. 그럼, 추워서라도 땀이 날 때까지 뛰어야 했어요. 제가 스스로 운동이 좋아서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어떤 것을 시키시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절대 못할 것 같아요.

Q. 처음부터 가드 포지션을 맡으셨나요?


중학교 때는 포워드를 봤어요. 사실 그 당시에는 정해진 포지션이 없었죠.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56cm이었는데 3학년 때 20cm가 더 커서 176cm가 됐었죠. 그 때부터 센터와 포워드를 봤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가드를 보기도 했었죠.

Q. 고등학교도 인창고를 가게 됐잖아요? 바로 주전으로 뛰셨나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에 경복고와 휘문고에서 저를 데려가려고 했었죠. 어린 마음에 경복고를 가고 싶어서 한 달 동안 경복고 형들과 함께 훈련을 했어요. 그런데 인창고에서 저를 잡으러 왔었죠. 그래서 인창고로 진학을 하게 됐어요.

Q. 언제부터 농구가 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세요?


그 당시에는 기본기에 많이 충실했던 것 같아요. 꾸준히 산도 많이 뛰었으니까요….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 많이 늘었어요. 장안규 씨라고 단국대 노랑머리로 유명한 분이 계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10년은 앞서 갔던 분인 것 같아요. 그 분과 3개월 동안 같이 하숙을 하면서 개인 훈련을 받았죠. 슈팅은 기본이었고, 스텝부터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Q. 슛에 일가견이 있었잖아요?


불을 끄고 슛 연습을 많이 했죠. 사실 밤에는 체육관에 불을 켜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슈터는 손끝의 감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손이 작은 편인데도 슛에 자신이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감각 때문이죠. 슛 연습은 하루에 2~3시간은 했었던 것 같아요. 신동파 씨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려고 자발적으로 노력을 많이 했었죠. 무빙 슛이나 쓰러지면서 던지는 슛이 운이 아닌 이유가 바로 손끝 감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Q. 박수교 위원을 지도했던 방열 교수께서는 드리블, 패스, 슛의 3박자를 모두 갖춘 선수라 평을 했었는데, 개인적으로 어떤 것에 가장 자신이 있으셨나요?


그래도 슈팅 능력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가드가 특별히 한 가지 장기만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Q. 그럼, 개인 최다 득점도 기억하고 계시나요?


기억하죠. 연세대 당시 보통 30~40점대를 넣곤 했었는데, 아마 전매청 상대였을 거예요. 그 경기에서 49점을 넣었던 기억이 나네요.

Q. 연세대로 진학을 하셨는데,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연이 많았죠. 우리 학교 선배 중에 박한 씨를 비롯해 고려대로 진학한 분이 3명이나 있었죠. 고려대에서 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코뼈가 부러지면서 고려대와의 연습경기에 못 나갔어요. 그 다음이 건국대 총장기였는데, 제가 우수상을 받아서 자동 입학이 가능해졌지요. 제가 건국대를 가게 되면 나머지 3~4명의 선수들도 함께 진학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거의 건국대로 진학을 예정하고 있었어요.

Q. 그런데, 연세대로 방향을 어떻게 바꾸게 되신 건가요?


대학교는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어요. 이미 집안과 이야기가 다 오고 간 상황이었죠. 작고하신 이경재 선생님이 연세대로 왔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셨죠. 그 당시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 거의 연세대로 가는 분위기였어요. 신선우, 최희암이 모두 연세대로 진학 할 때였죠. 우리 고등학교가 6강과 4강은 가도 우승을 해본 적은 없었어요. 신선우와 함께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었죠. 그때는 예비고사 마치고 나오는 사람 잡는 것이 임자인 시대였기 때문에 학교장이 허락을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고려대에서 잡으러 와서 도망 다니느라 방랑 생활도 많이 했었죠. 당시 동기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많았어요.

Q. 연세대 진학 후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는데, 바로 주전으로 뛸 수 있었나요?


그때 느낀 건데, 선수는 감독을 잘 만나고 운이 좋아야 되는 것 같습니다. 연세대 입학 전에 연세대 OB전을 했었는데, 그때 잘해서 감독님 눈에 잘 띄었던 것 같아요. 제 키가 당시 184cm이었는데, 감독님이 “너 키는 더 클 것 같지 않으니까, 가드를 맡아봐라”라고 하신 거죠. 그때부터 재학생을 놔두고 저와 신선우가 베스트 멤버로 뛰기 시작했어요.

Q. 대학교 때 대표팀에 발탁됐어요. 대표팀에서 6년 만에 국제대회 우승도 경험했고요.


1976년 연세대 3학년 시절인 가을에 대표팀 발탁이 돼서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죠. 1977년 김인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으로 쿠알라룸푸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1982년 제9회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중공을 상대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습니다.

Q. 첫 국제대회를 제패한 그 때 느낌이 궁금합니다.


국내 대회에서는 우승을 많이 해봐서 몰랐는데, 자부심이 많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무태추가 잠깐 나오지 않았던 시기였긴 했지만, 중공을 꺾고 아마 7전인가 8전 전승으로 우승을 했기 때문에 자부심이 더 컸었죠. 방열 감독님의 전술도 좋았고, 최상의 멤버였어요. 그 기쁨은 말도 못했죠. 당시 대표팀에는 현대와 삼성 선수들이 주축이었는데, 대표팀을 현대 감독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팀 내에서도 라이벌 관계가 형성돼 트러블이 많았죠. 우승한 게 의외일 정도로요. 

 

Q. 우승하던 이듬해 첫 아이가 태어났어요. 가족과 떨어져 지낼 때가 많아 마음고생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1983년 2월에 첫 애가 태어났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습지만 애가 생길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 당시에 600일 합숙을 했었어요. 2년이었던 셈이죠. 외출은 허락되어도 외박이 없었어요. 결혼해도 집에서 생활을 거의 못했던 상황이었어요. 제가 1985년에 대표팀 은퇴를 결정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죠. 글쎄 딸아이가 저보고 아빠가 아닌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 소리에 충격을 받고 바로 그만둬야겠다고 결심 했죠.

Q. 코트 밖에서는 자상한 가장, 코트 위에서는 ‘표범’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승부근성이 유독 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성격 자체가 승부욕이 강한 게 있었죠. 예전에는 정말 지기 싫어했어요. 라이벌 팀에 지면 잠을 못 잘 정도였죠. 뇌진탕으로 쓰러졌다가 병원도 안 가고 다시 뛴 적이 있었으니까요.

Q.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 전에서 있었던 일인가요?


그때가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그 해 4번째 경기였을 거예요. 리바운드하고 떨어지다가 넘어지면서 대걸레 자루에 머리를 부딪치고 뇌진탕으로 응급차에 실려 나갔죠. 병원 가는 길에 제가 깨어나서는 운전기사에게 체육관으로 차를 다시 돌리라고 했데요. 병원 가다가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간 거죠. 경기장에 도착해서 감독님께 뛰게 해달라고 말했고, 결국 그 게임에서 제가 역전골을 넣고 이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전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Q. 그렇게 뛰고도 괜찮으셨나요?


그럴 리가 있나요. 병원에 한 보름 동안 입원을 했었죠. 병원을 가게 된 것도 웃긴데, 제가 아버지한테 담배 한 대만 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얘가 좀 이상하구나’ 생각이 들어서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온몸에 마비 증상도 있었죠. 그만큼 승부욕이 강했던 것 같아요.

Q. 김동광 이후 최고의 인기 선수로 이름을 날리셨잖아요.


그때는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았어요. 특히, 농구가 국기인 대만에서 인기가 굉장했죠. 한국과 대만이 붙는다고 하면 난리가 날 정도였으니까요. 대만에서는 우리 얼굴도 다 알아봐서 쇼핑도 거의 공짜로 했죠.

Q. 국내에서도 여성 팬들이 엄청 많으셨잖아요.


국내에서도 인기는 지금보다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농구경기 자체도 재미가 있었고, 점보시리즈가 시작되고 나서는 관중을 동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굉장했죠. 당시 중학교 애들이었는데, 이제는 아줌마가 돼서 찾아오더라고요. 애들도 데리고 경기장 와서 인사를 하기도 하는데, 다 같이 늙어가는 거죠. 뭐.

Q. 여성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셨던 코트 위 플레이 스타일이 궁금합니다.


당시 농구인들이 이야기하는 가드는 180cm이하였는데, 장신이면서 가드 포지션을 맡았던 게 저였죠. 190cm이었던 신동찬이 그 다음에 나왔고요. 당시 가드들은 패스를 주로 하는 포인트 가드보다는 슈팅 가드 역할을 많이 했었어요. 저도 가드를 맡으면서도 득점이 항상 20~30점이 넘었으니까요.

Q. 해군에서 주장을 맡으면서 2관왕을 차지했습니다.


해군에는 국가대표 선수가 저와 황유하 선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통합 팀 형식이었던 복지단 소속은 신동찬, 안준호, 박인규 등 잘 하는 선수가 많았어요. 그래도 우리가 매해 한 번씩은 우승을 했던 것 같아요. 부대에서 지면 훈련을 호되게 받으니까 죽기 살기로 했었던 거죠.

Q.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 대결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농구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죠. 공이 하나 굴러가면 머리 10개까지 합쳐 11개의 공이 굴러갈 정도였어요. 그만큼 치열했죠. 디스크에 손가락 부러지는 것은 예삿일이었어요. 죽지 않고 뛸 정도만 되면 알아서 붕대 감고 뛰었으니까요. 어차피 장기 레이스가 아니라 단기 대회가 많았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죠. 신선우 같은 경우는 발목에 금이 가도 주사 맞고 뛰었어요. 경기 끝나고 보니까 발목이 검게 변해 있더라고요. 신선우는 라이벌전의 희생양이죠. 결국 그 대회 부상 때문에 일찍 은퇴했으니까요. 당시 정주영 회장님도 항상 체육관에 나와 계실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죠.

Q. 당대 최고의 슈터 이충희와 함께 현대를 이끌었어요.


이충희 같은 경우 전형적인 포워드였어요. 3점슛도 없을 때였는데 62점을 넣었으니까, 대단한 거죠. 너무 잘하니까 기분 나빠서 안 주려고 해도 순간적으로 공 달라고 튀어 나오는 선수는 충희였어요. 그만큼 공 없을 때 움직임이 좋았던 거죠. 저와는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 상부상조였죠.

Q. 현대가 삼성과의 라이벌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당시 방열 감독님의 전략적인 면이 상당히 좋았어요. 가드는 제가 맡고, 포워드에 이충희, 센터에 신선우까지 삼박자가 제대로 맞았기 때문에 조율이 잘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Q. 당시 중앙대에는 김유택, 허재, 강동희 등 최고의 선수들도 함께 있었는데. 대학 팀을 상대로 부담이 되기도 했겠어요.


사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어요. 중앙대가 1987년 장신 군단으로 등장할 때 저는 은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거든요. 허재가 잘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아마 강정수, 허재와는 한 게임을 뛰었을 거예요. 중앙대가 삼성도 이기고 결승에 올라와 우리와 붙었는데, 우리가 이겼죠. 그 뒤로는 중앙대가 연승 행진을 이어갔을 겁니다.

Q. 당시 연고전이면 현대와 삼성 라이벌보다 더 심한 라이벌 매치 아니었나요?


정기전도 대단했죠. 슛 쏘고 손으로 놀리면서 가는 선수가 있었는데, 자꾸 감독님을 열 받게 하기에 제가 주먹으로 쳐서 난리가 난 적도 있었거든요. 몰래 한다는 게 걸린 거죠. 허허.

Q. 당시 고려대도 전력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고려대에 이충희와 임정명이 신입생으로 들어오면서 애를 좀 먹었죠. 제가 4학년 때였는데, 매번 이기다가 처음 비겼어요. 엄청 욕을 먹었죠. 그래도 선배 입장에서는 이충희나 허재처럼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죠.

Q.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겠어요.


연세대 3학년 때 20일 정도 디스크로 입원했었는데, 감독님이 병원에 오셔서 “오늘 연고전 하는데 한 번 구경 갈래?????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도 몸이 근질근질 했었기 때문에 따라 나섰죠. 그런데 체육관에 도착하니까 감독님이 “슛 한 번 던져봐”라고 하시는 거예요. 게임 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유니폼 입고 벤치에 앉게 된 거죠.

Q. 결국 경기에서 뛰게 된 건가요?


그때는 우리가 거의 이겼을 때였는데, 초반에 밀리는 거예요. 감독님이 이름을 부르시는 거죠. 고려대에서는 박수교 안 나온다고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가 나온 거죠. 20일 동안 누워만 있었다가 갑자기 들어가서 슛을 던지니까 전반에는 림도 안 맞더라고요. 후반에도 계속 뛰면서 감을 찾기 시작했죠. 그 경기에서 30득점 정도 했는데, 결국 우리가 이겼죠.

Q. 몸은 괜찮았나요?


그 경기 마치고 다시 다른 병원으로 옮겨 입원했죠. 종로에 물리치료만 했던 병원이었는데, 거기서 지금 집사람을 만났죠. 건물이 처갓집이라서 6층에 살고 있었던 집사람이 병원 1층 셔터 문이 닫히면 내려와서 데이트를 했었죠. 그래서 입원을 더 오래 했던 것 같아요. 허허허.

Q. 그때가 지금보다 엄청 거칠었다고 들었어요.


일본이 왜 우리한테 매번 졌는지 아세요? 일본이 패턴 농구를 했었는데, 가드가 지시를 하고 패스를 주려고 하면 꼭 센터가 없어지거나 한 명씩 넘어져 있는 거죠. 돌아서 팔꿈치로 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손날로 목도 많이 쳤어요. 일본 애들이 무서워서 포스트로 안 들어오더라고요.

Q. 당시 라이벌이나 우상이 있었나요?


초창기에는 역시 신동파 씨 플레이를 많이 보고 따라하려고 노력했죠. 예전 선배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장점이 하나씩 다 있었어요. 드라이브 인이면 드라이브 인, 슈팅이면 슈팅…. 슛을 100개 던지라고 하면 6~7명은 90개 이상 다 들어가고, 자유투도 100%인 선배들이 많았죠. 최부영은 100개 쏘면 98개는 들어갔죠. 최부영이 슛을 쏘고 제가 골대 밑에 서 있으면 들어간 공이 머리 맞고 원 바운드로 튀겨서 다시 패스가 될 정도로 정확했어요.

 

Q. 지도자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가 기억나시나요?


1988년 은퇴를 하고 코치부터 시작했죠. 사실 1986년에 코치를 맡았어야 했는데 구단에서 1년만 더 해 달라고 계속 이야기를 한 거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은퇴를 해버린 거죠. 구단에서 연결해 놓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팀인 UNLV를 보러 갔었는데, 현지 공항에 사람이 아무도 안 나와 있는 거예요. 일찍 은퇴한 제가 괘씸죄로 걸린 거죠.

Q. 지도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신가요?


미국에서 보고 온 수비 전략이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 바로 적용을 시킨 적이 있어요. 당시 기아에는 허재를 비롯해 한기범, 강정수, 강동희 등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는데, 그런 기아를 20점차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죠. 우리 선수들도 별로 좋지 않았는데 좋은 성적을 거둬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네요.

박수교는…


1956년 출생인 박수교는 1980년대 초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인창중, 고를 거쳐 연세대를 졸업하고 현대전자에서 선수 및 코치, 감독을 역임했다. 프로 출범 이후 그는 울산 모비스, 인천 전자랜드 감독 및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1976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뛰어난 말솜씨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해박한 지식으로 SBS 스포츠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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