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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⑫ 코트 위 수학자 신선우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3.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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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4. 01

 

피타고라스가 울고 갈 남자. 읽는 수가 많아 신선 같다고 붙여진 이름 '신산(神算)' 신선우. 그는 해답을 얻기 위해 승부수를 띄워온 코트 위 수학자였다.

 

그 자체가 토털 농구였다


신선우의 농구는 ‘토털 농구’로 일컬어진다. 프로농구무대에서 보인 그의 독특한 조직 농구 덕분. 하지만 그의 토털 농구는 지도자가 돼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전천후 플레이어의 전형이었다. 6년에 걸친 가드 생활, 그 뒤에 따라온 2년 간의 포워드 역할과 10여년의 센터 경험…. 그는 농구의 모든 포지션을 몸에 익히며 토털 농구를 완성시켰다. 넓은 시야, 빠른 속공, 야성이 넘치는 돌파와 리바운드, 빈 곳으로 적시적소에 빼주는 킬 패스…. 현역 시절 그는 수가 뛰어난 전략가가 아닌 야성과 근성이 숨 쉬는 야전사령관이었다.

Q. 농구와의 첫 인연부터 궁금해지네요.


광희초등학교 4학년 때였죠. 교정에 농구부가 처음 생긴 거죠. 당시에는 농구골대가 없었지만, 케트볼(대장공과 비슷한 경기)이라고 해서 농구와 형태가 같았던 경기를 체육대회 때하곤 했었어요. 그러다 농구골대가 생기면서 농구부로 들어갔죠.

Q. 농구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아무 생각 없이 빨려 들어갔죠.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 안 했던 것 같아요. 구슬치기, 만화책, 딱지치기 등 제 또래 아이들이 많이 하는 것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부모나 친구, 선생이 권유하기 전에 저도 모르게 농구에 흥미를 느끼고 집중을 했던 것 같아요.

Q. 과거 영웅들은 모두 농구에 미쳐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구에 가장 미쳤을 때가 언제이신가요?


초등학교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했었어요. 농구에 미친 건 용산중에 들어가서부터였죠. 그때는 신장이 작았어요. 중학교 2학년 때 166~167cm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중학교 3학년 때까지도 170cm를 넘지 못했으니까요. 농구는 계속해야 하는데, 체격이 작아서 체력적으로 앞서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아마도 그때 가장 농구에 미쳐있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Q. 어느 정도였나요?


그 당시에는 전차를 타고 학교에 다닐 때였죠. 새벽 4시에 일어나 왕십리에서부터 남산까지 1~2년을 뛰어다녔어요. 새벽운동을 하고 나서 아침을 먹고 등교하는 거죠. 야간운동까지 하고 오면 밤 10~11시가 훌쩍 넘었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농구공 하나들고 그냥 무조건 뛰어다니는 거였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키가 7~8cm 컸어요. 185cm 정도가 된 거죠. 체력이 좋아지면서 체격도 발달을 했나 봐요.

Q. 본인만의 훈련 비법이 있다면요.


김영기 씨 책을 봤어요. 책을 보고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을 흉내내고 따라 하기 위해 애를 썼죠. 농구공을 가지고 산에서 드리블을 하면서 올라갔다 내려오고. 그러면서 체력이 좋아지고 신체조건도 좋아져 팀에서도 나를 필요로 하는 위치가 됐죠. 여러 가지가 맞물려서 좋아지다 보니까 게임도 많이 뛰게 되고요.

Q. 포지션은 센터였지만, 플레이는 가드 같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센터를 맡았던 건가요?


농구를 시작하고 중학교까지 가드를 봤어요. 볼 핸들링이나 시야가 그만큼 좋을 수 있었던 이유죠.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와서 2년 동안 포워드를 맡았고, 3학년 때부터 센터가 됐어요. 그렇다보니 다른 센터들에 비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죠.

 

Q. 시야가 워낙 좋았습니다.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요?


전체를 본다는 것은 농구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팀을 만들 때도 항상 가드를 먼저 뽑고 그 다음에 센터, 포워드를 택할 만큼 가드를 우선시 했죠. 수비도 앞 선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기술적인 면에서 슈퍼스타의 플러스 요인에 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야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Q. 득점보다 동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플레이가 많았다고요.


농구는 개인 경기가 아니잖아요? 팀 밸런스가 맞아야 배가 되는 것이죠. 하위 팀의 득점 분포를 보면 외국선수 의존도가 높아요. 밸런스가 안 맞는 거죠. 5명보다 12명이 모두 뛰는 농구를 해야 강팀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저도 득점보다 어시스트가 재밌었어요. 코트 위에서 리더 역할을 한 거죠. 슈팅 능력이 뛰어난 이충희나 박수교가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에 맞춰 기회를 열어 줄 수 있는 어시스트에 더 신경을 쓰게 됐죠.

Q. 드리블이나 슛 모두 변칙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였는데요. 외발 슛도 그랬고요.


가드 출신이라서 그런 부분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센터라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만들어 놔야 하거든요. 요즘에는 그런 선수가 드물어요. 훅 슛을 계속 연습하고 시도하는 함지훈 선수처럼요. 제 외발 슛은 무릎 부상 때문이었고요.(당시 그는 무릎연골수술로 인해 외발 자세로 자유투를 던지는 투혼을 보였다.)

Q. 장신 가드를 했어야 할 플레이 스타일이었습니다. 시대를 잘못 타신 것이라 생각하진 않으시는지요.


후회는 없습니다. 제 선수시절만 해도 나이 앞자리에 ‘3’이 들어가면 그만 둘 때였죠. 프로가 생기면서 자기관리를 통해 ‘4’자까지 하려고 하지만요. 아마추어 때는 실업팀이 평생직장의 의미였어요. 은퇴하고 회사에 빨리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죠. 그때는 의리와 선후배 관계가 중요했던 시기였고요. 지금 시대와 비교하면 많이 달랐죠. 하지만 저는 은퇴 후 일반 직장생활도 해보고 지도자 경험도 한 것들이 후회 없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선수시절 팀을 그리다


그의 농구는 언제나 반 박자 빨랐다. 코트 위에서도 그랬고, 코트 밖에서도 그랬다.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었을까. 그는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선수시절 이미 팀을 직접 만들었고, 팀은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안겼다. 스카우트 시장에서도 그에게는 언제나 선택권이 있었다. 자율농구를 택한 연세대 진학, 팀의 모든 구성을 직접 도맡아 책임진 현대행. 고등학교 졸업 후 그에게 농구는 기회의 땅이자 그가 펼칠 수 있는 백지수표였다.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안고서도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현대에서 수많은 우승을 일궈낸 그는 화려하게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Q. 용산고와 연세대 진학 배경이 궁금합니다.


동계 진학이 마지막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용산중에서 용산고로 자연스럽게 진학했죠. 하지만 대학은 달랐어요. 당시에는 연세대 멤버가 고려대보다 좋지 않았어요. 집에서는 고려대 진학을 원했죠. 아버지께 ‘제가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해서 결과를 내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려 허락을 얻어냈어요. 지금은 다 깨졌지만, 고려대는 스파르타식이었고 연세대는 자율이었어요. 둘 다 좋은 학교였지만, 전 자율식이 좋아서 연세대를 택했죠. 게다가 바로 위 학년이 없어서 저한테 많은 혜택이 있었거든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1978년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북한과 경기와 1982년 금메달을 땄던 뉴델리 아시안게임 결승전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남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라 역사상 처음으로 경기 보이콧을 하고 나가기도 했죠. 그 대회에서 제가 하루에도 몸이 한 두 번씩 40도로 올라가는 고열로 고생을 했었어요. 북한에서는 ‘지면 다 쏴 죽인다’는 소문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대단했죠. 병원에서는 한 달 입원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뛰어야 한다는 정신력밖에 없었어요.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으니까요. 청소년 대표 때도 그랬어요. 감기 몸살이 와도 절대 빠지지 않고 훈련에 참여하려고 했죠. 그때는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Q.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 당시 무릎이 안 좋았는데….


그 당시 대표팀은 500일 합숙을 들어가고 '이기자' 노래 부르면서 새벽 6시에 일어나 훈련을 하던 시기였어요. 제가 무릎 수술한 직후였고, 대표팀에는 대회 한 달 남겨놓고 합류했죠. 신혼여행을 갔다 오니까 故정몽헌 회장이 부르더군요. 전 결혼했다고 부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바로 '무릎 괜찮냐'고 물으시더니 '북한하고 일본 두 게임만 뛰고 와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특명을 내리신 거죠. 그 길로 태릉으로 들어갔어요. 완전한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팀의 윤활유 역할을 맡았죠. 이충희, 박수교, 신동찬 등이 있어서 그 선수들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도록 슛 기회를 만들고 피딩 역할을 맡아 조직력으로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것이었죠.

 

Q.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중공의 장신들을 상대로 선전했는데 그 비결이 있다면요?


일단은 위치 선정이죠. 수비나 공격 마찬가지였어요. 인사이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웃사이드까지 끌고 나오니까 상대가 정신이 없었죠. 상대 장신 선수들은 큰 선수 막는 것만 적응이 되어있기 때문에 허점이 많이 나왔어요. 위치 변동에 따른 구멍인 셈이죠. 프로 같으면 50~60게임 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대처를 할 수 있지만, 그런 대회에서는 위치 변화에 대해 어려움을 겪었어요. 230cm가 넘는 중국의 무태추나 일본의 오카야마의 키가 엄청 컸기 때문에 기동력과 위치 선정이 잘 맞아 떨어졌어요. 시대적으로 가능했죠.

Q. 서전트 점프도 좋았지만, 몸싸움 강했고 근성도 넘쳤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몸을 사리고 신체 접촉을 피한다는 것은 곧 은퇴를 해야 하는 시점과 맞물린다고 봐요. 예를 들어 권투 선수가 잽이 아파서 쓰러지는 적은 없잖아요? 네트가 없는데, 몸싸움을 피하면 은퇴해야 됩니다. 신장 10cm, 체중 20kg 정도는 그냥 부딪히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몸싸움도 요령이 있어야 하거든요. 힘을 쓸 때, 안 쓸 때를 알아야 하는 거죠.

Q. 현역시절 대표팀 경기를 보면 지금보다 기브-앤-고라든지, 커트-인 플레이가 더 정교했습니다. 오히려 더 쉽게 득점을 올린다는 느낌이 드는데 요즘의 플레이는 획일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외국선수 의존도도 있었지만, 일리걸이라는 룰이 공격자의 플레이를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죠. 너무 그런 것들에 젖어 있다 보니까 획일적인 플레이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일 수 있어요. 외국선수가 들어오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술, 담배의 절제 같은 도움이 된 것도 있지만, 우리만의 색깔이 없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죠.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라 12년 동안 꾸준히 쌓여 생긴 것이지요.

Q. 요즘 국내 빅맨들을 보면 스텝만으로 충분히 공간을 만들어내는 선수가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다면요?


농구는 손으로 하는 스포츠지만, 발을 잘 놔야 한다는 얘기가 있어요. 스텝 하나를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연봉 1억 원이 차이가 나는 거죠. 가드나 센터나 손, 발, 허리, 머리 등 모든 것을 활용해 중심 이동을 해야 하는데 요즘 선수들은 그런 것이 없죠. NBA 선수들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죠. 나만의 독특한 플레이를 찾아 리스크를 안고 반복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해요. 기술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Q. 현역 시절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역시 박수교와 이충희와 호흡이 잘 맞았죠.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예측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것들이 콤비네이션인데, 잘 맞아 떨어졌어요. 요즘 선수들과 비교해도 상대가 되지 않게 워낙 슛 성공률이 좋았기 때문에 기회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렸죠.

Q. 무릎이 항상 말썽이었습니다. 덕분에 무릎에 견해가 워낙 깊다고 들었습니다.


오른쪽 무릎이었는데, 예전에는 연골인대를 다치면 군 면제 수준에 선수생활을 끝났다고 봤었죠.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요. 지도자를 하면서 무릎 뿐 아니라 다른 곳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죠. 뭐든지 정확히 전문적으로 알아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전문 의학책을 사서 보고 외우기도 했어요.

Q. 은퇴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요?


무릎 부상이었어요. 아시안게임 갔다 와서 그 해에 방열 감독과 회사에 우승을 하면 은퇴하겠다고 얘기하고 대회에 나갔죠. 재활보다 회사에 빨리 자리 잡는 게 개인적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리고 그 해 우승을 하고 은퇴를 했죠. 은퇴는 이미 양해를 구한 사항이었으니까요.

지도자로 성공하다


신선우를 기억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를 ‘지도자’로 기억한다. 선수시절이 화려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다. 그가 지도자로 거둔 업적의 위대함 때문이다. 프로출범 이후 12년 동안 11시즌 지휘봉을 잡으면서 KBL 최초 300승 달성, 정규리그 우승 3회, 챔피언결정전 우승 3회, 감독상 2회 등 끊임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신산’과 ‘토털 농구’는 모두 지도자로서 얻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한국농구역사의 한 페이지를 지도자로서 그렇게 진한 잉크 자국으로 남겼다.

Q. 1994년 현대 농구단 감독을 시작으로 1997년 프로 원년 현대 감독을 맡은 이후 11시즌 연속 프로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돌이켜보시면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은 언제인가요?


아무래도 처음 현대전자를 맡았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처음 김재훈이나 이상민 등 주축 선수들을 군대 보낸다고 했을 때 반대가 심했거든요. 제 계획은 2~3년 이후 팀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때도 정 회장이 이해를 해줬죠. 팀을 만드는 과정에 추승균을 대학 3학년 때 스카우트 해놓은 상태였고요. 프로만 12년을 했지만, 제 스스로 선수를 뽑아서 우승까지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더라고요. 남은 손을 안 거치고 기다림 뒤에 결과를 얻은 것이니까요.

Q. 선수들도 어려워할 정도의 수많은 작전 지식은 어디서 얻으시는 건가요?


6라운드 경기를 하기 때문에 매 라운드를 똑같이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플레이오프에 새로운 작전을 갖고 가려면 라운드 별로 메모를 다 하면서 기록을 해야 돼요. 그 팀과 할 때 공격과 수비 자료를 다 뽑고, 그 팀에 최근 어떤 변화가 있는 지를 확인하고 다시 경기에 임해야 하는 거죠. 그 팀에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다양하게 전술을 가져가는 것이에요. 변화를 주다 보면 새로운 작전들이 또 보이고, 그것을 즐기는 선수도 있고 힘들어하는 선수도 있었죠.

Q. 기억에 남는 최고의 전술과 최악의 전술을 꼽으시면요?


전술에 있어서 최고와 최악은 없어요. 결과가 안 좋으면 연습을 많이 해도 소용없어요. 한 점 차 승부에서 이기면 작전이 무용담이 되고, 지면 그 작전을 못 쓰게 되는 거죠. 제가 농담으로 ‘과대망상과 피해망상 사이’라고 많이 해요. 상대가 못해서 이긴 건데, 내가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대망상, A작전을 써서 지고 B작전을 써도 지면, C작전으로 바꾸는 게 피해망상이에요. 상대에 따라 통하는 작전이 다 있는 것이거든요. 감독이라는 자리가 그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으로 오가는 자리인 거죠. 허허.

Q. 농구 경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경기 종료 3~5초를 남기고 메이드 할 수 있는 확률은 상당히 낮아요. 다섯 번을 시도해 한 번 성공할까 말까죠. 중요한 것은 쫓아갈 때와 도망갈 때 연속 두 방이에요. 흐름 자체가 변하는 것이죠. 저는 슈터에게 항상 얘기를 해요. 다른 때 못 넣더라도 1~4쿼터 중 필요할 때 두 방만 넣으라고요.

Q. 지도자로서도 분업화에 성공하셨습니다. 트레이너 제도를 처음 도입하신 것처럼요.


증권회사 다닐 때도 분업화를 했었는데, 프로농구에서도 분업화가 필요했어요. 그런 면에서 트레이너 제도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죠. 팀에 트레이너 제도를 처음 도입했어요. 트레이너를 통해 선수들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죠. 이상민이 대학 4학년 때 무릎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었는데, 의사가 혼자 검사 결과를 보더니 수술 결정을 내리더라고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상태를 보여주지도 않고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으로 트레이너와 함께 건너가 선진 재활 치료 기술을 보고 배워오라고 했어요. 결국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죠. 그 뒤로부터 다른 팀들도 트레이너를 보유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분업화 덕에 선수들과 대화할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어 선수들이 저를 더 어렵게 생각한 부분이 생기긴 했지만요. 전 전체적인 방향에 대한 의사결정만 내렸으니까요.

Q. 프로 출범 이후 더 빛을 발했습니다. 토털 농구의 탄생인데요.


쟁쟁한 멤버 덕분이었죠. 포지션상 다른 어려운 점이 없었어요. 조성원은 떠났지만, 이상민이라는 출중한 가드에 추승균, 재키 존스가 내외곽이 가능했기 때문에 포지션의 파괴라는 변화가 필요했어요. 아마 서장훈이나 김주성 같은 출중한 센터가 있었다면 토털 농구는 없었을 겁니다. 인적 구성과 상황에 따라 방향을 잡은 것일 뿐이죠. 제가 좋아하는 것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Q. 토털 농구라는 것이 언론에 공개된 첫 시즌이었던 2000-2001시즌에 현대는 갖은 부상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요. 조니 맥도웰도 다치고, 트레이드로 떠난 조성원의 공백도 컸고요. 야심차게 준비한 토털농구였는데 그때 심정은 어땠는지요?


변화라는 게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선수들이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다음을 내다본 거죠. 이상민과 추승균은 그럴 능력이 있던 선수라서 믿고 기다린 거죠. 능력이 없는데 무조건 토털 농구만 고집하면 자기 욕심인 거죠.

Q. 재키 존스나 조니 맥도웰 등의 플레이스타일이나, 현대나 KCC의 스타일을 보면 현역시절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안쪽과 외곽에 모두 능하고, 또 패스까지 잘 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데 혹시 본인의 농구철학이 영향을 어느 정도 미친 결과인지요?


감독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가는 거죠. 기존 선수들과 맞아떨어지면 금상첨화고, 그게 아니라도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선수를 뽑게 되는 것이죠. 찰스 민랜드도 KCC에서 처음 선택할 때 반대가 많았어요. 전문가들도 고개를 흔들었죠. 제가 이것저것 다 하는 선수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어차피 외국선수 선택도 대박 아니면 쪽박이에요. 중간만 가라고 하면 중간만 갈 수 있죠. 리스크를 줄이면 되니까요. 하지만 드래프트 제도 자체가 중간은 항상 중간밖에 못하는 시스템이에요. 이번 시즌이 안 되면 다음 시즌을 노려야 하는 거죠.

 

Q. 국제대회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팀은 어디였나요?


일본과 필리핀, 중국이 강했죠. 일본과 필리핀은 폭발력이 있는 팀이었고, 중국은 세대교체가 빠르고 어디로 튈지 몰라 가장 힘들었던 팀이에요. 중국이 가장 어려웠죠. 발전 속도가 엄청 빨랐으니까요. 야오밍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1999년만 해도 중국 대표팀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따라만 다닐 정도로 못했는데, NBA 톱클래스 선수가 됐으니까요. 한국 선수들도 국제대회에 나가거나 해외진출만으로도 견학이 되고 배우게 되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Q. 1999년 후쿠오카 ABC대회에서는 감독을 맡았잖아요. 준결승에서 일본을 힘겹게 꺾고 결승전에서는 중국에 패했습니다.


3분 남겨놓고 졌어요. 철저하게 딜레이 게임 위주로 했었어요. 막판 3분을 남겨놓고 타임아웃 이후 중요한 상황이었는데, 실책을 하면서 무너졌죠. 그때도 훈련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조직력이 아쉬웠죠.

Q. 직접 지도한 선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이상민은 대학시절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던 추승균이나 조성원이 기억에 남죠. 같이 고생하면서 성적도 내고 꾸준히 하는 선수들이죠. 그 선수들과 함께 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 행운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트레이드를 했지만, 표명일 같은 선수들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선수고요.

Q. 현대 가문이 문을 닫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요.


아무래도 현대에 계속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처음 프로 출범할 때 회사에 남으려고도 했으니까요. 회사와 프로를 고민하다 프로를 택했고, KCC로 넘어가게 됐죠. 당시 현대전자가 법적 관리에 들어가면서 운동부 예산을 줄여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죠. 대신 성적을 내야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신선우는…


1956년 2월 10일 출생인 신선우는 1970~1980년대 한국농구의 명센터 출신 지도자. 농구명문 용산중.고를 거쳐 연세대 졸업 후 현대전자에 입단했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한 그는 은퇴 후 현대전자 지도자를 시작으로 프로농구 원년부터 현대와 KCC, LG 감독을 역임하며 프로농구 최초 300승 달성 등 지도자 성공시대를 열었다. 한국농구연맹 기술위원장을 거쳐 WKBL 총재를 역임했으며, 현재 프로농구 대구 한국가스공사 총감독을 맡고 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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