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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⑪ 승부욕이 만들어낸 REAL 카리스마 김동광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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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3. 20

 

‘고독’이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야생에 풀어놓은 한 마리 늑대처럼 한국농구 역사의 중심을 가로지른 선수가 있다. 김동광. 코트 위에서나 밖에서나 겁날게 없어 보이는 그는 한 마리 야생늑대를 연상시킨다. 늑대는 약한 상대가 아닌 가장 강한 상대를 선택해 사냥한다. 그도 그랬다. 70-80년대를 장악한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체육관 안의 모든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그의 승부욕 앞에 수많은 상대들이 무릎을 꿇었다.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그는 진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Q. 처음 농구공을 잡게 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할게요. 중학교 때 처음 농구를 시작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안 해본 스포츠가 없었어. 육상부터 해서 기계체조, 핸드볼, 야구 다 했는데, 농구만 안 했었지. 원래는 야구를 하려고 중학교 시험을 봤는데, 1차에서 낙방을 해서 2차로 들어간 곳이 송도중이야.

Q. 농구에 대해 전혀 몰랐겠어요.


전혀 몰랐지. 그 당시는 인천에서도 농구를 하는 학교가 거의 없던 시기거든. 그때 문영환이란 친구와 함께 들어갔었는데, 웬만한 애들보다는 키가 커서 전규삼 선생님 눈에 띈 거지. 아마 앞으로도 더 클 거라 생각하셨던 거 같아.

Q. 처음 접한 농구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운동을 많이 해왔으니까 어렵지는 않았어. 특별히 농구만의 매력이 있다기보다는 단지 신기할 뿐이었지. 어머니의 반대도 없었고, 참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 같아. 내가 혼혈이잖아. 어렸을 때 애들이 뭐라고 많이 할 수도 있었는데, 운동을 통해 더 편하게 했던 것 같아. 내가 소위 말하는 '짱'이었거든.

Q. 송도중에 입학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겠어요.


송도중이라기보다 전규삼 선생님의 영향이 컸지. 전 선생님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어. 내 성적표도 당신 수첩에 적어 놓으실 정도로 농구뿐 아니라 모든 걸 총괄하시는 분이었거든.

Q. 화려한 테크닉 이전에 기본기를 만들어주신 것도 전규삼 선생님 영향 아닌가요.


그렇다고 봐야지. 전규삼 선생님의 농구는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해. 미래의 프로농구를 예상하고 가르치신 것 같아. 전 선생님은 원서만 보고 가르치셨는데도 장신과 단신의 장점을 절묘하게 접목시키셨어. ????참 많이 앞서 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니까. 프로선수들이 송도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게 기본 스텝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나오기 때문인 거지. 그 외의 다른 테크닉은 쉽게 차근차근 올라가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송도 출신들이 대기만성형이 많아.

Q. 사실 스승이 좋다고 다 잘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감독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 같은 데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고(故) 김인진(캐나다 사고)이 고려대 입학할 때 난 끼어 들어갔어. 그때부터 연습벌레가 되었어. 한영남 씨와 함께 새벽 연습을 1학년 때부터 시작했는데, 그게 습관이 되어 버려서 결혼 후 80년대까지 개인연습을 계속했어. 그러면서 목표를 하나 씩 세운거지. 고려대 시절엔 베스트5에 드는 게 목표였고, 그걸 이루니까 대표팀이 되는 게 목표가 되고, 다시 대표팀의 최고가 되는 것, 아시아의 최고로 목표를 바꿔가며 연습을 계속했어. 그 다음엔 이충희 같이 젊은 애들이 들어오면서 현상 유지를 위해 또 개인연습을 하는 거지.

Q. 개인연습은 어떤 식이었나요?


매일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했지. 365일 중에 364일을 개인연습을 했다고 보면 돼. 주로 죽어라 뛰거나 드리블 위주의 연습이었지. 1978년이었나? 잠실에 살 때는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도로에서 러닝을 하면서 드리블 연습을 매일 했어. 하루라도 운동을 쉬면 밥을 안 먹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거든. 그래서 당시 슛보다는 돌파력이 좋았던 것 같아. 아스팔트에서 연습하다가 체육관에서 드리블을 하면 얼마나 쉽겠어.

Q. 대학 1, 2학년 때는 달리기를 하면 다른 선수에 비해 거의 반 바퀴 차가 날 정도로 느렸다고 들었어요.


대학 1, 2학년 때 학교에서 종암 극장까지 로드워크를 하고 본교 앞에만 도착하면 도저히 뛰질 못 하겠더라고. 주저앉았다가 일어서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어지러웠지. 이공대에서 체육관 앞까지만 와도 못 뛰겠어.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인천 기독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더니 헤모글로빈이 부족하다는 거였어. 그래서 100CC 정도 수혈을 하고 3~4학년 내내 헤모글로빈과 철분 보강하는 약도 먹고 그랬지.

Q. 갑자기 그런 증상이 나타나 많이 놀랐겠어요.


상심도 정말 많이 했었어. 증상이 심해지면 다리가 땡땡하게 붓고 그랬거든. 아무래도 연습량은 많고, 음식량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영양부족인 거지.

 

Q. 그 이후에는 ‘터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날라 다니셨잖아요.


동남아에서는 ‘엔진’이라고 불리기도 했지. 리바운드 후 드리블로 치고 나가서 패스하고, 막 정신없이 쉬지 않고 움직이니까 그런 별명을 붙인 것 같아. 별명이 나쁘진 않더라고. 허허. 그 별명 덕분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바레인 지도자로 가게 되는 계기도 됐던 것 같아.

Q. 드리블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었잖아요. 백 드리블 같은….


사실 김영기 씨가 가장 먼저 하셨는데, 그 당시 그런 드리블을 하면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 때지. 난 뭐 그런 소리 신경 안 쓰니까. 허허. 혼자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 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거든. 78년도 북한 선수들과 할 때 한 경기에 3번을 했었지. 북한 선수들이 좀 당황했었을 거야.

Q. 그 북한과의 경기가 분단 이후 첫 남북대결이었잖아요.


분단 이후 처음이었지. 그때가 우린 세대교체가 된 이후였어. 유희형 선배도 빠지고 신선우 , 박수교, 이문규 등이 대표팀 주축이었어. 경기 시작하고 딱 서 있는데, 북한 선수가 오더니 귀에다 대고 “애미나이, 오늘 너 죽이 갔어!”라고 그러는 거야. 머리털이 쫙쫙 서는 거야. 먼저 때리지는 않아도 맞고는 못 사는 성격인데도 그때 긴장을 많이 했지. 우리가 학생이라면 북한 선수들은 완전 아저씨 몸이었거든. 심한 욕도 없는데, 섬뜩하더라고.

Q. 그 경기는 어떻게 됐나요.


게임 내용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지. 후반 5~6분 남기고 북한 선수들이 게임을 포기하고 나갔거든. 그게 벌써 40년 전 일이네. 그 이후에 기술위원으로 파견돼서 갔던 1989년도 ABC대회에서 그때 그 선수들을 다시 만났는데, 그 양반들이 “김동광이 SBS로 갔다 메?”라며 내가 SBS 코치로 간 것까지 소상히 알고 있더라고. 2년 뒤 고베 ABC대회에서도 다시 또 만났었지. 두 대회 모두 리명훈(북한)이 뛰고 있을 때일 거야.

Q. 대학 시절 청소년대표팀에 처음 발탁이 되셨잖아요.


1972년도 3학년 때 청소년 대표가 됐었지. 사실 호적이 2년 정도 늦게 돼 있어서 고등학교 3학년 애들하고 같이 발탁이 된 거지. 1973년 필리핀 ABC대회에 출전해 필리핀, 대만에 이어 3위를 했었어. 사실 그때는 가슴에 태극기를 단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라 아무 생각 없이 대회에 나간거지. 그때만 해도 다른 나라들은 나이가 기준보다 넘은 애들이 많았거든. 우린 정확하게 지켰고. 나도 호적상으로는 맞으니까…. 허허.

 

Q. 청소년 대표팀부터 시작해 주장을 오래 맡으셨어요.


1973년도 대표팀 때는 신동파 씨, 그 다음에 곽현채 씨가 두 번, 유희형 씨가 두 번을 했었어. 1977년도에 유희형 씨가 급성 간염으로 빠지면서 내가 주장을 처음 맡게 됐지. 그 뒤로 1981년까지 쭉 주장을 했어. 그때가 농구로서는 가장 꽃이 활짝 핀 시기라고 할 수 있어. 겁날게 없던 시기였지. 내 밑에가 바로 박수교였는데, 4년 차 정도가 났기 때문에 주장을 자연스럽게 달지 않았나 싶어.

Q. 감독님의 파워 있는 농구가 웨이트 트레이닝 덕분인가요?


우리나라에서 농구선수가 헬스를 접목한 최초로는 최경덕 씨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1세대고, 그 다음이 나지. 지도자 생활을 할 때도 항상 헬스를 강조했거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아마 그 당시 파워풀한 농구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게 헬스로 다져진 몸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

Q. 유희형 씨와 함께 한국 농구 최초의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송도고등학교의 장점이 아닐까. 그때는 가드나 포워드 구분 없이 기본기를 배웠기 때문에 볼 핸들링이 좋으면서 로우-포스트 피벗도 다 갖추고 있었지. 기본기부터 테크닉은 이미 송도고 시절에 완성됐던 것 같아. 그 뒤에 파워가 붙으면서 더 발전을 하게 된 것뿐이지.

Q. 중국 선수였던 목철주(무태추, 240cm, 180kg) 때문에 항상 준우승에 머물렀잖아요.


중국 팀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게 1977년 쿠알라룸푸르 대회부터였는데, 그 대회 기간에 목철주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배꼽 위밖에 안 보이는 거야. 고개를 한참 들어서 봤더니, 사람이더라고. 당시 우리 센터가 190cm 정도의 신선우였으니까, 엄청난 거지. 목철추는 그냥 돌아서면 림이야. 마음만 먹으면 10점 이기는 건 일도 아니야. 81년도에 팀 조직력이 정말 좋았는데, 목철주가 버티는 중국은 못 이겼지. 하도 화가 나서 다음 해 대표팀 은퇴를 했는데, 목철주도 같이 은퇴를 한 거야. 그리고 우리가 1982년 뉴델리 대회 우승을 차지했지. 현역 때는 계속 준우승이었어. 아마 중국이 그 때 지고 목철주가 다시 복귀해서 우리를 박살냈을 거야.

Q. 직접 부딪혀 본 적도 있으신가요? 힘에서는 밀리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내가 현역 시절 힘이 가장 좋을 때 드리블 치고 정면으로 돌진해서 박았는데, 그래도 나가 떨어져 버리더라고. 심판도 어이가 없어서 목철주 파울을 불었지. 내가 80kg 정도 나갔었으니까, 목철주랑 100kg 차이가 난거지.

Q. 터프한 공격을 하셨는데, 까다로운 수비수로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요.


최희암 감독이 수비를 굉장히 거칠게 했어. 나 막다가 5반칙으로 자주 퇴장 당했지. 국내에서는 내가 카리스마가 강해서 그런지 나한테 까다롭게 구는 선수들이 없었어. 가끔 들이대는 선수가 있더라도 경기 끝나면 감독이 시켜서 그랬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Q. 힘에 있어서 국내에서는 지존이셨는데, 국제대회에서는 없었나요.


그 당시 윌리엄 존스컵을 많이 나갔는데, 한 번은 미국 선수들이 거칠게 해서 우리 선수들이 매일 당하고 오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해결사로 나선 적이 있어. 사실은 그러면 안 되지만, 내가 팔꿈치로 쳐서 미국 선수 하나를 완전 뻗게 만들었지. 우리 선수들이 엄청 좋아했었어. 허허허.

Q. 은퇴는 동기들보다 늦게 하셨어요. 은퇴경기에 대한 느낌이 어땠나요.


내가 은퇴를 할 무렵에는 내 동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늦게 한 거지. 최명룡이 나보다 2년 전에 그만 뒀는데,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적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은퇴경기가 참 별거 없었던 것 같아. 그냥 반지 하나 주고 끝이었어. 어려울 때니까 화려한 건 없었지.

Q. 은퇴하고 바로 바레인 지도자 길을 택하셨죠?


2년 9개월 동안 바레인 지도자 생활할 때는 참 편했어. 처음 내가 가서 바레인을 10여년 만에 준우승을 시켰는데, 엄청 힘들게 훈련을 시켰어. 그때 거기는 농구가 레크리에이션 개념이더라고. 그 당시 은행 대리가 한 달에 30만 원 받을 때인데, 내가 200만 원 정도 받았으니까, 괜찮았지. 게다가 대표팀 코치다 보니까, 1년에 4개월만 연습시키면 됐거든. 화려한 백수였어.

Q.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어떤 걸 하셨나요.


바레인이 너무 더워서 거의 집에서 비디오만 보고 아점(아침 겸 점심) 먹고 쉬는 거였지. 휴일이면 버려진 타이어에 캠프파이어 해놓고, 바다에 그물 쳐놓으면 고기가 팔뚝만한 게 잡히고…. 지금도 와이프는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그러더라고.

Q.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는다면요.


대학교 4학년 때 정기전이 기억에 남네. 다른 종목은 다 져도 농구는 이겼어야 했는데, 다른 거 다 이기고 농구만 져서 4승 1패를 했었거든. 그리고 1978년 북한과의 경기, 대표팀 코치 시절 1997년 사우디 ABC대회에서 27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던 것, 2000년 삼성 감독으로 통합챔피언에 올랐던 경기들이 생각나.

Q. 사우디 ABC대회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그때가 ABC대회 역사상 최약체였을 거야. 서장훈, 현주엽이 모두 부상으로 빠지고, 190cm가 조금 넘은 정재근, 전희철이 센터였으니까. 예선에서 일본한테도 지면서 대만과의 경기를 남겨놓고 탈락 위기에 놓인 거야. 선수들을 불러놓고 얘기했어.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예선탈락을 해본 적이 없다. 불명예스럽게 돌아갈 수 없으니, 너희끼리 뭉쳐서 해봐라.” 그때 대만한테 20점 차로 이기고 4강에 올라간 거지.

Q. 준결승이 중국이었잖아요.


중국 선수들이 우리를 우습게 봤어. 중국 선수들은 거의 일대일로 해결하려다가 번번이 강동희, 이상민에게 다 스틸 당했어. 우리 손이 좀 빠르나. 아마 3점차로 이겼었던 것 같아. 그리고 결승에서 다시 일본을 만난 거지.

Q. 결승전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일본과의 경기가 참 재미있었어. 일본 선수들에게 강동희, 이상민, 문경은이 다 막혀버렸어. 서장훈, 현주엽도 없지. 큰일이 난거야. 그런데 번뜩 생각이 났지. 내가 매일 헬스를 하러 가는데, 항상 김승기(원주 동부 코치)를 보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거야. ‘준비되어 있는 친구구나’하고 느낀 거지. 그 날 김승기가 17점인가 득점을 올리면서 우승 주역이 됐지. 상대 팀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카드였거든.

Q. 국내 복귀 후 감독 시절도 파란만장하셨잖아요.


기업은행은 전통이 잘 되어 있는 팀이야. 내가 18년 기업은행 다니다가 은행팀 코치에서 실업팀으로 간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거야. 밖에서 봤을 때는 등을 저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아마 SBS에 (신)동파 형이 없었으면 절대 안 갔을 거야.

Q. 후회되지는 않나요.


돈을 보고 간 거는 아니었으니까 후회는 안 해. 사실 승부욕이 발동한 거지. 이기는 농구를 하고 싶어서 갔다고 보면 돼. 기업은행에서는 돈을 안 쓰니까 스카우트가 안 되더라고. 현역 때는 만날 이겼는데, 거꾸로 매번 지는 거지. 은행에서도 현대와 삼성에게는 져도 괜찮다고 하는데, 승부욕 있는 사람에게는 웃기는 얘기거든. 그런 게 어디 있어. 승부의 세계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잘 간 것도 못 간 것도 아닌 것 같아. 어차피 다 프로화가 됐으니까, 좀 일찍 프로에 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Q. 한 술 하시는 걸로도 유명한데….


송도고 시절엔 워낙 바른 생활이었고. 대학 들어가서 처음 술을 입에 대봤어. 학교 특성상 막걸리로 배웠는데, 선배들이 술을 계속 줘도 얼굴 한 번 안 빨개졌지. 그래서 엄청 많이 먹었어. 농구선수들이 심폐활동이 빠르고 많으니까, 술도 잘 소화시키는 게 아닐까. 난 술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다음 날 냉수 한 컵이면 끝나.

Q. 술로 인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술 시합은 딱 세 번 해봤어. 배구 선수들하고 했을 때는 저쪽이 이춘표, 박기원 등이 있었고, 우리는 박수교, 박형철 그리고 나 이렇게 주당들만 모여 시합을 했었지. 소주로 시작해 와인, 고량주로 3차를 마치고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더니, “형님 죄송합니다” 하더라고. 그 이후엔 기업은행 윤동규 씨와 정진구 씨가 한 번 붙자고 해서 붙었는데, 내가 문영환이와 함께 나와서 아마 저녁 8시부터 마시기 시작했을 거야. 새벽 4시까지 마신 다음에 장충동에서 해장으로 소주 마시고, “무승부다” 한 적이 있지. 허허허.

 

Q. 확 튀는 외모 덕분에 인기도 엄청 많았을 것 같은데요.


오빠 부대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 체육관을 나오면 어떻게든 한 번 만져보려고 하다가 유니폼 다 찢어지고 그랬어. 어렵게 살 때였는데도 오렌지주스 하나 주고 가고 그랬거든. 얼굴이 이렇게 좀 튀게 생기다보니까 어디가도 사람들이 다 알아봐.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은 대번에 알아보시니까.

Q. 아내 이은희 씨와의 첫 만남은 어떠셨나요?


대학교 4학년 때 중앙극장 앞에서 버스를 탔는데, 우연히 한 눈에 들어오는 여학생을 만난 거야. 그 당시는 버스에서 말도 못 거는 시대였기 때문에 우이동 종점까지 따라갔었어. 그 때 대학 축제가 있었는데, 그때 파트너로 데리고 오게 되면서 만남이 길어졌어. 사실 연애기간만 길었지, 거의 만날 시간이 없었어. 7년을 연애했는데, 대부분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있어서 수요일 면회 한 번, 일요일 외출 한 번이 전부였지.

Q. 아내 분이 농구도 많이 좋아하셨나요?


농구에 대해 하나도 몰랐지. 나 만나면서 체육관 오게 되고, 지금은 아들도 농구를 하니까, 거의 코치가 다 됐어. 당시만 해도 장충체육관에서 몸 풀다 아내를 찾으면 어디 앉아 있는지 다 알았을 때인데, 아내를 못 찾으면 그 날 경기가 안 풀리더라고. 은근히 신경이 쓰였었던 거 같아. 그러다가도 바로 보이면 경기가 잘 되고. 허허.

Q. 감독님 어머님께서 엄하게 키우셨다고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누구를 패고 들어오면, 용돈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어디서 맞고 들어오진 말라고 하셨어. 맞고 오면 더 박살나는 거였지. 남자는 남자답게 커야 된다는 것이 어머니 말씀이었어.

Q. 그러면, 어려서 벌도 많이 받았겠어요.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손들고 서 있는 걸 많이 했었지. 엄하게 크다 보니까, 나한테는 도움이 많이 됐는데, 어머니한테는 도움이 별로 안 된 것 같아. 어머니하고 잔정이 없었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애들하고 얘기할 시간이 없더라고. 요즘은 애들이 더 바빠서….

Q. 아버지(George E. Fretz)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30년 만에 만나셨다고 들었는데요.


1983년 6월에 김윤 씨를 통해서 아버지를 처음 만났지. 농구 감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나에 대해 물었다고 하더라고. 라마다 기간에 바레인 공항에서 만났는데, 울고불고 이런 거는 전혀 없었어. 말도 잘 안 통하는 데다 이미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진으로 봤었거든. 미국에서 재혼하셔서 낳은 아들이 있는데, 예전 사진을 보니까 옆모습이 나랑 똑같더라고… 신기했지. 그래도 그때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 처음 뵙고 일주일 정도 바레인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냈고, 그 이후 16년 만인가, 삼성 우승한 다음에 초대를 해서 한 달 이상 계셨었지.

Q.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고 들었어요.


내가 봤을 때는 돌아가신 것 같아. 군에서 은퇴하신 후에 트레일러로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하셨던 걸로 아는데, 애리조나로 옮기신 후 연락이 안 되더라고. 연세도 85세 정도 되셨으니까….

Q. 아쉬움이 많이 남으실 텐데, 앞으로 더 찾아보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사실, 마음은 찝찝해. 아버지께서 나의 뿌리를 확실히 가르쳐 주시고 가셨거든. 할머니는 아일랜드, 할아버지는 독일 분이라서 전통적으로 드센 집안이더라고. 내가 승부욕이 강한 것도 집안 내력인 가봐. 또 하나 들은 얘기가 장수 집안이라고 말씀하셨거든. 어쩌면 아직 살아 계실지도 모르지. 미국 경찰 쪽으로 연락을 해서 이름 철자 갖고 다시 찾아 볼 계획이야.

김동광은…


전천후 플레이어 김동광은 1953년 부산 출생으로, 송도중고를 거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1972년 청소년 대표를 시작으로 1973년 성인 대표팀에 발탁돼 1981년 인도 ABC대회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대표선수 시절 7번의 준우승만 기록했던 그는 1997년 대표팀 코치로 나선 사우디 ABC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맛봤다. 1983년 바레인 대표팀 감독으로 지도자의 문을 연 그는 중소기업은행, SBS, 삼성을 거쳐 KT&G 감독을 역임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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