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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인 훈련으로 이룬 괴력, '헤라클레스' 심정수

---KBO Legends

by econo0706 2009. 2. 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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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심정수 일러스트 / 출처=KBO

 

스쿠미 캠프, 휴일의 평화가 깨진 날

 

김태룡 두산 단장은 팀 매니저로 일 하던 1995년 봄으로 기억한다. 두산 베어스 전신인 OB 베어스의 일본 스쿠미 전지훈련이 한창이던 2월 어느 날, 전체 선수단이 휴식일을 맞아 여유 있는 오후를 즐기던 중에 일이 터졌다. 지역 ‘맛집’을 찾아 한숨을 돌리려던 김 단장이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심정수가 다쳤습니다.”

훈련을 유별나게 많이 했던 심정수였다. 쉬는 날에도, 심정수는 쉬지 않았다. 심정수가 그날도 찾은 곳은 캠프 내 실내 체력단련장. 벤치프레스로 근력을 키우던 심정수가 그만 무거운 바벨을 손에서 놓쳐 가슴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때 아마 구급차도 불렀죠. 가슴 앞쪽을 다치면서 시립병원에 입원도 했어요. 쉬는 날, 참 여럿이 놀랐던 것 같아요.”

프로야구 선수들이 근육을 키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던 시대다. 오히려 팔 근육을 너무 키우면 스로잉이나 피칭에 지장을 주고, 가슴 근육을 단련하면 스윙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을 때다. 신인급이던 심정수가 근육을 불리려는 목적으로 틈만 나면 바벨을 드는 모습은 구단 내 사람들에게도 낯설 수밖에 없었다.

 

OB 베어스가 찾은 ‘대안’은 ‘대박’이 됐다

 

심정수가 몸만들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동대문상고 3학년 때인 1993년부터다. 보디빌딩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운동하는 법을 배우고 헬스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또 그때부터 단백질 보충을 위해 삶은 달걀을 한판씩 먹기 시작했다. 호리호리하던 심정수는 그즈음 몸이 빠르게 커졌다. 1m80이 넘는 키에 몸무게도 90㎏를 웃도는 ‘근육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심정수는 1994년 신인 쟁탈전에서 OB가 찾는 1순위 선수는 아니었다. 서울 구단 OB와 LG가 서울지역 고교를 양분해 관할하던 시절, OB는 배명고 졸업 예정이던 김동주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영입을 위해 올인한다. 김동주가 고려대로 진학하는 것이 유력해지자 비상 대책회의까지 진행한 끝에 당시로는 파격적인 액수인 2억원까지 베팅액을 높여 제시한다. 그런데도 고대 입학 의지가 확고했던 김동주와 김동주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김동주는 4년을 더 보내고 고대 졸업 뒤 OB 유니폼을 입는다.

 

OB는 허탈함 속에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심정수는 결과적으로 OB에는 ‘대안’ 아니라 ‘대박’이 됐다.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당시 OB 운영팀장으로 신인 스카우트를 주도했던 인사로 “김동주와 달리 심정수와 계약은 아주 수월하게 진행됐다”고 기억한다.

 

“심정수 본인이 대학보다는 프로를 원했어요. 아버지를 직접 설득한 걸로 알고 있는데, 나중에 아버지한테 ‘우리 정수는 어떻게 할거냐’고 전화가 왔어요.”

 

심정수는 계약금 3800만원·연봉 1200만원 등 총액 5000만원에 OB 유니폼을 입는다. 입단 당시부터 ‘미래의 홈런타자’로 기대가 컸다. 다만 늘 그렇듯 성장 속도는 미지수였다. OB 사령탑이던 윤동균 감독부터 심정수를 가급적 1군에 오래 두고 직접 동행하며 관리하려 했다.

 

▲ 당시 김동주 대안으로 선택된 심정수, 하지만 그도 KBO리그 레전드로 성장하였다. (2003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 사진 출처=KBO

 

믿음의 야구, 큰길을 열어준 김인식 감독의 선택

 

불투명했던 기대가 현실화된 것은 바로 이듬해였다. 김인식 감독이 OB 지휘봉을 잡은 1995시즌이다. 김인식 감독은 1994년 9월 말 OB와 계약한 뒤 다음 시즌을 준비를 위해 10월 가을 마무리캠프부터 선수들을 근거리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3루수로 펑고를 받던 심정수가 시야에 자꾸 들어왔다.

 

“밖에서도 OB 게임을 보면서 심정수가 내야수로 조금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했어요. 문제는 송구였어요. 막상 훈련하면서 보니 어깨가 너무 좋아서 1루로 공을 던지면 가끔 관중석 그물망을 때리겠더라고요. 이게 결정적인 승부처에서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더라고요. 정수는 외야수가 더 잘 맞겠다는 판단을 했어요."

 

심정수는 이듬해 봄 스쿠미 전지훈련부터 우익수로 이동해 뛰기 시작한다. 선수생활의 주포지션이자 출전 경기 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자리를 찾은 것이었다. 당시 매니저로 과정을 지켜본 김태룡 두산 단장은 심정수에게는 김인식 감독이 ‘은인’과 다름없다고 했다.

 

“김인식 감독님 ‘믿음’이 컸죠. 심정수를 쭉 보시더니 ‘정수는 우익수로 박아놓고 계속 내자’고 하시는 거예요. 거포로 키울 계산을 하신 건데 불과 고졸 2년차 선수한테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생긴 거였죠.”

 

1994년만 해도 32경기에 출전해 타율 0.164에 3홈런만을 기록했던 심정수는 1995년 극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116경기 출전하며 0.282라는 준수한 타율에 홈런을 21개나 때린다. 홈런 공동 4위에 오르며 ‘소년장사’라는 애칭도 생겼다.

 

심정수에 대해 물으면 계란부터 떠올린다

 

심정수와 함께 했던 관계자들이 그에 대해 얘기하며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계란의 전설’이다. 심정수는 공기 마시듯 매일 ‘삶은 계란’을 먹었다. 심정수는 OB 입단 전부터 삶은 계란을 한판(30알)씩 삶아 흰자만을 먹었다. OB 입단 국내 전지훈련을 할 때면 가스버너를 갖고 다니며 매일 한판씩 계란을 직접 삶기도 했다.

 

심정수에게 계란 흰자는 안전하고 효과 좋은 ‘단백질 보충제’였다. 삶은 계란을 향한 애착 또는 집착도 강했다. 현대 시절에는 룸메이트이던 강귀태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심정수의 삶은 계란을 슬쩍 먹었다가 ‘큰일’을 당할 뻔한 일화도 있다. 늘 문제는 노른자 처리였다. 1990년대 OB 주전 유격수이자 선배이던 김민호 LG 주루코치는 “선수단 버스에서도 냄새가 진동할 정도였다. 심정수가 이동할 때마다 삶은 계란 흰자만을 먹고 노른자를 차 어딘가에 두곤 했는데 그 냄새가 보통 심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심정수는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웠던 노른자를 운동하던 헬스클럽 옥상에 살던 개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그러나 간식이라고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지나친 콜레스테롤 탓인지 어느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달라졌다는 ‘썰’도 전해진다.

 

누군가에게는 고통, 또 누군가에는 웃음을 주던 시간이었지만, 삶은 계란과 관련된 일화들은 결과적으로 KBO리그 역사에는 의미 있는 장면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프로야구에는 없던 ‘신개념 거포’가 탄생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홈런타자라면 선천적으로 지닌 힘을 쓴다는 생각이 우세했을 때다. 후천적 노력으로 힘을 키워 타격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강할 때다. 심정수는 달랐다. 운동으로, 또 식단 관리로 힘을 키워 스윙에 힘을 붙였다.

 

▲ ‘헤라클레스’의 탄생은 계란으로 시작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심정수는 몸관리에 철저했다. / 사진 출처=KBO

 

심정수가 훗날 현대로 트레이드된 2001년 이후 한 팀에 있던 김용일 LG 트레이닝 수석코치는 그를 ‘매우 특별했던’ 선수로 기억한다. 트레이닝 코치들조차 심정수라면 몸관리에 관해서 따로 가르칠 것이 많지 않았다.

 

“야구선수가 트레이닝으로 기능적인 힘을 만든 것으로는, 심정수가 선구자이자 1세대나 마찬가지예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트레이닝에 대한 자기 주관과 철학이 아주 명확했어요”

 

심정수는 김인식 감독과 만남 뒤 급성장 코스를 밟기 시작해 1999년 31홈런, 2000년 29홈런을 때리며 리그 정상급 홈런타자로 완전히 자라난다. 또 2000년 LG와 플레이오프에서는 4차전부터 6차전까지 3경기 연속 결승홈런을 때리는 결정력도 보였다.

 

그래서 심정수가 2001시즌을 앞두고 심재학과 트레이드로 현대로 이적하자 뒷말도 많았다. 당시 구단들에게는 예민한 문제이던 선수협회 결성에 심정수가 연관돼 있던 것이 작용했다는 후문이었다.

 

당사자에게는 분명 불편한 트레이드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심정수에게 트레이드는 축복이었다. 심정수는 현대 이적 이후 황금기를 만난다.

 

50홈런 고지 ‘동반자’ 김용달 코치와 만남

 

심정수는 야구선수로는 근육질 몸매로 괴력의 홈런을 뿜어내며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본 관계자를 그의 ‘하드웨어’ 만큼이나 ‘소프트웨어’에 주목한다.

 

일면 소크라테스를 닮은 헤라클레스 같았다. 심정수는 몸을 만드는 운동에 대한 소신만큼이나 타격에 대한 자기 철학이 확실했다. 대부분 거포들이 몸에 내재된 힘을 바탕으로 가급적 무거운 방망이를 휘둘러 타구에 힘을 전달하는 것과 달리 심정수는 몸의 힘은 키우되 아주 짧고 가벼운 방망이를 들었다.

 

심정수와 OB에서 함께 뛴 우타 거포 타이론 우즈는 1㎏짜리 방망이를 들기도 했다. 방망이 길이도 35~36인치로 보통의 타자들보다 1.5~2인치나 긴 방망이를 썼다. 바깥쪽 보더라인에 걸치는 볼까지 잡아당겨 잠실구장 좌중간 스탠드에 꽂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KBO리그 ‘홈런 역사’인 이승엽 또한 한창 때 920g짜리 방망이를 들었던 것처럼 홈런타자라면 최소 무게 900g이상의 방망이를 드는 게 통념이었다. 그런데 심정수는 무게 840g에 길이 33인치의 ‘미니 방망이’를 들었다. 젓가락을 든 헤라클레스처럼 방망이를 아주 가볍고 빠르게 돌려 홈런을 양산하는 것이 그 당시 특화됐던 심정수만의 타법이었다.

 

김태룡 두산 단장의 기억에 따르면 OB 시절의 심정수는 방망이 제작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무게를 줄이면서도 밀도 있는 방망이를 만드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또한 ‘노하우’가 생기며 심정수의 작고 단단한 방망이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심정수가 홈런타자로 정점에 오른 것은 2001년 현대로 이적해 김용달 타격코치를 만난 이후다. 심정수는 이미 리그 정상급 거포였지만, 김 코치는 심정수가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했다.

 

심정수는 전문 보디빌더를 연상시키는 상체에서 뿜어져나오는 파괴력으로 타구의 비거리를 냈지만, 하체는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스탠스는 기마자세에 가까웠다. 넓게 벌려놓은 양 다리는 스윙을 지탱하는 기둥처럼 활용할 뿐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심정수는 귀를 열지 않으려 했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면서도 30홈런 이상을 때렸던 타격폼이었다. 괜한 ‘모험’을 하자니 겁이 나는 것이 당연한 일었다. 그러나 긴 ‘밀당’ 끝에 결국에는 김 코치가 내민 손을 잡는다. 김 코치는 “심정수 하면 우락부락한 몸이 먼저 떠오를 수 있지만 굉장히 지혜로운 타자였다”고 기억한다.

 

“30홈런은 이미 쳤지만 50개 넘게 치려면 하체를 쓸 필요가 있다고 주문을 했어요. 처음에는 거부 반응도 보였지만, 받아들이고 시작한 뒤로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양 무릎을 내측으로 모아놓고 살짝 주저앉은 상태에서 순간적인 하체 턴으로 힘을 내는 방식이었죠. 사실, 기술적인 완성도로 보자면 이승엽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심정수는 어떤 낯선 곳에 가더라도 하루에 계란 한판씩은 꼭 삶아 먹는 집념을 보였다. 김 코치의 주문을 받아들인 뒤에는 새 타법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김 코치의 기억에서도 심정수는 참 많이 다른 선수였다.

 

“정수는 작심만 하면 뭐든 끝까지 하는 선수였어요. 타법도 한번 받아들이더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푹 빠지더라고요. 가장 큰 페트병 있잖아요. 그 병에 생수를 가득 담아놓고 그거 다 비울 때까지 홀로 스윙만 했어요. 다른 선수들과 어울려 훈련하지도 않았어요. 여럿이 하다 보면 아무래도 대화도 하면서 하게 되는데 잡담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던 거죠.”

 

심정수는 현대 이적 첫해는 18홈런으로 주춤한다. 그러나 새 타법이 완성단계로 접어든 이듬해 2002시즌 46홈런을 뿜어내더니 2003년에는 53홈런을 쏘아 올린다.

 

▲ 김용달 코치와의 만남으로 심정수는 성장과 우승의 기회를 모두 잡았다. / 사진 출처=KBO

 

이승엽이라는 ‘산’, 부상이라는 ‘벽’

 

그럼에도 심정수는 홈런 역사에 2인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자리에는 삼성 홈런타자인 이승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정수가 46홈런을 때린 2002년에는 이승엽이 47홈런을 기록했고, 심정수가 53홈런을 쳐낸 2003년에는 이승엽이 56홈런을 뿜어냈다.

 

심정수가 홈런왕에 오른 것은 FA(자유계약선수)로 삼성으로 이적하고 3시즌째인 2007년이었다. 이승엽이 일본프로야구로 떠난 뒤 4번째 시즌이었다. 심정수는 ‘홈런 맹주’가 리그에 사라진 그 시대에 31홈런만으로 타이틀을 따냈다.

 

삼성 시절은 빛보다 그늘이 많은 시간이었다. 2005시즌을 앞두고 4년 최대 60억원이라는 당시로는 충격적인 조건에 이적하며 프로야구 선수 몸값 상승의 이정표를 세웠지만 꽃길에 오르지 못했다.

 

▲ 헤라클레스의 앞에는 번번이 라이온킹이 있었다. / 사진 출처=연합뉴스

 

현대 시절인 2003년 받은 라섹 수술 여파를 결국 극복해내지 못했다. 처음 수술 이후만 해도 양쪽 0.7에 불과하던 시력이 1.5까지 나오며 희망에 부풀었지만, 야간 경기만 되면 사물이 번져 보이는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2003년만 해도 53홈런을 뿜어내면서도 0.335의 고타율을 기록했지만 수술 이후 첫 시즌인 2004년에는 102경기에만 출전하며 홈런 22개로 줄어든 가운데 타율이 0.256으로 급락했다. 심정수는 훗날 “공에 날개가 날린 것 같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 삼성 시절 심정수, 그는 더 이상 과거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 사진 출처=연합뉴스

 

삼성 이적 이듬해인 2006년 초에는 독일로 날아가 왼쪽 무릎과 우측 어깨를 수술하며 정규시즌에 고작 26경기에만 출전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에는 출전하며 삼성의 2연패 순간만큼은 함께 한다.

 

심정수는 2007년 반짝 했지만 갖은 부상으로 이미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양쪽 어깨와 양쪽 무릎을 모두 수술한 뒤 2008년 왼쪽 무릎 부상이 재발해 시즌 중 다시 수술대에 오른다. 심정수에게는 마지막 수술이었다. 심정수는 그해 시즌 뒤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나이 만 33세일 때의 일이다.

 

역대 최연소-최소경기 1,000타점을 달성하는 심정수

 

당시 심정수와 룸메이트였던 강명구 삼성 코치는 “삼성에서도 운동은 하루도 게을리하는 것을 못봤다. 알려진 대로 계란 흰자, 우유 같은 몸에 좋은 것을 열심히 챙겨 먹으며 재기하려 했다. 마지막까지도 의지가 정말 강했는데 어느 순간 아무리 해봐도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내려놓는 모습’이 조금 보였다”고 말했다.

 

삼성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낙후 시설도 심정수의 은퇴를 재촉했다. 삼성은 구단에 아낌없는 투자를 할 때이지만, 대구시의 시설 투자에는 인색하던 시절이다. 인조잔디를 한꺼풀 벗겨내면 바로 시멘트 바닥이었다. 함께 이적했던 유격수로 지금은 삼성 감독대행인 박진만도 놀랐던 장면이다. 당시 가뜩이나 무릎이 약해져 있던 심정수에게는 그라운드 환경조차 악재일 수 있었다.

 

프로 15년 통산 328홈런. 심정수는 2022년 기준 통산 홈런 10위에 올라 있다. 그러나 심정수의 야구는 여전히 미완성 상태로 끝난 느낌이다. 동시대에 만난 리그 역사 최고의 홈런타자 이승엽을 넘지 못했고, 나중에는 온갖 부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은퇴 뒤 미국으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

 

안승호 기자 / 경향신문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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