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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생에서 전설로, '신화'가 된 선구자 장종훈

---KBO Legends

by econo0706 2009. 2. 1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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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40주년 특집 장종훈 일러스트(출처=KBO)

 

스피드와 정교감을 모두 갖춘 신인의 등장

 

4할 타율. 0점대 평균자책점. 한 시즌 30승. 홀로 한국시리즈 4승. 프로야구 초창기 ‘초인’들의 믿기 힘든 발자취들이다. 리그의 수준이 올라가고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된 지금은 범접할 수 없는, 그래서 영원히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들이다. 도저히 닿을 수 없기에, 목표로 삼을 수도 없다.

반면, 다음 세대에 영감과 지향점이 되는 업적들도 있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처럼, 가장 먼저 달의 표면을 밟은 닐 암스트롱처럼, 수많은 이들에게 꿈과 목표가 되는 이정표. 더 훌륭한 후배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드는 디딤돌 같은 선배. 시대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는 역사적 존재. 한국 프로야구사에 그런 거인들을 꼽을 때, 장종훈은 언제나 첫 손에 꼽힌다.

메이저리그에서 베이브 루스가 그랬던 것처럼, 전례가 없는 홈런쇼를 펼쳐 한국 야구사에 ‘홈런의 시대’를 열었다. 한 시즌 40홈런, 통산 300홈런 고지를 가장 먼저 정복해 후배 장타자들에게 더 큰 가능성을 보여줬다. 숱한 실패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구단의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을 일궈냈다. ‘학력이 아닌 노력’으로 이 모든 업적을 이뤄내며, 이후 ‘고졸 스타’들이 프로 무대에 자신 있게 도전할 용기를 선물했다.

하지만 위대한 홈런왕의 시작은 초라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1. ‘훈련 보조 연습생’, 기회를 잡다

 

1985년 세광고 3학년생 장종훈은 벼랑 끝 위기에 몰렸다. 크지 않은 덩치에 고등학교 내내 홈런을 1개 밖에 못 친 별 볼 일 없는 내야수를 주목하는 프로팀은 없었다. 대학 팀들은 ‘입학하려면 돈을 내라’고 요구했다. 연고지에 새로 생긴 프로구단 빙그레 이글스의 공개 테스트를 보러 경남 창원까지 갔지만 행사가 취소돼 헛걸음. 돌아오는 버스에서 장종훈은 눈물을 흘렸다.

 

“아직 어린데, 인생이 너무 가혹하다 싶었어요.”

 

모교 감독의 추천과 읍소로 겨우 잡은 기회는 ‘연습생’이었다. 지금의 ‘육성 선수’와 신분이 비슷하지만, 하는 일은 ‘훈련 보조요원’에 가까웠다. 1986년 전반기 내내 장종훈은 빙그레 1군 선수단을 따라다니며 배팅볼을 던지고 그라운드를 정리하고 정식 선수들의 심부름을 했다. 그리고 틈틈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3년만 이 악물고 해 보고, 안 되면 다 접고 장사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고된 시간이었지만, 소득도 있었다.

 

“1군 선수단이랑 같이 다니니까, 호텔 식사를 같이 먹었어요. 고등학교 때랑은 차원이 다른 식사였죠. 너무 맛있어서 엄청나게 먹었어요. 매끼 밥 두 공기씩은 먹었던 것 같아. 잘 먹으니까 덩치가 커지더라고요. 프로 입단하고 나서 키가 8~9cm나 컸어요.”

 

빙그레 배성서 감독은 당시 야구선수로는 엄청난 장신인 185cm가 넘은 장종훈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후반기부터는 1군을 따라다니지 말고, 2군에서 본격적으로 훈련을 하도록 했다. 2군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시절이었다. 1군 선수단 연습이 시작되기 전에만 운동장을 쓸 수 있었고, 연습경기는 1년에 두어 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장종훈의 발전은 눈에 띄었다. 연습 타격 때 심심치 않게 담장을 넘겼다. 결국 1987년 4월 14일, 해태 전을 앞두고 주전 2루수 이광길이 손톱이 깨져 결장하게 되자 배성서 감독은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그날 처음 1군에 올라왔어요. 이광길 선배가 빠져도, 김성갑 선배가 2루로 가고 김종수 선배가 유격수를 맡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어요. 경기 뛰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전광판에 ‘8번 유격수 장종훈’이라고 떡 뜨는 거예요. 허 참.”

 

장종훈은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3회 데뷔 타석부터 좌중간 2루타를 터뜨리더니, 7회에는 스퀴즈번트로 동점 득점을, 연장 10회에는 투아웃 만루에서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을 골랐다. 다음 날 스포츠신문 1면에는 ‘19세 장종훈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이 걸렸다.

 

2. 첫 성공, 첫 실패

 

이후 장종훈은 신문 기사에 점점 자주 등장하게 된다. 한국에 없던 유형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한국에서 ‘장타자 유격수’는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장종훈이 등장하기 전인 1986년, ‘유격수 홈런 1위’는 4개의 김재박이었다. 그래서 1987년 규정타석도 못 채운 장종훈이 기록한 홈런 8개는, 당시까지 ‘유격수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당시의 통념과 다른 존재가 등장하자, 팀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본격적으로 장타자의 길을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게 스윙하면 망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준비 자세에서 방망이 끝이 투수 쪽을 향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았어요. 스윙 때 방망이가 멀리 돌아 나오니까 스윙이 커지고 헛스윙이 많아진다는 거죠. 차라리 김성한 선배의 오리궁둥이 타법처럼 방망이를 반대로 눕히는 게 낫다는 분들도 계셨어요. 크게 야단치는 지도자도 있었어요. ‘저래서 공이 맞겠어!!’”

 

순박하고 사람 좋은 장종훈의 미소 뒤에는 ‘황소 고집’이 숨어 있었다.

 

“사람마다 말이 다 다른 거예요. 좀 건방질 수도 있지만 그때 결심했어요. 그냥 내 생각대로 해 보자고. 다른 사람 말 신경 쓰지 말고.”

 

▲ '거포' 유격수의 탄생을 알린 빙그레 이글스 시절의 장종훈 / 사진 출처=KBO

 

위계질서가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던 그 시절, 장종훈은 ‘마이 웨이’를 위해 누구보다 많은 땀을 쏟았다. 당시 장종훈의 연습량은 전설적이었다. 야간 경기를 마친 뒤 귀가해 밤12시부터 반드시 1시간 이상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도때도 없이 스윙을 한 탓에, 당시 장종훈이 살던 대전 중촌동의 18평 시영아파트 벽과 천장에는 배트에 맞아 구멍이 뚫린 곳이 허다했다. 도배를 해봤자 이틀을 넘기지 못했기에 언제부턴가는 벽지를 새로 바르는 것도 포기했다. 신문과 방송에는 굳은살 투성이인 장종훈의 손바닥 사진이 자주 등장했다. 기술 연습만 한 게 아니었다. 당시 한국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던 일본 프로야구 중계방송을 비디오테이프로 구해왔다. 당대의 강팀이던 세이부 라이온즈의 기요하라, 아키야마, 데스트라데 등 홈런 타자들의 스윙을 수도 없이 돌려봤다.

 

“너무 많이 봐서 테이프가 끊어지기 일쑤였어요. 그걸 다시 살려보겠다고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서 다시 재생하면 꼭 중요한 부분만 지워져 있더라고요.”

 

노력은 성적으로 나타났다. 1988년 첫 두 자릿수 홈런으로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따낸 뒤, 1989년에는 18홈런으로 홈런 4위에 오른다. 무섭게 성장하던 장종훈이 처음 뼈저린 실패를 맛본 것도 1989년이었다.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4대 2로 앞서 있던 4회초. 1아웃 만루 위기에서 송진우가 백인호를 평범한 유격수 앞 땅볼로 유도했다. 모두가 병살타를 예상한 순간, 타구는 유격수 장종훈의 다리 사이를 빠져 나갔다. 치명적인 실책으로 역전을 허용한 빙그레는, 이후 한국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리드를 되찾지 못하고 해태의 4년 연속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2년 연속 무릎을 꿇은 빙그레는 장종훈에게 책임을 추궁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OB의 주축 투수 김진욱과 트레이드를 추진한 것이다. 성사 직전까지 갔던 트레이드는 당시 모기업의 막판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한국 야구사가 완전히 다른 길로 갈 뻔한 순간이었다.

 

장종훈이 트라우마를 극복한 무기도 야구였다.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일본 다이에 호크스 구단의 마무리 캠프에 저랑 송진우, 강석천 등이 파견을 가서 함께 훈련을 했어요. 실책 때문에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는데 거기서 자신감을 많이 찾았어요. 제가 연습 배팅을 하면 일본 선수들이 우루루 와서 구경하면서 감탄을 했어요. 일본에도 우측으로 밀어서 넘길 수 있는 타자는 드물었거든요. 청백전에서 홈런도 쳤고. 당시 다이에의 다부치 고이치 감독님도 저를 엄청 높게 평가하셨어요. ‘저 친구 우리 팀에 데려올 수 없냐’고 물어보시기도 했다더라고요. 저한테 격려도 많이 해주셨는데, ‘삼진 200개 먹어도 홈런 40개 치면 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속으로 ‘달랑 18개 쳤는데 무슨 소리야?’라고 웃어넘겼지만요.”

 

다부치 감독이 발견한 ‘40홈런의 가능성’은 곧 현실이 된다.

 

3. 1990~1992년, ‘위대한 장종훈의 시대’

 

원래 총알 같았던 장종훈의 타구는 1990년, 미사일로 바뀌었다. ‘배트에서 출발한 타구가 비행 도중 두 번 점프해 담장을 넘어 갔다’, ‘점프한 유격수의 글러브 위로 지나간 타구가 쭉쭉 뻗어 좌중간 담장을 때렸다’ 같은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계속 생겨났다. 장종훈 스스로도 그 당시를 ‘힘을 하나도 안 써도 담장을 넘기던 시절’로 기억한다.

 

“오른쪽 다리에 힘을 먼저 실으면서 활처럼 몸을 뒤로 당긴 뒤에 최적의 포인트에서 공을 맞히는 요령을 알았어요. 그리고 공의 살짝 밑으로 배트를 집어넣는 느낌으로 치면 타구에 백스핀이 생겨요. 백스핀이 걸린 투수의 패스트볼이 덜 가라앉는 것처럼 타구도 백스핀이 걸리면 덜 떨어지면서 날아가는 거죠.”

 

▲ 1991년도 MVP를 차지한 풋풋한 시절의 장종훈 / 사진 출처=KBO

 

장종훈은 1990년 28개의 홈런으로 생애 첫 홈런왕을 차지했고, 91타점으로 역대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우며 전성기를 시작한다. 다음 시즌 목표를 묻는 질문에 ‘제 등번호인 35개’라고 답한 장종훈은 그 장담을 현실로 만든다. 유격수의 수비 부담을 벗고 1루수/지명타자로 타격에 더 전념할 수 있게 된 1991년, 사상 최초로 100득점과 100타점을 돌파하며 35홈런, 160안타의 한 시즌 신기록을 세운다. 0.640의 장타율과 1.090의 OPS는 1982년 백인천 이후 최고 기록. 0.345는 리그 1위이자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 생애 첫 MVP를 차지한 장종훈은 1991년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도 강렬한 한 방을 터뜨린다. 5차전 6회, 기후시 나가라가와 구장 외야 관중석을 완전히 넘어가는 장외홈런을 터뜨린 것. 구장 역사상 최초의 장외홈런에, 현지 야구계는 ‘호타를 찬양하며’라는 문구가 적힌 기념비를 세웠다.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된 장종훈에게는 연일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인터뷰에는 ‘다음 목표’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장종훈은 큰 고민 없이 ‘40홈런’이라고 답했다. 1991년의 성취에 5개만 더한 단순한 계산이었는데, ‘뱉은 말의 무게’는 엄청났다.“1992년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렸어요. 40홈런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가 되다 보니까 잠을 잘못 잤어요. 그때는 스트레스를 연습으로 풀 때라, 더 지쳤죠. 스스로 조금 편하게 놓아줬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많이 돼요.”

 

장종훈은 압박감마저 이겨냈다. 정규시즌 종료까지 단 2경기만 남은 1992년 9월 18일, 해태 신동수의 낮은 변화구를 받아쳐 기어코 대기록을 달성했다. 대전구장 중앙 전광판의 볼카운트 표시등을 맞추는 초대형 홈런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에 ‘40홈런 시대’를 연 장종훈은 다음 날 열린 시즌 최종전에서 또 한 방을 추가해 41홈런으로 대장정을 마감한다. (흥미로운 점 중에 하나. 당시 기준으로는 삼진도 꽤 당하는 편이었던 장종훈은 마지막 2경기에서 단 한 개의 삼진도 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1992년에 당한 삼진은 딱 99개. 첫 ‘시즌 100삼진’의 위기를 피한 것이다. 최초의 100삼진은 1995년 김상호와 강영수, 박경완이 함께 기록한다)

 

“그때 생각하면 아찔해요.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그 심정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 뒤에 제 기록을 넘어선 이승엽, 박병호 같은 후배들을 정말 존경해요. 저보다 더 큰 압박감을 이겨내고 50홈런을 친 거잖아요.”

 

▲ 1992년에도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장종훈과 그해 신인왕 염종석 / 사진 출처=KBO

 

4. 부상과의 싸움, 첫 우승의 감격

 

절정의 시간이 끝난 뒤, 공허가 찾아왔다.

 

“목표를 이루고 나니까 허탈하더라고요. 온 몸에 힘이 빠져 나가는 느낌? 마음이 허해지니까, 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라고요. 1993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스프링캠프를 했는데, 왼쪽 무릎에 탈이 났어요. 런닝을 하나도 못했어요. 그때 몸의 밸런스가 깨졌던 것 같아요.”

 

한 번 시작한 부상은 잔인할 정도로 줄줄이 이어졌다. 1993년 시즌 중반 수비를 하다가 허리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갔다. 1994년 5월에는 슬라이딩 도중 발목 인대가 손상됐다. 무릎과 허리, 발목에 차례로 이상이 생기자 스윙이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아팠던 팔꿈치가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는 팔꿈치가 아파서 연습하다가 운 적도 많았어요. 그때부터 굽은 팔꿈치가 펴지지를 않아서 굽은 채로 살았어요. 그때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해서 치료도 포기하고 살았죠. 그러다가 94년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팔꿈치 통증이 심하게 재발했어요. 그나마 이번에는 원인을 찾고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었죠.”

 

▲ 장종훈도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화 시절의 장종훈 / 사진 출처=KBO

 

수술을 앞두고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강병철 감독은 장종훈을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2대 0으로 뒤진 2차전 5회, 투아웃 2루 기회에서 장종훈을 대타로 투입했다. 제대로 스윙을 할 수 없는 최악의 컨디션이었지만, 장종훈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김응용 해태 감독이 장종훈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이정훈과 승부를 택했다. 이정훈은 2타점 2루타를 터뜨려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고, 결국 이 경기를 잡은 한화는 사상 최초로 포스트시즌에서 해태를 누르고 지긋지긋했던 ‘호랑이 공포증’을 떨친다.

 

팔꿈치 연골 변형조직을 깎아내는 수술 이후, 장종훈은 부침을 겪었다. 1995년 다시 골든글러브를 받고 한일 슈퍼게임의 4번 타자도 맡았으며 1996년, 최초의 ‘연봉 1억 원 타자’에도 등극했지만, 리그를 평정하던 ‘불세출의 홈런왕’으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양준혁과 이승엽, 이종범과 박재홍 등 후배들에게 리그 간판타자의 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장종훈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1999년 찾아온다. 다섯 번째 도전 만에 맛본, 한국시리즈 첫 우승의 감격이다.

 

“이전에 한국시리즈 4번을 치르면서 홈런을 하나도 못 쳤어요. 신문에는 ‘장종훈이 못 해서 졌다’는 기사가 쏟아졌고요. 내가 반드시 쳐야 한다는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어요. 1999년은 달랐어요. 혹시 내가 못 쳐도 데이비스, 로마이어, 송지만, 이영우, 강석천 같은 동료들이 해결할 수 있었어요. 동료들을 믿고, 내 몫만 하자고 편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어요.”

 

마음을 비운 장종훈은 1999년 포스트시즌 내내 결정적인 활약을 펼친다. 현대와 플레이오프에서 3차전 만루홈런을 포함해 4경기에서 무려 13타점을 쓸어담아 한국시리즈행을 이끈다. 롯데와 한국시리즈에서도 2차전 결승 적시타와 2루타, 3차전 2타점 동점 적시타, 4차전 6회 결승 희생플라이를 차례로 터뜨렸다. 마지막 5차전의 주인공도 장종훈이었다. 한 점 뒤져있던 9회초 로마이어의 동점 3루타에 이어진 원아웃 3루 기회에서, 롯데 문동환의 몸쪽 낮은 직구를 받아쳤다. 홈런 욕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승리만을 생각한 가벼운 스윙. 이 스윙에는 장종훈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제 스윙은 언제나 ‘레벨 스윙’이었어요. 홈런을 노리고 무리하게 올려치려고 하지 않고, 무리하게 잡아당기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라인드라이브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타구 방향도 투구의 코스에 따라 자연스럽게 보내려 했어요. 그래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우타자 치고는 중월, 우월 홈런도 많은 편이었어요.”

 

타구는 조금 짧아보였지만, 3루 주자 로마이어는 과감하게 홈으로 출발했다. 롯데 우익수 호세가 혼신의 힘을 다해 홈으로 송구했지만 방향이 빗나갔다. 한화의 사상 첫 우승을 확정하는 역전 결승점의 순간이었다.

 

▲ 은퇴식에서의 장종훈. 그의 35번은 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사진 출처=KBO

 

2000년 10월 6일, 두산과 더블헤더 1차전에서 장종훈은 사상 최초로 통산 300번째 홈런을 기록한다. 2001년에는 통산 1000타점, 2002년에는 1000득점과 3천 루타의 위업을 차례로 달성한 뒤 2005년 성대한 은퇴식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난다. 장종훈이 처음 오른 고지에는 이후 후배들의 발자국들이 새겨지지만, 치열한 노력으로 길을 만든 ‘첫 정복자’의 이름은 역사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박제돼 있다.

 

이성훈 기자 / SBS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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