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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⑧ '외길 농구인생의 이단아' 유희형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0.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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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2. 25

 

한국농구의 속공 시대를 처음 열면서 최초의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라는 평가를 들은 유희형. 송도중, 송도고를 나온 그는 명문대 입학도 포기한 채 실업팀으로 첫 성인 농구에 발을 내딛으며 일찌감치 대표팀에 발탁된다. 184cm였던 그는 역대 최고의 가드라는 찬사를 받으면서도 수비에서는 리바운드부터 블록슛까지 센터 역할도 문제없이 소화해낸 전천후였다. 유희형은 가드 계보를 새롭게 열며 외길 농구 인생을 걸어 온 한국농구의 이단아(異端兒)아였다.

 

Q. 처음 농구공을 잡게 된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주세요.

 

충북에 있는 현도초등학교라고 두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시골에서 자랐지. 4학년 때부터 단거리 육상 선수로 운동을 시작했어. 청원군 내에 한 10개 정도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를 우승시켰을 만큼 내가 가장 잘 뛰었었지. 그렇게 운동하고는 인연을 맺은 것 같아.

Q. 중학교는 인천으로 진학을 하셨잖아요.


보통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전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는데, 우리 집이 형편이 좋지 않아 통학이나 하숙은 힘들었어. 그래서 출가한 큰 누나가 있는 인천으로 옮기게 됐지.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는데, 시골 학교에서 우등상 받아봤자 소용없더라고. 인천중학교에 시험을 받는데 바로 낙방이더라고. 그래서 송도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된 거지.

Q. 송도중학교에서 바로 농구부에 들어가신 건가요?


집이 어렵다보니까 어떻게든 학비를 면제를 받아야 하는데, 공부를 잘 해서 받기가 쉽지 않더라고. 우열반으로 나뉘던 시절이어서 우등반에 들어가긴 했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운동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지. 원래 달리기는 잘 했었으니까.

Q. 그러면 농구와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게 되신 건가요?


당시 송도중에는 농구부, 유도부, 핸드볼부 3개가 있었어. 마른 체형이었던 내가 유도부에는 들어갈 수 없고, 핸드볼보다는 신체 조건상 농구부가 낫겠더라고. 그 때 농구부를 맡고 있던 민병준 선생이 ‘한 번 해보지 않을래?’라고 하면서 제의를 하신거지. 전교에서 달리기도 가장 빠른데다 하체도 길고 하니까 그랬던 것 같아.

Q. 육상 특기를 살리기 농구가 좀 안 맞았던 거 아닌가요?


그때 내가 달리는 운동을 했으면 아마 더 잘했을 거 같기도 해. 예를 들어 축구 같은 것을 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하. 농구부를 하면서 중학교 3학년 때 100m 대회를 나가봤는데, 이미 농구를 해서 그런지 높이 뛰는데 익숙하다보니까 발이 좀 느려졌더라고.

Q. 그러면 농구에 가장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언제였나요?


중학교 3학년 때였지. 1963년 전국체전을 나갔는데, 김영기 씨가 실업팀으로 나와서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 오른손, 왼손 드리블을 자유자재로 하는데다가 비하인드 백패스나 가랑이 사이로 드리블(크로스오버 드리블)을 여러 차례 선보이는 거지. 그 때부터 농구에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아.

 

Q. 전규삼 선생님과 만난 건 언제신가요?


송도중학교 1학년 말에 전규삼 선생님이 오셨지. 원래는 교감을 맡으셨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셨지. 그래서 화가 좀 나셔서 집에서 쉬고 계셨던 것 같아. 그런데 마침 농구부 코치가 없었던 거지. 그 때부터 전 선생님이 무료로 와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어. 그리고 2년 뒤 중학교 3학년 때 63년 전주에서 열렸던 전국체전에서 한영중학교에서 져서 처음으로 준우승을 했지.

Q. 전규삼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걸로 알고 있어요.


농구하면서 운이 정말 좋았던 기억이 몇 가지 있는데, 전 선생님을 만난 것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전 선생님이 훌륭하신 것은 운동을 무조건 수업을 마친 후 오후 2시 이후에 시키셨다는 거지. 수업 듣기에 너무 졸리고 힘들어서 졸지 않기 위해 교탁 맨 앞자리에 일부러 앉아서 공부를 하려고 노력했었지. 운동하면서 세 가지 금지령을 내리셨는데, 술, 담배 그리고 여자였어. 그래서 지금도 담배는 피워본 적이 없지. 그만큼 기본적인 것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셨던 거야.

Q. 농구에서는 어떤 점을 가장 많이 배우신건가요?


송도하면 빠른 속공이 유명했지. 리바운드 이후 처음 나가는 아웃렛 패스가 중요한데, 바닥에 발이 닿기 전에 패스가 나가야 했었어. 공이 손에 닿으면 무조건 반대쪽 림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연습을 시키신 거야. 첫 패스에 시야를 더 넓고 빠르게 보게 하기 위해서지. 그 때는 끊임없이 움직이게 해서 드리블을 아예 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으니까. 리바운드에서 내려오기 전에 패스, 패스, 패스하면 득점이었어. 서울에 있던 코치들이 깜짝 놀라 당황했었지. 허허.

Q. 중고등학교 때 연습은 어떻게 하셨나요?


일단 쉬는 날이 거의 없었어. 전 선생님이 출석체크는 확실히 하셨으니까. 명절이나 휴일에도 집에서 놀면 뭐해. 무조건 놀아도 체육관에서 드리블하면서 노는 거였지. 쉬는 날 나가면 전 선생님이 이것저것을 가르쳐주셨어. 새벽에도 남들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와서 연습하고 그랬지.

Q. 드리블 연습을 위해 오른쪽을 팔을 묶고 생활을 했다고도 하시던데.


가끔 며칠씩 그렇게 했었어. 왼손 드리블을 능숙하게 하려면 왼손으로 밥도 먹고, 양치질도 할 정도가 되어야 하니까. 전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지.

Q. 전국체전 우승은 언제 처음 하신 건가요?


1965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곽현채가 있던 여수고를 꺾고, 지방 팀으로서는 처음 우승을 했지. 다음해 66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김병원 등 장신 군단이 버티던 성북고를 누르고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했어. 그 땐 우리가 휩쓸고 다녔지.

Q.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매청으로 들어가셨잖아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컸지.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개인적으로 운동화도 사주시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스카우트 비용 같은 게 없어서 한 명을 스카우트 하면 다른 선수를 함께 데려가는 식이었지. 송도고 콤비였던 서상철이 한 명을 데리고 고려대로 진학했고, 난 실업팀을 선택했지. 당시 실업팀은 산업은행, 기업은행, 한국은행, 전매청 이렇게 4개밖에 없었어. 그런데 은행팀은 한 명만 데려갈 수 있고, 전매청(재무부에 속하여 전매에 관한 사무를 당당하던 기관. 1988년 한국담배인삼공사로 명칭 변경)은 세 명을 데려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전매청을 택한 거지.

Q. 전매청으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던 거네요.


우리가 가면서 전매청에 있던 나이 든 선수들을 모두 은퇴시켰어. 그때가 1967년 1월이었는데 세대교체를 한 거지. 거의 10명을 새로 뽑으면서 재창단식을 한 거나 다름없지. 그리고 내가 그 해 말에 대표팀에 발탁이 됐어.

Q. 학벌 관계가 심할 때였는데, 대표팀 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전 선생님이 그랬듯 또 한 번의 운이 찾아온 거지. 당시만 해도 연·고대 출신 아니면 대표팀에 뽑히기 힘들었지. 게다가 나같이 어린 선수가 베스트로 절대 들어가지 못하는 시대였어. 그런데 가스 폴 코치가 나를 불러준 거지. 그리고 곧바로 베스트 멤버로 발탁된 거야. 가스 폴 코치를 만난 건 내 농구 인생의 또 한 번의 기회였던 셈이지. 그 당시 가스 폴 코치가 아니었다면 대표팀은 꿈도 못 꿨을 거야.

Q. 그 시기에 외국인 코치가 있었다는 게 생소한데요.


우리 국민소득이 낮을 때였으니까 농구협회에도 돈이 없을 시대잖아. 선진 농구를 가르칠 수 있는 코치가 필요했는데, 미8군에서 제대로 찾기 시작한 거지. 그 때 미국에서 정식으로 대학까지 농구 선수를 했던 가스 폴 코치를 찾아낸 거야. 가스 폴 코치가 한국농구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지.

Q. 그래도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아쉬울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가도 연·고대 출신 선수들은 후원회에서 나와 밥도 사주고 그러는데, 나처럼 대학 연고가 없는 선수는 서러울 수밖에 없지. 그래도 어려서부터 소풍도 안 가고 평생을 농구에 미쳐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

Q. 그래서일까요? 다른 농구선수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어요.


나 스스로도 다른 농구선수와는 다른 특이한 농구 인생을 걸었다고 생각해. 명문대를 못 들어갔지만, 단국대 야간을 들어가서 경제과를 졸업했고, 한국체육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이수했지. 70년대 중반까지 전매청은 관에서 주관했었는데, 삼성, 현대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81년 중앙부처 체육부가 생기면서 젊은 체육인이 필요했던 거야. 실업팀 감독 제의도 받았지만, 시한부라 판단하고 공직으로 들어갔지. 올림픽 조직위원회에도 있었고, 농구선수로서는 유일하게 공무원 4급 서기관까지 지냈지. 공직에서만 33년 있으면서 공무원 봉급 외에는 우승 보너스도 받아본 적이 없어. 오로지 사명감 하나로 농구를 했었지. 좀 다른 길을 걸었지? 허허.

 

Q. 고등학교 졸업하고 혹독한 개인훈련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누나 집에 있으면서 1년 내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뒷산을 뛰어 올랐지. 그 때 거의 서전트 점프가 20~30cm는 늘어난 것 같아. 스피드와 체력이 그 때 엄청 늘었던 것 같아. 어렸을 때 시골에 있을 때도 십리가 넘는 길을 바람막이 하나 없이 뚫고 뛰어서 등하교를 한 것도 체력에 많은 도움이 됐었고….

Q. 선수 시절 현지에서 미 프로농구(NBA)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도 들었어요.


1968년이었을 거야. 윌트 체임벌린하고 빌 러셀, 제리 웨스트가 뛰던 시절이었는데, 빌 러셀이 블록슛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지. 웬만한 페이크에는 속지도 않고 상대 손에서 공만 떨어지면 멀리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블록슛을 해내는 거야. 순발력과 점프력이 엄청 좋았던 거지. 그때 경기를 보고 한국에 들어와서 블록슛을 경기당 4~6개씩은 했을 거야. 키가 작은데도 블록슛을 잘 했다는 소리를 들었지. 당시 조동재 씨가 나를 보고 “넌 관찰력이 참 좋은 선수야”라고 할 정도로 미국 가서 유심히 관찰을 해서 얻은 소득이었지.

Q. 1968년 1월에 미국 전지훈련을 갔는데, 당시 여건상 미국으로 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미8군 사령관에게 대표팀 전지훈련을 가는데 공짜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편지를 넣어서 어렵게 허가를 받았던 거야. 그런데 일이 꼬였지. 공교롭게 1968년 1월 24일이 출국하는 날이었는데, 3일 전인 21일에 김신조 사건이 터진 거야. 미국 첩보함마저 북한에 납치되면서 북한을 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 미군 비행기를 우리가 탈 수 없었던 거지. (※ 김신조 사건 :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Q. 그럼, 어떻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신 건가요?


그 시간에 우리는 미군 비행기 타기 위해 일본 공항에서 대기한 채 몇 시간 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거든. 우리가 미국을 꼭 가겠다고 고집하니까, 어떤 비행기라도 상관없겠냐고 하는 거야. 그래서 대형 수송기 짐칸에 5명이 먼저 타고 출발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그 뒤에 따로 오게 된 거지.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미국에서 대학 디비전 3~4에 해당하는 팀들과 경기를 가졌는데, 11경기 중 단 2경기만 이기고 9패를 기록하고 돌아왔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삐쩍 말랐었는데, 미국에서 50일 동안 있으면서 무려 7kg이 찌더라고.

 

Q. 대표팀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었다면요.


1969년, 1970년 우승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지. 그때 김영기 씨가 감독을 하셨고, 내가 대표팀 말단이었지. 궂은일은 내가 다했다고 보면 돼. 코트를 휘젓고 다니면서 리바운드 잡고 속공하고…. 그 때 멤버가 정말 좋았지. 신동파 씨가 슛 넣고, 김인건 씨가 안정적인 가드를 맡고, 이인표 씨가 돌파, 김영일 씨가 찬스를 만드는 역할을 했었어. 190cm가 넘는 선수가 한 명도 없었는데도 3년 간 아시아 전성시대를 열었던 거지.

Q. 막내라서 아무래도 플레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겠어요.


농담이지만 슈터가 많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선배인 신동파 씨가 공을 달라고 해서 주면 이인표 씨가 뭐라고 하고, 이인표 씨한테 주면 신동파 씨가 뭐라 하는 그런 상황이었지. 나는 슛 던질 엄두도 못 냈지. 허허.

Q. 1974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아쉽게 은메달을 땄잖아요?


그 당시 곽현채 씨와 내가 최고참 급이었는데, 밑으로는 김동광, 최경덕이 있었지. 중국과의 준결승전이 정말 대단했어. 경기 종료 8분 전까지 15점이나 지고 있었는데, 작전타임 때 “이렇게 얌전히 질 바에는 지더라도 뭔가 보여주자”라고 의지를 모았어. 그때부터 한 점 한 점 따라붙어서 경기 종료 11초를 남기고 한 점차까지 따라붙었어. 중국 공격이었는데, 사이드에서 패스하는 것을 내가 날라서 가로채기에 성공한 뒤 드라이브 인을 시도하는데 중국에서 반칙으로 끊었지. 그런데 자유투 두 개 중 한 개만 성공해 연장을 들어간 거야.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연장전 11점 중에 내가 혼자 8~9점을 넣어 역전승을 거뒀지. 결승에선 이스라엘에 패해서 은메달에 머물렀지. 이스라엘까지 이겼어야 했는데, 정말 아쉬웠지.

Q. 태릉선수촌에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차범근이 축구대표팀에 들어왔는데, 축구에서는 차범근이 가장 빨랐거든. 그러다보니 주위에서 공개적으로 시합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야. 그때 이인표 씨를 비롯해 김호, 김정남 감독이 옆에서 계속 부추겼지. 그래서 결국 했는데 내가 11.7초를 기록하고, 차범근이 11.4초를 기록해서 내가 졌지. 차범근은 나보다 한 참 어렸으니까, 정말 잘 뛰더라고. 허허.

Q. 당시 슈터들이 많아 슛 내기도 자주 했을 것 같은데요.


태릉선수촌에 있을 때 훈련이 끝나면 항상 슈팅 연습을 100개씩 했었는데, 아마 지금 3점슛 거리보다 더 멀었을 거야. 신동파, 김인건 씨만 평균적으로 거의 90개 이상 넣었고, 나는 87~88개 정도 기록했던 것 같아. 자유투는 거의 실수가 없었다고 보면 돼. 자유투 시합에서 연속으로 88개까지 넣었던 기억이 나네. 슛 연습도 목표를 정해놓고, 체육관 벽에 매일 그래프를 그려가며 체계적으로 연습을 했었거든.

Q. 선수 시절 별명은 없으셨나요?


힘이 좋다고 ‘황소’라는 별명도 있었고, 신동파 씨가 머리가 노랗다고 해서 ‘황두’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었지. 그런데 황소가 머리가 별로 좋은 동물이 아니잖아?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어. 허허.

Q. 1978년에 대표팀에서 간염으로 은퇴를 하셨잖아요?


1977년 말부터 병을 키운 것 같아. 방콕 아시안게임을 끝내고 12월에 또 전매청 경기가 이어서 있었거든. 대표팀보다 전매청에서는 내가 뛰는 양이 오히려 더 많았으니까, 체력이 바닥나 있었지. 그런데 다시 한국에 와서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가서 뛰다가 일이 난거야.

Q. 어떤 증상이 있으셨던 건가요?


외출했다가 오는데 눈 흰자가 노랗다고 누가 그러는 거야. 일주일동안 채한 증상인 줄 알고, 일반 약만 먹었는데 계속 운동을 하다보니까 더 심해진 거지. 몸 전체가 노랗게 됐을 정도였으니까. 대표팀에서 나와 병원에서 1개월 이상 입원을 했었지. 그 후에도 삼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는데, 겁나서 그만 뒀지.

Q. 아쉬움도 많았겠어요.


과로로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쉬움이 남지. 그때 간염에 안 걸렸으면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에서 대우 받으며 선수생활을 더 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들고. 국내 지도자 생활도 못 해봤는데,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유희형은...


한국 가드 계보를 연 유희형은 1949년 충북 청원군 출생으로 송도중·고를 거쳐 전매청에서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시작으로 대표팀에 발탁된 그는 1969년 ABC 대회를 비롯해 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이끌어내는 등 1978년까지 대표팀으로 맹활약했다. 단국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한국체육대학에서 석·박사를 이수한 그는 1982년부터 체육부 및 체육청소년부, 문화체육부,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근무했고, KBL 심판위원장 및 KBL 경기 이사를 역임했다. 1983년부터 5년간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농구코치로 지냈고, 1984년부터 1997년까지 KBS 해설위원을 맡기도 했다.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및 마천청소년수련관장을 맡았던 유희형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를 거쳐 2014년 KBL 심판위원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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