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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⑦ 아시아를 울린 전설의 슈터 신동파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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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02. 18

 

1972년 필리핀 외딴 섬 민다나오. 전설의 슈터 신동파는 우연히 만난 민다나오 농구협회 회장의 부탁에 김영기 감독의 기업은행 선수단과 함께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그들이 민다나오 섬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를 둘러싸고 있던 것은 기관총으로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었다. 그 뒤편에는 수백 명의 환영객들이 있었다. 이들은 ‘Welcome to 신동파’라는 문구가 가슴에 적힌 흰 티셔츠를 입고 신동파를 연호했다. 단지, 한국에서 온 한 농구선수를 맞이하기 위해 에스코트와 카퍼레이드까지 준비한 농구를 사랑하는 섬이었다. 신동파, 그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Q. 처음 농구공을 잡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야구를 좋아하셨다고 들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야구선수가 꿈이었어. 1957년에 휘문중 1학년 야구부로 들어갔는데, 키는 큰데 몸은 약한 편이어서 2개월 정도 하다가 감독 선생님이 부르더니 야구는 몸이 튼튼해야 한다는 거야. 뭐, 쫓겨난 거지. 너무 실망이 커서 야구장을 등지고 아예 운동장도 외면하고 다녔어. 한 달 정도 지났나? 전교생이 조회를 하느라 운동장에 줄을 서 있는데, 농구부장이 등을 딱 치면서 나오라는 거야. 운동하는 거 없으면 내일부터 농구부로 나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때 키 큰 사람 위주로 30명 정도를 뽑았는데, 야구부에서 쫓겨난 것에 실망도 해서 홧김에 시작했던 것 같아.

Q. 부모님 몰래 운동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처음에는 공만 줍는 거였으니까, 선수가 아니었지. 그런데 1년 정도 지나니까 농구가 좋아지더라고. 집에서는 내가 운동하고 와서 지쳐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쓰러져 잠만 자니까 반대를 했던 거지. 외아들이었으니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많이 안쓰러웠을 거야. 부모님이 감독 선생님을 찾아가 반대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 뒤로 몰래 계속 농구를 하다가 예전 장충 노천 체육관에서 정식으로 농구하는 모습을 보고 허락해 주셨지.

Q. 야구를 했으면, 한국야구계에 한 획을 그으신 것 아닐까요?


허허. 잘 모르겠지만, 가끔 ‘야구를 계속했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을 하긴 해. 내 운동 신경 자체가 좀 정확한 편이라서 만약 했으면 투수를 하지 않았을까. 농구를 하면서도 야구가 좋아 동대문운동장에서 고교야구를 보러 가거나 MBC 청룡 경기를 보러 갔었지. 지금도 야구 중계를 더 많이 볼 정도야.

Q. 본격적으로 농구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구기 종목 중 공이 가장 큰 게 농구잖아. 그런데 집어넣는 구멍은 정말 작아. 그 큰 공이 림이나 백보드도 안 맞고 클린 샷으로 들어갈 때, 그물을 가죽공이 스치는 소리가 난 들렸거든. 나만 느낄 수 있는 그 매혹적인 매력에 빠져 버린 거지.

Q. 190cm면 당시 센터 키와 별 차이가 없는데, 어떻게 슈터를 할 수 있으셨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센터 겸 포워드를 봤었지. 농구에서 센터는 피곤한 선수야. 야구의 포수나 축구의 골키퍼와 같이 공헌도는 높은데, 빛은 나지 않는 포지션이거든. 골 밑 한 가운데서 플레이를 하니까, 부상도 가장 많고… 그래서 느꼈지. ‘내가 가야 할 길은 포워드다’라고. 외곽으로 나오면서 센터는 완전히 잊어버렸어.

 

Q. 한국역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셨는데, 당시 나이가 17살이었잖아요?


1962년이었으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에 선발됐지. 그 나이에 대표선수는 그때도 처음이었고, 아마 지금까지도 없을 거야. 태릉선수촌(1966년 건립)이 생기기 이전에 동숭동(현 대학로)에 선수촌이 있었거든. 김영기(前 KBL 총재) 씨가 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었을 때니까, 내가 최고 말단이었지.

Q. 어린 나이에 부담도 많이 되셨을 것 같은데요.


내가 휘문고 시절에 김영기 씨가 공군 농구단 소속이었거든. 그 당시 연습 경기만 해도 선망의 대상이 됐었던 분이니까, 대표팀이 돼서도 감히 함께 뛴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불편하고 어려웠지. 선배들이 시키기 전에 알아서 심부름 같은 건 다 했었지. 김영기 씨와는 8년 터울인데, 그 분 전성기 때 난 대학생이었으니까 3년을 같이 대표팀 생활을 했었지.

Q.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이 있었다면 언제이신가요?


연세대 4학년 때가 기억에 남아. 그 당시 멤버 5명(신동파, 김인건, 하의건, 방열, 김영일)이 모두 국가대표였거든. 실업팀이 함께 했던 국내 경기에서도 무조건 전승이었지. 국제대회는 1967년 제4회 서울 ABC 대회에서 처음 준우승을 하면서 아시아 베스트5에 들었을 때가 기억에 남고, 역시 69년 필리핀 경기를 잊을 수가 없어.

 

Q. 1969년 방콕 ABC 대회는 지금도 많이 회자되는데, 결승전 이야기 좀 해주세요.


당시에 10개국이 풀리그를 펼쳤는데, 필리핀과 한국이 8전 8승씩을 거둔 상황이었지. 그때까지 필리핀이 아시아 최정상이었거든. 우리가 한 번도 필리핀을 꺾은 적이 없었어. 1967년에도 3점차로 져서 아쉽게 2위를 했었거든. 69년 당시 주전이 김영일, 이인표, 나, 김인건, 유희형이었는데, 아직도 95-86으로 꺾고 우승한 점수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야. 그 게임에서 내가 50점을 넣었는데, 3점슛이 없던 시절이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20점은 더 추가해야 될 거야. 주로 3점슛 위치에서 슛을 던졌거든. 사실 슛 성공률은 70~80% 정도 됐지만, 필리핀 관중이 느끼기에는 백발백중으로 느껴졌을 거야. 지금 내가 생각해도 안 들어간 게 기억이 안 나니까….

Q. 아시아 정상을 차지하고, 한국 분위기도 대단했겠어요.


한국은 칼라 TV도 잘 없던 시절이라 KBS 이광재 아나운서가 실황 라디오 중계를 했지. 아버지가 그 경기를 녹음해 놓으셨는데,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시작해서 "대한민국의 아들 신동파가 조국에 한 점을 바치는 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걸 듣는 순간 소름이 다시 돋더라고.

 

▲ 1969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1면 / 신동아

 

Q. 필리핀에서도 영웅이 되셨잖아요?


산업은행이 대회가 끝나고 5~6개월 뒤에 전지훈련을 필리핀으로 갔었는데, 그때까지 방송에서 재방송을 틀어주고, 스튜디오에 MC와 전문가가 나와 슬로우 비디오로 내 슛 동작을 보여주며 팔의 각도까지 재가며 설명을 했다고 하더라고. 당시 농구가 최고 인기 종목이라 필리핀은 중계차까지 놓고, 위성 실황 중계를 했거든. 필리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난리가 난 거지.

Q. 필리핀에서 에피소드가 정말 많았겠어요.


에피소드 얘기하면 밤을 새도 모자라. 1971년이었나? 필리핀에서 항공료를 제외한 모든 경비를 지원하겠다며 한국 실업팀을 초청한다는 공문을 보냈더라고. 그런데 마지막에 ‘단, 신동파가 있는 팀이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었지. 사실 8게임을 하는데, 게임당 1천불을 받고 했으니까, 사실상 항공료도 들지 않은 거지. 그때 필리핀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는데, 깜짝 놀랐어. 기자들과 현지 팬들이 가득 넘쳐났거든. ‘정말 대단한 나라구나’라고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은퇴(1973년)할 때까지 3년간 초청 게임을 했었지.

Q. 그 정도면 필리핀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있지 않았나요?


필리핀에 리또뿌얏 씨라는 재벌이 있어. 필리핀은 흑인도 두 명씩 뛰는 프로 구단이 있을 때였는데, 미국인보다 더 높은 액수로 부와 명예를 주겠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계속 거절을 했더니, ‘기업은행이 그렇게 좋냐’는 거야. 그러면서 필리핀에서 제일 컸던 마닐라 은행에 농구팀을 만들어 각 팀에서 잘하는 애들을 뽑아 오겠다는 거야. 한 세대나 밑인 차범근만 해도 서독 분데스리가 진출하는데, 국민적 도마에 올랐을 시대라 난 해외진출은 꿈도 못 꿨지. 지금도 필리핀 가면 그 분하고는 술 한 잔 하는 사이가 됐지. 허허허.

 

▲ 申東坡의 활약상을 보도한 필리핀 잡지들 / 월간조선


Q. 필리핀에서는 ‘신동파’라는 신조어도 생겼었다고 들었습니다.


‘행운’이나 ‘성공’이란 의미로 쓰인다고 들었어. 골프를 치다가 퍼팅이 들어가면 ‘신동파’, 일이 잘 되도 ‘신동파’라 한다더라고. 필리핀 어떤 농구선수는 ‘신동파룡’인가로 계명을 해서 슛이 더 잘 들어간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Q. 필리핀이 그래도 어웨이 경기인데, 심판들의 편파 판정도 심할 때 아닌가요?


그럴 때긴 하지. 그런데 희한한 게 내가 뛸 때는 편파 판정이 없었어. 오히려 내가 이득을 볼 정도였지. 내가 평균 40점 이상은 꼭 넣었으니까. 한국에서는 내가 항의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거기서는 항의도 전혀 안 하고 이미지 관리하느라 파울 불면 바로바로 승복을 했지. 그러니까 그 쪽 심판은 내가 조금만 할리우드 액션을 해도 파울을 불어주더라고. 그리고 다음 날에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오는 거야. ‘신동파의 매너를 배워라’라고. 허허허. 필리핀 애들이 워낙 거칠게 농구를 하는 스타일이었거든. 한 번은 내가 드라이브 인을 하다가 상대 수비에 밀려 기자들 앞으로 넘어졌는데, 카메라 플래시가 막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 상황에 어떻게 일어나나? 조금 더 누워 있었지. 그랬더니, 필리핀 관중들이 바나나 껍질하고 쓰레기를 필리핀 벤치에 던지는 거야. 나한테 파울 한 선수 빼라고. 그러다 내가 일어나서 묘기라도 부리며 드라이브 인을 성공시키면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정말 대단한 나라라니까.

Q. 필리핀에 대한 향수가 남다르시겠어요.


그럼 당연하지. 필리핀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대우를 너무 잘해줘서 더 조심스러워 지기도 하고. 제2의 고향 같이 푸근한 느낌이랄까?

 

Q. 그래도 후회가 남는 경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기억도 있으신가요?


1967년 제4회 서울 ABC 대회에서 필리핀에 3점차로 졌을 때 베스트5에는 들었지만, 결승전에서 실패를 했지. 그 전까지 매 경기마다 40점 가까이 득점을 했었는데, 결승에서 단 10점밖에 넣지 못했거든. 예전에 김영기 씨를 수비하던 오캄포라는 수비수였는데, 선배 은퇴 후 나를 수비했어. 거머리 같은 수비수였는데, ‘뭐, 이런 놈이 있나’ 할 정도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더라고. 후반에 하도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나서 일부러 5반칙을 하고 벤치로 나왔어. 나한테는 치욕적인 경기였지. 게임 끝나면 밥도 같이 먹는 사이지만, 코트 위에서는 눈까지 충혈이 돼서 드라큘라처럼 징그러운 존재였거든.

Q. 그 대회 이후에 다시 만나진 않으셨나요?


그때 오캄포에게 당한 뒤 느꼈지. ‘슈터지만, 다른 것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어차피 아시아 대회에서는 계속 만나야 될 선수이니 계속 당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볼 잡은 후 피벗부터 스텝, 슛 올라가는 것까지 몇 달 동안 혼자 개발하고 훈련하면서 터득했어. 결국 1971년 마닐라에서 기업은행 소속으로 다시 만났는데, 경기가 있기 전부터 신문 제목이 ‘오캄포와 신동파 드디어 만나다’였지. 오캄포는 이코(YCO)라는 필리핀 2위 팀 소속이었는데, 후반에 5반칙으로 오캄포를 내쫓고 40점 정도를 넣었어. 다음 날 필리핀 신문 기사 제목이 ‘오캄포, 이젠 너무 늙었다’였지. 그 선수 때문에 내가 개인 기술을 익힐 수 있었으니까, 농구 은인인 셈이지.

Q. 100개 중 99개 성공이라는 신화 같은 실화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딱 한 번 3점슛 거리 정도에서 점프슛 100개를 던져 88개째 단 한 개를 실패하고, 99개를 성공시킨 적이 있지. 아마 이충희가 99개를 넣고, 그 뒤로는 아무도 없었을 거야. 그때 한 개를 실패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몇 차례 다시 시도했었는데, 다 넣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98개만 몇 번 기록하고, 결국 100개를 다 넣지는 못했어. 농구는 축구랑 야구와 달라서 손끝에 공 가죽이 직접 닿기 때문에 부담이 느껴지면 그대로 전달이 되거든. 야구는 빗맞아도 안타잖아. 농구는 그런 게 없는 정교한 스포츠지.

Q. 최고의 슛도사라는 찬사가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투 핸드로 슛을 쐈어. 그 당시는 투 핸드로 쏘는 선배들이 많았거든.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원 핸드로 슛 폼을 바꾸는데, 6개월 정도가 걸렸어. 고등학생 시절 내내 팀 훈련 별도로 500개씩 매일 슛을 쐈지. 대학에 입학해서는 300개, 실업에서는 100~200개로 횟수를 줄였지. 슛이라는 게 감이 더 중요한 거거든.

 

[SIDE STORY] 결승전에서 50점…필리핀의 우상으로


연세대-기업은행 출신의 신동파는 득점기계로 이름을 알렸던 한국 농구의 대스타였다. 특히 196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ABC대회(FIBA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신동파는 결승전 상대였던 필리핀 전에서 무려 50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당시 필리핀은 아시아 농구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강팀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신동파의 활약을 앞세워 필리핀을 95-86으로 꺾고 대회 정상에 올랐다. 이때부터 필리핀 국민들에게 신동파는 경외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신동파의 이름을 딴 가게가 등장했고, 아직도 신동파는 ‘복’이나 ‘행운’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기자를 지도했던 필리핀 국립대학 테사 자스민 교수(스포츠 언론 전공)는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6~70년대 농구를 봤던 사람들 중에서 신동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절대 막을 수 없는 한국의 농구선수였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신동파와 카를로스 로이자가와 많이 비교하곤 한다. 로이자가는 1952년과 1956년 올림픽에 출전한 필리핀의 농구 영웅이다. 포지션은 센터. 4차례 아시아게임 금메달(1951, 1954, 1958, 1962)을 차지하기도 했다.

필리핀의 베테랑 농구기자인 알베르토 라미레즈 씨는 신동파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라미레즈 씨는 “당시 신동파는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농구선수였다. 엄청난 정확도를 자랑했고, 슛을 던지는 동작도 다양해 쉽게 막을 수 없었다. 6~70년대에는 3점슛 규칙이 없었다. 그래서 최근 농구 경기와 비교해 팀 득점이 평균 30점 정도가 낮았다. 만약 신동파가 3점슛도 던졌다고 한다면, 점수가 얼마나 늘어날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969년도 ABC대회 내내 한국팀을 이끌었다. 상대 수비수들을 간단히 제압하는 그의 플레이가 생각이 난다. 에드가르도 오캄포, 로베르토 자워스키 등 필리핀 최고의 수비수들이 190cm나 되는 신동파를 막으려고 했지만, 상당히 힘들어했다. 신동파는 드리블과 점프, 슛 등이 단순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한국농구의 대스타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공격력을 따라갈 선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 필리핀 잡지에 실린 申東坡 의 캐리커처들 / 월간조선

 

[SIDE STORY] 박한 부회장이 기억하는 신동파


신동파는 1969년 ABC대회에 앞서 1964 도쿄올림픽, 1968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도 활약한 바 있다. 1970년에는 유니버시아드 대표선수로 나서기도 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선 8경기 평균 32.6득점을 기록해 득점왕에 올랐다. 대한민국농구협회 박한 부회장은 “지금도 필리핀에 가면 신동파의 인기가 대단하다. 1969년 ABC대회 결승전 인기가 쭉 이어져 젊은 친구들까지 신동파를 알고 있다. 신동파는 당시 아시아 최고의 농구 스타이자 슈터였다. 신동파는 1969년 결승전에서는 50득점을 집어넣었다. 3점슛이 없을 때였으니 더욱 대단한 기록이다. 아시아에서 신동파를 상대할 선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키가 큰 데다 슛도 정확했다.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제칠 수 있는 개인기도 있었다. 신동파가 슛만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면 그런 기록을 달성할 수 없다. 상대 수비가 붙으면 돌파하고, 떨어져 있으면 슛을 던지는, 농구의 기본 전술을 완벽히 수행하는 선수였다. 또 한국팀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앞선에선 김인건이라는 좋은 가드가 있었고, 이인표도 뒤를 받쳤다. 작고한 센터 김영일도 피딩을 잘해 신동파의 득점을 도왔다”고 돌아봤다.

한국농구 슛쟁이의 계보는 그렇게 시작됐다. 1980년대에는 이충희와 김현준(작고)이, 1990년대에는 문경은이 넘겨받았다. 그러나 그 어떤 슈터도 신동파처럼 해외에서 국빈대접을 받으며 상징으로 자리하지 못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커녕 TV 중계조차 변변치 않았던 그 시절이었기에 ‘전설’이 더 대단하게 여겨진다. 한편 신동파는 1974년 은퇴해 태평양화학 농구팀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여자농구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SBS의 초대 감독도 맡았다. 대한민국농구협회 전무이사와 부회장으로도 일했다. 2014년에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우리 아버지 시대의 마이클 조던, 득점기계 신동파(허진석 저)」라는 책도 나왔다.

 

신동파는...


190cm의 장신슈터 신동파는 1944년 9월 2일 함경남도 안변 출생으로, 휘문중과 휘문고를 거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62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73년까지 활약했고, 69년과 70년에 ABC와 아시안게임 우승을 맛봤다. 67년부터 7년간 중소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그는 은퇴 후 태평양화학 감독을 16년간(75년~91년) 맡았다. 이후 91년부터는 SBS 감독 및 총감독을 맡았고, 2002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에 올랐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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