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THE LEGENDS] ⑥ 안암골의 전설 박한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0. 09:51

본문

2022. 02. 11

 

슈터가 각광받던 1960~70년대 한국남자농구. 안암골에서 묵묵히 한국농구의 기둥을 맡았던 호랑이가 있었다. 그 당시 센터는 무조건 이 남자로 통했다. 훤칠한 외모에 192cm의 신장. 박한은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자 이충희, 임정명, 김병철, 전희철, 현주엽 등 당대 최고의 스타를 직접 길러낸 명 지도자였다.

 

초고속 ‘늦깎이’ 농구인생


박한이 먼저 잡은 것은 농구공이 아닌 아이스하키 스틱이었다. 중학생 시절 아이스하키부에 들어간 박한은 공식경기에도 출전했을 정도로 농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농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이유가 더 황당하다. 야외에서 이뤄지는 배구부 훈련이 힘들어 보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 그는 그렇게 실내 스포츠 농구를 시작했다. 발전 속도는 눈부셨다. 농구부 창단 멤버로 1년 만에 2부 리그 우승을 이끈 뒤 농구 명문 고려대에 진학했다. 고려대와 35년 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Q. 농구를 늦게 시작하셨는데, 계기가 궁금합니다.


중학교 다닐 때는 활동시간에 하긴 했었는데, 인창고등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그때 1학년 애들을 몇 명씩 모아서 창단을 했거든. 그 당시 창단 코치가 유재진 씨였는데, 정문에서 코치가 나를 봤나 봐. 난 하교를 하고 있었고, 코치는 애들 운동 가르치러 학교에 들어오는 상황이었어. 내려가고 올라오다 마주친 거지. 그때 내 키가 186cm 정도 됐었거든. 키가 크니까 코치가 오다가 명찰에 있는 이름을 보고 체육 선생님한테 얘기를 했더라고. ‘박한이란 키가 큰 학생이 있는데 농구를 시키면 어떻겠냐?’고. 며칠 있다가 체육 선생님이 불러서 ‘농구를 한 번 해봐라’고 한 거지. 그렇게 시작했어. 2학년은 나 혼자였어. 고등학교 때는 내 위로 농구선수가 없었어.

Q. 그럼, 중학교 때 농구공을 처음 잡으신 거네요.


공식 경기를 처음 나간 것은 고등학교 때고, 중학교 때는 그냥 농구가 좋아서 한 거야. 사실 그 전에 아이스하키도 조금 했었어. 중학교 때 경기도 한 번 나갔었지. 따지고 보면 농구보다 아이스하키를 먼저 나간 거야.

Q. 인창고 하면 배구가 유명한 팀이었는데, 농구를 택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인창이 배구가 강했어. 배구에서도 날 탐냈지. 그런데 배구부 훈련하는 것을 보니까 안 되겠더라고. 맨땅에서 막 구르고 그런 거 보니까. 허허. 농구는 조그만 강당이 있어서 실내에서 했거든. 바닥이 콘크리트로 돼 있긴 했지만, 배구는 야외에서 했으니까.

Q. 본격적인 선수 시작도 센터였겠어요.


그렇지. 2학년 때도 센터로 시작했어. 내가 제일 컸으니까. 이국희라고 있었는데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를 간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가 운동을 했으면 대표급으로 성장했을 지도 몰라. 키도 나랑 비슷했고 체격도 좋았거든. 센터로 라이벌도 하고 그랬지. 훈련은 나를 집중적으로 시켰어. 선수들도 하나 밑에 애들이고 하니까 늦게까지 남아서 개인훈련 시켜주고 그랬지. 코치도 마찬가지였고. 시작한 것에 비해선 성장이 빨랐어. 고2 때 시작해서 대학 2학년 때 대표선수가 됐으니까. 농구 시작 3년 만에 대표팀을 한 거지.

Q. 인창고가 창단 팀이었는데 당시 농구 성적은 어땠나요?


그 당시 고등부는 1부와 2부가 있었어. 우리가 처음 창단한 팀이라 2부였지. 2부에서 우승을 하면 1부로 올라가는 시스템이었는데, 내가 2학년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 3학년 첫 대회부터 1부로 나온 거지.

Q. 고려대와 긴 인연이 시작하던 시점인데요. 진학 이유가 있었다면요?


인창고 교감 선생님이 고려대 출신이셨어. 또 고려대 주기선 코치(동경올림픽 코치)가 적극적으로 집요하게 스카우트하려고 달라붙으셨지. 그때 실업팀 한국은행에서도 데려가려고 했었어. 대학을 안 가고 바로 간 선배들이 있었던 시대거든. 그런데 한국은행 김세련 전 총재가 고려대 출신이라 교우회에서 입김이 작용한 것 같기도 해. 고려대는 그렇게 가게 됐지.

Q. 짧은 기간 주축 센터로 올라서기 위해선 혹독한 훈련이 뒤따랐을 것 같은데요.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개인기를 포함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개인 훈련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 ‘농구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알고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작한 것은 대학 들어 와서야. 내가 65학번이니까, 그때 정기전이 부활이 됐다고. 그때 고대에서는 진해 해군사관학교와 자매결연처럼 맺어서 여름 훈련을 거기서 했어. 아이스하키만 빼고 4개 운동부가 다 내려가는 거야. 방학 때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운동이야. 새벽, 오전, 오후, 야간 운동 네 차례 훈련을 했어. 정말 힘들었지. 그렇게 힘든 훈련을 해도 목표 달성을 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으니까 다 이겨냈던 것 같아. 대학 1~2학년 때가 선수로서는 가장 힘든 훈련이었던 것 같아.

Q. 첫 번째 정기전이 기억에 가장 남으시겠어요.


선수로 감독으로 정기전을 수없이 치렀지만, 내가 1학년 때 가졌던 정기전이 특히 기억에 남아. 지금도 스코어를 기억할 정도니까. 65년 정기전에서는 연세대를 이길 수 없다는 평가가 나왔어. 4학년에 김인건, 3학년에 신동파, 2학년에 최종규가 버티고 있었거든. 다 국가대표 출신에 김인건, 신동파는 1964년 동경올림픽 멤버였으니까. 그땐 농구는 연대, 축구는 고대라는 게 정해져 있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77-74로 이긴 거야. 계속 비슷한 경기를 하다 막판에 기회를 포착한 거지. 그때 우리 멤버가 정광석, 조승연이었거든. 정기전 외에도 종합선수권이라고 있었어. 지금의 농구대잔치지. 군이나 금융단, 대학 나누지 않고 다 같이 대회에 참가를 했는데, 3학년을 제외하고 1, 2, 4학년 모두 우승을 했었어.

주당 아닌 명 센터


박한은 지도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1960~70년대 한국농구의 전성기를 이끈 기둥이었다. 국가대표는 본격적인 농구시작 3년 만에 이뤄졌다. 1966년 대표팀 막내로 태극마크를 단 뒤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 우승과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다. 당대 최고의 슈터로 불렸던 신동파가 외곽을 책임졌다면 포스트를 지켜낸 것은 그였다. 술내기 사건으로 유명했던 ‘주당’이 아닌 ‘명 센터’ 박한이었다.

Q. 국가대표 발탁이 농구 시작 3년 만에 이뤄졌어요.


대표팀이라는 게 지금 운동하는 선수들도 마찬가지 일거야. 운동선수의 첫째 목표는 일단 대학에 가는 거였지. 고대나 연대를 정말 바늘구멍 같은 찬스를 잡는 것이었거든. 그런 어려운 1단계 목표를 이룬 다음에는 국가대표선수가 되는 게 목표 아니겠어? 그 정도 실력 쌓아졌으니까 실업팀은 또 무난하게 갈 거고. 난 다행히 2학년 때 국가대표가 됐기 때문에 일찍 목표 달성을 한 것이라 볼 수 있지. 그렇다고 소홀히 한 건 없었어. 1973년까지 대표팀 하면서 한 번도 누락된 적이 없으니까. 7~8년 정도 한 거지.

Q. 선수생활을 하면서는 붙박이 센터 역할을 하셨는데요.


신장 큰 선수들이 없으니까 항상 내가 센터였지. 그땐 센터난이라고 보면 돼. 제2의 센터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가 없었어. 센터라고 하면 그냥 고정적으로 나야. 센터에 차성환이라고 있었는데 그 친구하고 나하고 번갈아 가면서 했다고 보면 돼.

Q.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이 첫 태극마크였습니다.


개최국 태국과 준결승에서 심한 트러블이 있었어. 태국이 텃세를 많이 부렸지. 심판이 정확하게 끌고 갔어야 했는데 절제를 못 시켰어. 심판이 경기 운영을 정확하게 못한 거지. 관중석에서 이물질도 막 던지고 그랬을 정도니까. 실내 스포츠에서 일어난 것은 불상사였지. 김철갑 선수라고 있었어. 3년 선배 되는 선수인데, 몸싸움하다 이도 나가고 그랬지 아마. 우리가 몰수 패를 당했는데, 그것도 전 경기 몰수 패가 아니라 그 게임만 지는 걸로 했다고. 뭔가 있었던 거야. 그 다음에 3-4위전에서 일본을 크게 이겼지.

Q. 대표팀 막내로 있을 때 고생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1967년 서울 아시아선수권부터 곽현채가 있었으니까 그땐 내가 제일 막내였지. 고생을 많이 했어. 코치가 미국인 마콘이었어. 신봉호 감독이었고. 미8군에서 훈련을 했는데, 게이트2라고 해서 들어가는 문이 용산고에서 쭉 올라가면 미군 부대야. 해병대 사령부가 하나 있고, 한참 올라가면 우리가 사용하는 게이트2야. 1~2km는 가야 체육관이 나오는 거야. 태릉선수촌에서 합숙 훈련할 때는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그게 아니면 후암동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야 했지. 막내가 공이 든 가방을 들고 가거든. 그게 장난 아니야. 여름에 땀 뻘뻘 흘리면서 그걸 매일 메고 올라가는 거지. 얼마나 더웠는지 몰라. 세탁기라는 게 없었으니까 각자 자기 빨래를 하는데, 최고참 김영일 씨 정도의 빨래는 내가 해줬지. 그래도 선배들이 괴롭히거나 그런 건 없었어. 김영일 씨는 내가 막내라 룸메이트로 데리고 있으면서 잘 해줬지. 지금도 그때 멤버들을 가끔 만나니까.

 

Q.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김영기 코치가 맡았을 땐데 필리핀하고 결승전을 했지. 필리핀이 아시아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했을 때니까. 그때만 하더라도 프로가 안 생겼을 때거든. 이후 프로가 생기면서 아마추어 농구가 침체가 됐지. 프로가 없을 때니까 총망라해서 나오던 시기거든. 결승전에 어려운 고비가 많이 있었어. 신동파라는 확실한 득점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 김인건과 이인표 등 중용이 많이 될 때인데 수비 존을 좁혀서 패스 아웃 해주는 작전들이 많이 통용이 됐지.

Q. 바로 다음해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남자농구 첫 금메달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그땐 강적이 이스라엘이야. 구라파랑 똑같아. 우린 가면 겨드랑이 밑에서 논다고. 신장이 정말 좋았지. 다른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만나면 힘을 못 썼거든. 우리만 이기고 우승을 한 거야. 농구라는 게 키 큰 선수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거든. 그렇다고 하더라도 키 작은 선수들이 한 번은 속일 수 있어. 우리 정보가 별로 없으니까 선수 분포도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우리가 아시아에서는 외곽슛이 가장 탁월했으니까. 이스라엘이 그걸 모르니까 한 번은 속은 거야. 계속 경기를 했다면 우리가 불리했겠지. 주도권을 거의 뺏기지 않고 리드를 했었어.

Q. 국제대회에서는 신장의 열세가 컸는데요. 어떤 역할을 맡았나요?


그 당시 센터는 득점을 위한 자기 공격은 일단 힘들다고 봐야 해. 대신 눈에 안 보이는 공헌을 많이 해야 좋은 센터였지. 지금 프로리그처럼 그 당시에도 코리안리그라는 게 있었어. 금융팀이나 전매청, 군인팀이 몇 차례씩 맞붙는 프로 형식의 리그였어. 그런 대회에서는 센터도 득점을 많이 하고 하는데, 외국만 나가면 센터는 득점을 못해. 세계선수권 나가면 센터는 선수도 아니거든. 수비라든가 우리 팀의 다른 선수들의 스크린을 해서 찬스를 내줄 수 있는 역할, 리바운드 같은 것을 잘하는 센터가 잘하는 선수야. 실질적으로 그 역할 밖에 못했고. 나로 인해 외곽 슈터에게 찬스를 내주는 역할인 거지. 그때 센터는 시야가 넓어야 했어. 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동료를 살려줄 수 있으니까. (김)영일이 형이 참 그 역할을 잘 해줬어.

Q. 1974년 대표팀과 산업은행에서 은퇴하셨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땐 서른 한 두 살 정도 되면 다 은퇴했어. 은퇴해도 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이 없었어. 1973년 12월 종합선수권 대회를 1974년 1월까지 한다고. 내 기억으로 신동파와 함께 은퇴식을 한 것 같아. 그땐 팀에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대표팀 출신들이 은퇴를 할 때 농구협회에서 은퇴식을 해줬어. 74년에 은퇴식을 같이 한 거지.

Q. 선수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셨나요?


선수생활에 아쉬움은 없었어. 인창고에서 처음 농구공을 잡은 뒤에 고려대에서 성적을 좋게 시작했고 마무리도 잘한 것 같거든.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선수권을 포함해 우승도 많이 해봤고, 68년 멕시코 올림픽도 한 번 출전해 봤으니까 할 만큼 다 한 것 같아. 그래서 아쉬운 건 없어.

안암골의 전설로 남다


박한이란 이름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등식이 있다. ‘박한=고려대’다. 1974년 산업은행에서 은퇴 후 그가 택한 길은 지도자였다. 졸업 6년 만에 다시 모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질긴 안암골 지킴이 인생이 시작된다. 그는 스카우트의 귀재였다. 고려대의 49연승 신화를 이끌었던 이충희, 임정명부터 ‘마지막 승부’ 세대인 전희철과 김병철, 현주엽 등 1970~90년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직접 키워냈다.

Q. 은퇴 후 다음해 모교인 고려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셨는데요.


은퇴하고 1년이 채 안 된 상태에서 날 코치로 부르더라고. 고대나 연대 감독은 선망의 대상이었어. 처음에는 호랑이 감독 얘기 많이 들었지. 초창기 때는 혼자 했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냥 내 나름대로 하는 거야. 코치가 있으면 상의도 하고 했을 텐데, 농구 선배들한테 상의는 했지만, 거의 내가 혼자 할 때니까. 그 다음 1977년부터 코치를 두고 정식 감독을 한 것 같아. 혼자 할 때는 훈련이 강해 호랑이 코치였고, 이후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으니까 거의 맡겨 놓고 했지. 아마 처음 날 만난 선수들보다 나중에 만난 선수들이 조금 더 편했을 거야.

Q. 어느 정도 힘들 게 훈련을 시켰기에 호랑이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생긴 건가요?


그땐 코치하고 나하고 선수들하고 훈련을 놓고 신경전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너무 힘드니까 내 방에 주장이 찾아와서 오후에 쉬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지. 예를 들어 이공대 전 캠퍼스를 도는 코스가 있는데, 어느 한 곳에 가면 내가 다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거든. 다 보이니까 선수들이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지. 사실 겨울보다 여름이 더 힘들어. 겨울엔 뛰면 땀이라도 나는데, 여름엔 헉헉거리면서 죽어라 뛰는 거지. 그걸 보지 말아야 돼. 그래야 다음 훈련을 또 시키지.

Q. 주량이 최고라는 소문도 많았습니다. 어느 정도셨나요?


술을 잘 먹고 못 먹는 게 어디 있어? 분위기 좋으면 먹고, 술 잘 먹는 선수들 있으면 같이 껴서 먹고 그러는 거지. 그 당시 대표팀 선수들 가운데 술 못 먹는 선수가 한 명도 없었어. 이상하지. 그래서 대회 끝나고 나면 그런 기회가 많이 있었지. 다 센데 신동파, 김인건, 이인표 다 잘 먹어. 지금도 잘 먹고. 허허. 난 맥주보다 독주를 좋아했는데, 술이라는 게 앉은 자리에서 못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 술을 잘 먹고, 못 먹는 기준은 술자리가 아니라 그 다음이야. 다음날 아침에 행동이 똑같아야 술을 잘 먹는 사람이지. 난 술 먹고 실수했던 기억은 없는 것 같아. 허허.

Q. 운동선수와 술은 사실 공존하기 힘든 거잖아요?


그래서 난 술과 연관된 인터뷰를 별로 안 좋아해. 운동을 할 때와 아닐 때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해. 나도 놀 때는 화끈하게 놀았지. 그러니까 소문이 났겠지? 허허. 선수 때나 지도자 때나 술에 대한 구분은 확실히 했어. 훈련장에서는 혹독하게 했지만, 긴장이 없는 장소에서는 많이 풀어주는 타입이야.

Q. 고려대에서 직접 지도한 스타들이 정말 많은데요. 스카우트 비화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내가 고대에 왔을 때 이미 76학번까지는 스카우트가 다 된 상황이었어. 77학번부터 내가 직접 스카우트를 했는데, 그 애들이 임정명하고 이충희야. 이때는 오히려 스카우트를 힘들게 하지 않았어. 금전이 오고가고 그런 건 일절 없었지. 집에 방문해서 부모님 만나고 인사드리면 오히려 저녁 먹고 대접받고 나왔으니까. 명문대 간판이라는 것 때문에 그랬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상황이 바뀌더라고.

Q. 농구대잔치 최고 부흥기였던 90년대 또 한 번의 스카우트가 있었습니다.


서장훈이 이미 연대로 간 상황이었거든. 현주엽도 아마 장훈이와 운동하는 게 더 편했을 거야. 거의 매일 주엽이네 집을 찾아가 부모님을 설득했지. 새벽까지 집에 머물기도 했었어. 결국 고대로 결정을 한 거지. 박재헌도 마찬가지야. 미국에서 운동을 했기 때문에 부모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거든. 내가 아버지 만나러 미국을 몇 번 왔다 갔다 했어. 재헌이 아버지가 나와 연배가 비슷했거든. 그래서 설득했지. 김병철이나 전희철도 다 마찬가지고. 스카우트에서 가장 중요한 게 유대관계야. 부모들을 설득하는 게 중요했지.

Q. 반면 스카우트에 실패한 경우도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가장 아쉬운 선수는 누군가요?


이상민이나 서장훈 모두 실패한 케이스지. 다 손을 대 봤는데 결국 안 된 거야. 연대에 간 선수들은 거의 나도 그 부모들을 만나 봤다고 생각하면 돼. 허재 같은 중앙대 선수들도 마찬가지고. 어차피 다른 대학 감독들도 나와 같은 입장이었지. 농구 발전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었다고 보면 돼. 스카우트가 안 됐다고 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혀 없었어. 스카우트가 안 되고 끝나는 순간 그냥 잊는 거지.

 

Q. 수많은 제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면요?


가장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야. 누굴 지명해서 얘기는 안 해. 단지 나하고 만나서 제일 고생한 세대가 49연승 할 때 만났던 애들이거든. 내가 처음 감독을 맡았을 때 만난 선수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 훈련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인정을 하니까. 진효준, 임정명, 이충희 같은 선수들이 그랬지. 74~78학번까지 굉장히 혹독한 훈련을 받았지. 그 다음에 전성기를 맞은 전희철, 현주엽, 신기성, 양희승, 김병철 세대도 나와 만나 좋은 역할을 해준 애들이고.

Q. 프로 감독에 대한 아쉬운 기억도 있으신가요?


프로 감독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어. 대신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있지. 우리가 기록에 도전도 해보고 보유도 해봤잖아? 49연승을 했으니까. 삼성이나 현대가 잘할 때 실업을 다 망라해서 3년 동안 무패 행진을 했을 때였으니까. 중간에 무승부라는 것은 있었지만, 그래도 매스컴이 연승을 인정 해줬으니까. 연승 행진이 무너질 때 우리가 해군에 졌거든. 그렇게 강한 팀이 아니었어. 우리가 방심해서 허를 찔린 거지. 이충희와 임정명이 있을 때니까 그 고비만 넘기면 계속 연승 행진이 연장되는 건데, 대통령배에서 진거야. 그 다음에는 대학 경기니까 60, 70연승 가는 게 가능했거든. 중간에 비긴 경기도 하필이면 정기전이야. 49연승 할 때니까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는데 비겼어. 학교에서는 굉장히 실망했지. 그때가 좀 아쉬워.

Q. 1997년 감독직에서 물러나셨습니다. 고려대에 계속 남아 계셨던 이유가 뭐였나요?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준 게 모교잖아. 선수로서 지도자로서도 크게 해준 바탕이었고. 감독은 20년이지만, 23년을 지도자 생활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의리라고 할까? 배신하기 어려웠지. 처음과 끝을 고려대에서 하고 싶었어.

박한은...


박한은 1946년생으로 인창고와 고려대를 거쳐 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은퇴 후 1975년부터 고려대에서 지도자 인생을 걸으며 이충희와 임정명, 전희철, 김병철, 현주엽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을 배출했고, 고려대 49연승 신화를 이루었다. 1997년 감독 생활을 마친 뒤 고려대 체육위원회, 대한민국농구협회, 대학농구연맹 등 크고 작은 단체에서 농구계를 위해 일해왔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