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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장면] 63. 중정의 분노. "축구를 왜 북한보다 못하는 거야"

---[스포츠100場面]

by econo0706 2022. 11. 2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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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3. 15.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가 진상 조사를 벌였다. 결론은 ‘이대로는 안된다. 우리도 최강팀을 만들자.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즉시 축구팀 창단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양지팀’을 만들었다. 양지라는 팀명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정의 모토에서 딴 것이었다.

중정은 최고 선수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느 팀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었다. 군 복무중인 대표급 선수가 1차 모집 대상이었다. 허윤정은 공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임에도 팀에 합류했다.

미입대자중 쓸만한 선수들은 입대와 함께 팀원이 되었다. 이회택이 대표적이었다. 이회택은 복무기간이 짧은 해병대를 선택했다. 축구팀이었지만 뛰는 동안은 군인이기도 해서 군 복무로 인정받았다.

1967년 1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한 양지축구단이 탄생했다.

'아시아의 황금다리’ 최정민이 이끄는 우리나라 최초의 드림팀이었다. 골키퍼에 이세연, 이준옥(이상 육군), 풀백진에 김호, 김정남, 김기복, 김삼락(이상 해병대), 서윤찬, 강수길, 임국찬(이상 육군), 포드진에 이회택, 정병탁, 조정수, 이이우(이상 해병대), 정강지, 박이천, 박광조(이상 육군), 허윤정(공군) 등 이었다.

최고 대우였다. 군인 신분임에도 실업팀 못지않은 보수를 받았다. 서울 이문동 중정 내 합숙소에서 마음대로 먹고 자면서 축구에 매달렸다. 지금껏 구경도 제대로 못한 잔디구장에서 훈련을 하기도 했다. 양지팀의 일원이라는 것이 당시 그들에겐 큰 자부심이었다.

양지축구단은 막강했다. 국내 어느 팀도 양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중정은 양지팀의 축구 실력을 더욱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1969년 유럽 전지훈련을 감행했다.

1969년 5월 방콕 세계군인 축구선수권대회 성적(공동3위)이 원하던 대로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해외 전훈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서독,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지를 도는 105일간의 전훈을 통해 양지는 더욱 강해졌다. 하나의 실업팀이 아니고 그대로 국가대표팀이었다.

양지팀을 주축으로 한 대표팀은 그러나 북한과의 경기는 하지 못했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 대신 일본을 상대했다. 1969년 10월 멕시코 월드컵 지역 예선전이었다. 1차전에서 2-2로 비기자 김형욱은 직접 팀을 찾아가 ‘일본놈들을 묵사발 내라’고 원초적으로 독려했다. 그 덕분인지 2차전은 2-0으로 이겼다.

양지축구단은 1970년 3월 17일 해체되었다. 김형욱이 아웃되고 이후락이 들어서면서 계속 끌고 갈 이유가 없어졌다. 이상했던 시절, 3년여 존속했던 ‘양지’는 메르데카컵(1967년) 우승, AFC챔피언스 리그 준우승(1969년) 등을 하며 ‘기형적이지만’ 우리나라 축구 발전에 확실하게 기여했다.

 

이신재 기자 20manc@maniareport.com

 

마니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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