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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배구 (1)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2. 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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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5. 24.

 

여자 배구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세계 예선을 가볍게 통과해 40년 만에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 스포츠 팬들은 아래 사진과 같은 장면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메달리스들. 앞줄 모두, 뒷줄 양쪽 옆이 여자 배구 동메달의 주인공들. 뒷줄 맨 오른쪽이 ‘나는 작은 새’조혜정. 뒷줄 가운데 신사복 입은 이(김택수 대한체육회장, 작고) 왼쪽이 해방 이후 첫 한국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정모(레슬링), 오른쪽은 은메달리스트 장은경(유도, 작고)

배구의 탄생지는 미국이다. 1895년 미국 매서추세츠주 홀리요크 YMCA 체육 활동 담당 이사 윌리엄 모건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고안했다. 홀리요크는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가 농구를 만든 곳인 스프링필드와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농구와 배구는 절친한 고향 선후배다.처음에는 ‘민토넷(Mintonette)’으로 불렸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찜뽕(고무공으로 하는 야구 놀이)’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모건 이사는 농구보다는 덜 힘들고 나이 든 YMCA 회원들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놀이를 궁리했다.테니스 핸드볼 농구 등의 여러 요소를 따서 만든 게 배구다. 처음에는 6피트 6인치(약 1.98m) 높이의 네트에 25피트×50피트(약 7.6m×15.2m) 크기의 코트에서 숫자에 제한 없이 많은 사람이 즐겼다. 1896년 국제YMCA훈련학교(스프링필드대학 전신)에서 열린 시범 경기를 계기로 이 새로운 놀이는 미국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져 갔다.1900년 캐나다에 소개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됐고 1947년 FIVB( Fdration Internationale de Volleyball, 국제배구연맹)가 결성됐다. 

 

▲ 동메달에 빛나는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의 일본과 준결승 장면. 그때는 0-3으로 졌다. 스포츠 팬들은 오는 8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40년 전과 4년 전 런던 올림픽 패배의 설욕을 기대하고 있다. / ⓒ 대한체육회 90년


세계선수권대회는 1949년(남자), 1952년(여자) 각각 시작됐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남녀부가 함께 정식 종목이 됐다.제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군에 의해 유럽 지역에 전해졌는데 이후 상당 기간 본고장인 미국보다 옛 소련 등 유럽 나라들이 세계 배구계를 장악했다. 미국의 경우 1920년대 후반 이후 35세 이상이 참여하는 전미성인남자배구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어 배구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배구는 1916년 3월 25일 서울YMCA 운동부와 유년사업부를 돕기 위해 부임한 미국인 B.P.반하트(한국 이름 반하두·潘河斗)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반하두는 우리나라 농구 발전에도 이바지한 인물이다. 배구는 탄생한 지 21년 만에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1917년 3월 30일 서울YMCA에서 재경(在京) 서양인팀이 YMCA팀을 3-0으로 이긴 것이 우리나라의 첫 배구 경기다. 당시는 12인제 경기였다.

 

1925년 10월 4일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 전신) 교정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조선신문사 주최로 제 1회 전조선배구·농구대회가 열렸다. 1928년 10월 조선체육협회(일본인이 조직한 단체, 조선인이 주도한 조선체육회와는 다른 단체)가 주관한 조선신궁종합경기대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각종 대회에 배구는 없다. YMCA와 조선체육협회 등이 배구 발전에 힘썼고 일제 강점기 배구는 일본인 선수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YMCA가 주관한 전조선중등학교배구선수권대회는 1928년 제 1회 대회에 이어 제 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2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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