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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신유사화(辛酉士禍)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7. 1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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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1801년이 신유(辛酉)년입니다. 그 전 해에 49세의 학자 군주이던 정조대왕이 재위 24년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노론 벽파의 호위 아래 11세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실제의 정권은 노론 벽파의 손안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시파로 남인이던 다산 일파들은 권력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천주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그렇게 혹독한 탄압을 받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황사영백서』라는 책에는 300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산의 기록에도 “높으신 임금 홀연히 떠나버리자, 요원의 불길처럼 화란이 타올라서 붉은 옷 죄수들이 길을 메울 지경(정헌 이가환 묘지명)”이라던 표현을 보면 신유년의 옥사(獄事)가 얼마나 무서웠고 처참했었나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신유년의 참혹한 사건에 대한 명칭이 역사적으로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아 사용에 혼란이 있기 마련입니다. 필자는 어떤 경우는 ‘신유사옥 (辛酉邪獄)’, 또 어떤 경우는 ‘신유박해 (辛酉迫害)’, ‘신유교옥(辛酉敎獄)’ 등으로 사용하여 용어가 일치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은 경우까지 있습니다.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지목하고 그들을 탄압한 당사자 입장에서는 사옥(邪獄)이라 부르고, 신자들 입장에서는 박해를 받았으니 박해라 칭하고 종교적 이유로 일어난 옥사여서 ‘교옥’이라고 칭할 수도 있는데, 가장 공평한 칭호는 역시 ‘신유교옥’이라 함이 가장 정당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산은 명확하게 ‘기묘사화,’ ‘을사사화,’ ‘갑자사화’등과 같이 선비들이 당한 화란이라 여기고 권철신, 이가환, 이기양과 같은 대학자는 물론 자신까지 포함해서 억울하게 당한 선비들의 화란인 ‘사화(士禍)’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역적을 핑계 삼아 함께 섞어서 죄를 주는 옥사에서 억울한 사람이야 사화를 당한 것이다.(多非其罪也 然則 雖逆賊雜治之獄 其冤者 士禍也··· 「복암 이기양 묘지명」)” 라는 대목을 보면, 학자들이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탄압을 받은 ‘선비들의 화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피해자 중에는 신자도 분명히 있었으니 모두를 사화라고는 못해도 다산은 분명히 사화를 당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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