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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다산의 유적지(遺跡地)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7. 1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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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마재·소내·두릉·능내로 불리던 마을은 다산 큰 형수의 아우인 광암(曠菴) 이벽(李檗)이 누님집을 찾아다니던 곳이요, 다산의 누님을 아내로 맞은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이 처갓집으로 드나들던 곳이며, 다산의 질녀를 아내로 맞은 황사영(黃嗣永)이 처가로 찾아오던 곳이었다.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혁혁한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지만, 당시 천주교 명도회장(明道會長)이던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주교를 종교로 신앙하여 장렬하게 순교했던 불굴의 혼이 태어나서 자랐던 곳이기도 했다. 정약종과 친사돈간이던 홍교만(洪敎萬:순교자)도 그곳을 출입했을 것이니 마재야말로 명실공히 서설(西說)·서학(西學)·서교(西敎)·서서(西書)·천주교·천주학으로 일컬어져 피어린 역사의 장을 남긴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겸하여 조선 후기 역사의 서광이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이었으니, 그가 태어나 자라고, 연구하고 사색하며, 수많은 저서를 저작하고 정리하여 보관하고 죽어갔던 마재는 바로 이 나라 민족사의 한 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졸저, 『다산기행』에서)
 
80년대 초기 다산의 고향 마을이자, 그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마재를 처음으로 찾아가 묘소에 참배하고 적었던 글의 일부를 옮겨 쓰다 보니 정말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산은 그의 자서전에서 “약용은 한강의 상류 마현리에서 태어났다”(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라고 밝혔고, “마침내 집뒤란 자(子)의 방향 언덕에 널 들어갈 형태를 그어놓았다”(遂於屋後負子之原 畫爲壙形)라고 하여 묘소의 위치까지 정해놓았음을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다산유적지’라고 이름하여 묘소아래 빈 터에 ‘여유당’이라는 다산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기념관과 문화관도 세워졌고 문도사(文度祠)라는 사당까지 건립되었고, 다산문화거리까지 조성되어 제법 볼만한 관광지로 변모된지 오래입니다.
 
오는 5월 17일 오후 4시에는 바로 다산 마을에 경기실학박물관이 세워지는 기공식이 열린다고 합니다. 명실상부하게 이 민족의 서광인 실학의 산실인 마재가 민족사의 한 복판에 자리하게 되는 순간이 오고 있습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임)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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