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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다산과 연암(燕巖)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7. 1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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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조선왕조 500년, 그 긴긴 세월에 앞을 내다보며 시대의 질곡을 뛰어넘으려는 사상과 철학을 독자적으로 지녔던 분이 몇 분이나 될까요.

 

전통사상에 대한 깊숙한 이해를 통하여 오는 세상에 대한 높은 수준의 창조적 견해를 지니고 그런 문제를 피력한 저서를 남긴 분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연암과 다산이 있습니다.

노론의 명문 집안 태생으로 중심부에 있어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끝내는 중심부보다는 외곽을 맴돌며 탁월한 문학사상과 문예비평의 논리로 대문호(大文豪)의 위치에 오른 분이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었습니다. 남인 명문가의 후예로 문학가와 경세가를 겸한 최고봉에 이른 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났으니 연암보다는 25세의 연하였습니다. 연암의 어떤 기록에도 다산에 대한 언급을 한 대목은 찾기 어려운데, 다산은 그의 대저 『경세유표』의 동관(冬官) ‘이용감(利用監)’ 조항에,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朴齊家)가 지은 『북학의』6권을 보았으며, 그 뒤에는 유신(儒臣)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熱河日記)』20권을 보았는데 거기에 기록된 중국 기구(器具)의 제도는 보통 사람의 견해로는 추측하지 못할 만한 것이 많았다”(檢書官朴齊家所著北學議六卷 其後又見故儒臣朴趾源所著熱河日記二十卷 其載中國器用之制 多非人意之所能測…)(『경세유표』券二·二十八)라는 부분을 보면 분명히 다산은 연암의 주저(主著)인 『열하일기』를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학파를  성호 이익 계통의 경세치용학, 연암학파의 이용후생학으로 구분하는데, 그 모두를 다 받아들여 실학의 집대성자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임금 아래서 벼슬을 했고 멀지 않은 지역에 살았건만 다산과 연암은 끝내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선배인 연암의 문학과 북학사상은 다산이 충분히 습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외국으로 보면 연암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에 비길 수 있고, 다산이야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도의 석학이었으나, 연암과 다산은 국내에서도 미미하고 세계적으로는 더 알려져 있지 않으니 얼마나 서러운 일입니까. 안타까울 뿐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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