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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글을 쓰는 것이 귀찮아졌다

--이재성 축구

by econo0706 2022. 9. 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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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7. 11

 

여름휴가가 끝났다. 한국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뒤로한 채 독일로 돌아왔다.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번 칼럼의 주제는 이미 약 한 달 전부터 정해놓았다. 이번 칼럼을 쓰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몇 날 며칠이 되도록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지인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바쁘다는 그럴 싸한 핑계가 있었다. 독일에 돌아와서는, 그럴 만한 핑곗거리도 없는데 한 단어를 쓰는 것조차 힘겨웠다. 하나의 일에 집중하는 힘이 사라진 느낌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있지 않고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고 있다. 한 마디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것이 귀찮아졌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내 생활 속에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나의 생활 습관을 되돌아보니, 마냥 즐길 거리에 매몰되어 있었다. 아이패드와 휴대폰을 통해 유튜브를 비롯한 SNS, 온라인 기사, 예능 프로그램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생각하는 시간도 줄었고, 생각하는 힘 또한 많이 약해졌다. 오래 생각하고 고민해서 적어야 하는 칼럼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스토리텔러로서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졌다.

이런 고민을 통해서 한 달 정도 준비한 주제를 과감히 리스트에서 지웠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주제를 다루고 싶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된다. 다시 초심을 찾고 기본에 충실하자는 마음으로 칼럼을 써보려 한다. 중심을 잡아야 2022-23시즌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답이 과거에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어릴 적 이야기와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초심을 찾아보려 한다. 나의 이 여정을 독자 여러분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

 

어릴 적 나는 아주 평범하고, 또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등교했다. 첫째 형이 이미 고등학생이었기에 나의 등교 시간도 형에게 맞춰졌다. 어머니께서 나까지 늘 차로 데려다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초등학교의 등교 시간은 9시였는데, 어머니 덕분에 난 늘 한 시간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선생님 말씀도 잘 따랐다. 선생님이 시키는 것은 무조건 실천했다. 그게 학생의 도리라고 생각했기에 충실히 제 본분을 지키려 노력했다. 쑥스러움이 많아 질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네”, “알겠습니다”라고만 답했던 학생이었다. “왜일까?”라는 이유조차 생각하지 않았고, 궁금한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일에 의문을 품지 않고 실천하는 데만 집중했다.

고등학생 때의 일화다.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경기 중 후반전 교체를 통해 경기장에 들어갔다가, 다시 교체되어 나왔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축구선수로서 아주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다. 그런 내게 감독님께서는 “기본기 훈련을 더 하라”고 꾸중하셨다. 그 말을 듣고 얼른 연습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후배들에게 웃으면서 다가가 “같이 운동장에 나가 공 좀 던져줄 사람 있나?”라고 물었다. 후배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저 형 진짜 멘탈 좋다”, “놀랐다”라고 했단다. 졸업 후 들은 이야기다. 당연히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일단 감독님의 지시를 행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게는 지도자, 선생님의 조언과 말씀이 내가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추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물렁한 찰흙 같았던 내가 그분들의 손길로 조금씩 단단해졌다. 내게는 본보기였다. 고려대학교 시절 서동원 감독님이 생각이 난다. 축구에 그렇게 열정을 가진 분을 본 적이 없다. 새벽 여섯 시에 운동하는 날에도 서동원 감독님은 파주에서 안암까지 오셔 가장 먼저 운동을 준비하셨다.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느릿느릿 운동장으로 오는 우리들을 목청 높여 부르시며 잠과 정신력을 깨우셨다. 훈련 프로그램도 열정적으로 짜셨지만, 훈련 이외에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부분들도 정성껏 준비해 우리에게 전달하셨다. 3년 동안 서동원 감독님과 함께하며 그분이 단 한 번도 흐트러지거나, 대충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말씀 세 가지가 있다. “혼자 잘 되는 것보다 함께 잘 되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정하라.” “축구화 끈을 푸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라.” 대학교를 졸업한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바로 어제 이 말을 들은 듯한 느낌이 난다. 그만큼 당시 내겐 강렬히 꽂힌 말씀이었고, 여전히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이 생생하다. 

서동원 감독님은 나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봐 주신 분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건, 대학교 시절 경험 덕분이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중앙 미드필더와 공격수 딱 두 포지션만 소화가 가능했다. 대학교에 와서는 공격 진영 전 포지션에서 연습을 했고, 심지어 왼쪽 수비수로도 대회에 출전했던 적이 있다. 잘하는 선수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축구를 하니 정말 즐겁고 재밌었다. 서동원 감독님은 그 가운데서 나의 재능을 믿어주시고, 여러 포지션에서 다양한 상황들을 마주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주셨다. 내가 가장 많이 성장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때부터 ‘기본’의 참뜻을 알았던 건 아니다. 기본에 충실하는 것과,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렸던 나는 두 문장의 의미가 똑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키는 대로 해야 칭찬받고, 실수가 줄어들고, 혼이 덜 나기 때문이다. 서동원 감독님처럼 좋은 분도 계셨지만 나는 대체로 감독님과 코치님들을 무서워했다. 최대한 주눅 들지 않고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하는데 그럴 수 없던 시절이었다. 실수가 두려웠고, 혼이 날까봐 눈치를 많이 봤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던 창의적인 방법은 접어두고 시키는 대로만 했다. 마치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식의 축구를 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어쩐지 분위기가 무거워진 느낌이다. 살짝 방향을 틀어볼까. 기본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축구 외적인 생활 속에서도 찾아온다. 이를테면 요리다. 평소 요리를 하지 않지만 정말 가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을 때 요리를 한다. 요리 시작 전 메뉴를 고르고 레시피를 확인한다. 그런데 요리를 하다 보면 꼭 정해진 레시피대로 하지 않고 점점 내 감으로 간을 맞추고 있다. 그렇게 완성된 요리는…. 여기까지. 다음부턴 레시피대로 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인츠에 오고 나서 독일 본에 계시는 총영사님과 시간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마주쳤다. 총영사님은 나를 못 보시고, 나만 총영사님을 본 상황이었다. 그대로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총영사님께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 뒤로 다시 총영사님과 다른 분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를 많이 칭찬해주셨다. 어른을 보면 인사를 드리는 기본적인 행동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셔서 놀랐다. 옛날 말씀 중에 ‘인사만 잘해도 칭찬받는다!’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앞서 말했듯 선생님의 가르침이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렇게 몸소 경험하며 얻는 깨달음도 중요한 요소다. 최근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본을 먼저 보이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며 참된 선생님의 모습은 무조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먼저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동의했다. 매일 새벽 6시에 파주에서 안암까지 온 서동원 선생님처럼 말이다. 말이 아닌 자기의 삶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해주는 게 선생님의 역할이지 않을까. 강요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살면서 잘한 것 중 하나는 선생님의 말을 언젠가 꼭 깨우치기 위해 늘 메모하고, 되뇌던 습관이다. 그때는 와닿지 않았던 가르침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순간이 종종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엇나간 삶을 살고 있지는 않구나, 하고 안도감이 든다.

지금도 그렇다. 오래 준비했던 주제를 과감히 버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새 시즌을 앞두고 이렇게 그동안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의 말씀을 되돌아보니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다. 잊고 있던 중요한 무언가를 찾은 기분. 특히 최근 들어 교육의 중요성을 몸소 느끼는데, 교육으로 인해 한 사람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다. 초심을 찾기 위해, 흔들리는 중심을 잡기 위해 옛날에 쓴 일기를 펼쳐보는 나 역시 살면서 참된 스승을 만나온 것 같다.

 

​사실 글쓰기에 대한 권태는 타 포털사이트에서 축구 이야기를 연재할 때도 경험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주기적으로 글을 연재해야 하는 계약이 없었다. 정말 내 의지에 달려있었다. 한동안 권태에 빠져 오랜 시간 글을 적지 않았다. 지금 당장 편안하게 즐길 거리에 빠져 내일 해야지, 내일은 꼭 해야지, 하며 오늘 할 일을 자꾸 내일로 미뤘다. 오랜 권태는 곧 나태로 이어진다.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게 바로 나태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나태로 빠지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학창 시절 가장 좋았던 점은 세상의 소식은 뒤로한 채 오직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고 노력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게 학생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일에 집중할 때가 가장 나다운 모습이다. 나는 더는 학생이 아니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내 일에 집중해야 한다. 잠깐, 그 본분을 잊은 나를 반성하며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그 시작이 이 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써야 하는 글을 썼으니, 이 또한 기본을 잘 지킨 거로 생각한다. 여느 때보다 뿌듯하다. 여러분도 삶 속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살펴볼 시간이 주어지길 바라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친다.

제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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