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아웃사이드 파크] 안방 탈락 WBC 통해 본 '한국 야구 3대 참사'

---Outside Park

by econo0706 2022. 9. 24. 09:26

본문

2017. 03. 10

 

무기력한 한국 야구의 민낯이 드러났다.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서울라운드가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1회 대회 4강, 2회 대회 준우승팀인 한국은 3월 6일 첫 경기부터 다크호스 이스라엘과 연장 접전을 펼친 끝에 1-2로 패했다. 7일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선 조 최강팀 네덜란드를 맞아 0-5로 졌다. 같은 날 이스라엘이 대만을 또 이기고, 하루 뒤인 8일에는 네덜란드도 대만을 잡으면서 한국의 네 번째 WBC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네덜란드와 이스라엘을 도쿄 라운드로 보내고 한국 대표팀은 그냥 한국에 남았다.
 
한국 야구의 굴욕이다. 국가대표팀 지휘에 잔뼈가 굵은 ‘국민 감독’ 김인식 감독이 나섰지만,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선수 선발 과정부터 부상병과 이탈자가 속출해 골머리를 앓았고, 대회가 시작된 뒤에도 선수들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렵게 꾸린 엔트리를 제대로 활용조차 해보지 못했다. 복병에게 허를 찔렸고, 강적에게 제압당한 한국 야구. 서울의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대회였기에 더 뼈아팠다. 종종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가끔은 아픔도 겪어야 했던, 한국 야구의 3대 참사를 돌아봤다. 

# 2003년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첫 번째 ‘참사’의 역사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수확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준비하는 야구대표팀의 마음도 부풀어 올랐다. 올림픽에서는 동메달 수상자까지 병역 대체복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위 선양을 하는 동시에 군복무 혜택까지 누릴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물론 아테네에 가서 메달을 따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었다.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하는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였다. 2003년 11월 일본 삿포로에서 그 대회가 열렸다. 올림픽 본선 진출권은 2개국에만 주어진다. 대표팀 지휘봉은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현대를 이끌고 있던 김재박 감독이 잡았다. 

출전 국가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뿐. 일본은 늘 강적이지만, 나머지 두 국가는 객관적으로 한 수 아래였다. 한국과 비교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올림픽 진출에 필요한 2승은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다. 한국 야구의 시선은 이미 아테네를 바라고 있는 상태. 삿포로는 그저 아테네로 가는 경유지 정도로만 여겼다. 
 

▲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서울라운드에서 조기 탈락한 대한민국 대표팀. / 연합뉴스


다만 선수 선발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송진우, 이상훈, 심정수, 김한수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빠졌다.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인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 구대성 등 해외파 선수들도 각 소속 구단의 방침에 따라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국내 포스트시즌 일정으로 인해 대표팀 전체가 손발을 맞춘 시간은 단 1주일에 불과했다. 그래도 대표팀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대만과 중국에게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구에 ‘100%’는 없다. 대만전이 그랬다. 대만은 한국보다 절박했다. 12년 만의 올림픽 본선 진출을 목표로 해외파 선수들을 모두 끌어 모았다. 한국전 선발은 뉴욕 양키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던 왕첸밍. 한국 타자들이 쉽게 공략하기는 어려운 투수였다. 

한국도 그해 한국시리즈 MVP 정민태를 내세웠다. 이승엽와 장성호, 이종범의 적시타를 앞세워 9회초까지 4-2로 앞섰다. 더 많이 득점할 수 있었던 기회를 주루플레이 실수로 번번이 날려버린 게 아쉬웠지만, 일단 승리는 눈앞으로 온 듯했다. 그러나 9회말에 사단이 났다. 5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계속 버티던 임창용이 두 타자를 연속 볼넷으로 내보냈다. 구원 등판한 조웅천은 투아웃까지 잘 잡고도 적시타 두 개를 연이어 내줬다. 4-4 동점. 

결국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연장 10회 구원 등판한 세이부 소속 투수 장즈자는 박한이-이승엽-김동주를 모두 범타로 돌려세웠다. 결국 한국은 10회말 1사 만루서 끝내기 안타를 얻어맞았다. 4-5로 패했다. 

한국은 아마추어 동호회 수준의 중국 대표팀을 이기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아테네에 가려면 1승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상대인 일본은 객관적으로도 한국보다 강했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들로 드림팀을 꾸려서 출전했다. 이미 대만과 중국을 꺾고 한국을 만났다. 일본 선발 투수 와다 츠요시는 5⅓이닝 9탈삼진 무실점으로 한국을 압도했다. 힘 한 번 못 써보고 0-2로 졌다. 한국은 3전 전패를 당한 중국과 함께 탈락했다. 한국이 아닌 일본과 대만이 아테네행 비행기에 올랐다. 

#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불과 3년 뒤였다. 한국은 실수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엔 아시안게임에서 굴욕을 당했다. 이른바 ‘도하 참사’의 시작이다. 

2006년 아시안게임은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다. 아시안게임은 프로야구 선수들이 합법적으로 병역 대체복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다. 올림픽은 일본이 최정예 대표팀을 내보내는 데다, 아마추어 강국 쿠바, 만만치 않은 상대인 미국과 캐나다 등 강적들이 도사리고 있다. 3위 안에 들기가 쉽지 않다. 

아시안게임은 다르다. 무조건 금메달을 따야 군복무 혜택이 가능하지만, 전력상 유일하게 한국보다 강한 일본이 프로 선수들을 아시안게임에 내보내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일본 대표팀은 사회인리그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다. 아시안게임이 대부분 정규시즌이 한창인 시기에 개최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야구로는 아시아 최강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출전하지 않는 아시아 대회를 위해 자국 정규리그를 중단하는 희생은 감수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또 일본은 한국과 달리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 프로 선수들처럼 군복무 관련 혜택을 필요로 하는 상황도 아니라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한국이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아시안게임이 다가오면, 각 구단은 군 미필 주전 선수들을 한 명이라도 더 대표팀에 포함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표팀 차출을 꺼리는 다른 국제대회와는 다르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꼭 아시안게임에 나가고 싶다”는 희망을 줄지어 밝힌다. 몸이 재산인 프로야구 선수에게 20대의 2년이 갖는 의미와 유무형적 비용을 고려하면,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도하 아시아게임이 바로 이런 분위기에 경종을 울렸다. 아시안게임 태극마크를 병역 혜택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안일함에 발목을 잡혔다. 철저하게 군 미필자 위주의 국내파 선수들 위주로 팀을 꾸렸다가 해외파가 총출동한 대만에 패해 금메달을 날렸다. 대만은 한국전에 당시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자국 에이스 두 명을 모두 투입했다. 당연히 타자들이 치기 어려웠다. 

심지어 진짜 충격은 대만전이 아니었다. 워낙 그동안 대만전에서 힘겨운 승부를 해온 한국이다. 일격을 당하긴 했지만 이변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 선수가 단 한 명도 출전하지 않은 일본에게 대표팀 최강 투수였던 류현진과 오승환을 모두 내고도 졌다. 사회인 야구 선수 17명, 대학 야구 선수 5명으로 꾸려진 일본 대표팀이 류현진을 공략해 역전을 하고, 오승환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쳤다. 한국을 호령하던 최고의 투수들이 뭔가에 홀린 듯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국은 그렇게 동메달을 들고 돌아왔다. 두 마리 토끼는커녕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삿포로에 이어 도하에서도 다시 한 번 지휘봉을 잡았던 김재박 감독은 그 후 다시는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오르지 못했다. 

 

▲ 한국 대표팀이 다크호스로 맹활약했을 당시인 2009년 WBC 국가대표팀. 당시에도 김인식 감독이 팀을 이끌었다. / 연합뉴스


# 2013년 타이중, 그리고 2017년 서울

그 후 한국 야구는 다시 고삐를 조였다. 2007년 아시아야구선수권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따냈고, 올림픽에선 8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다. 야구 역사를 넘어 한국 남자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로 기록됐다. 2009년 WBC 준우승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환희가 이어졌다. 대회가 크든 작든, 방심은 없었고 투지는 커졌다. 그러나 2013년 3월 열린 제3회 WBC에서 1라운드 탈락이라는 아쉬움을 맛봐야 했다. 그 장소가 바로 대만 타이중이었다. 

당시 한국은 네덜란드, 호주, 대만과 한 조에 속했다. 그런데 이제는 강국이 된 네덜란드에 일격을 당했다. 1회와 2회 WBC에서 기적을 썼던 한국은 앞선 두 대회에서 오직 일본에게만 패했다. 그것도 여러 차례 맞붙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는 식이었다. 미국,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메이저리거들이 즐비한 팀들을 꾸준히 꺾으면서 놀라움을 안겼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런 한국에게 얼얼한 기습 펀치를 날렸다. 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더 당황했다. 우왕좌왕하던 한국은 네덜란드전에서 수비 실책 4개를 범했고, 주루사 2개로 결정적인 순간 흐름을 끊었다. 0-5의 스코어를 남기고 패했다. 

실제 패배는 단 한 번뿐. 한국은 이후 호주와 대만을 모두 이기고 조 2위를 향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한국, 네덜란드, 대만 세 팀이 2승1패로 동률을 이룬 상황에서 한국이 득실차에서 다른 두 나라에 뒤졌다. 결국은 네덜란드전에서 불필요한 점수를 내주고 한 점도 뽑지 못하면서 5점차로 무기력하게 패한 것이 마지막 순간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 대회가 그동안 삿포로, 도하 대회와 함께 한국 야구의 ‘3대 참사’로 불리게 된 이유다. 그리고 아쉽게도 한국은 4년 뒤인 2017년 3월, 마지막 세 번째 참사의 이름을 ‘타이중’에서 ‘서울’로 바꾸고 말았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자료출처 : 일요신문 [제1296호]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