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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뚜루 마뚜루] '선수 의지와 여론의 힘으로 뚫은' 류현진 해외진출

--홍윤표 야구

by econo0706 2022. 10.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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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30.

 

류현진(25)이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마침내 한화 이글스 구단이 받아들인 것이다. 한화 구단은 29일 류현진이 ‘포스팅시스템(공개입찰제도)’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공식적으로 열어줬다.

한화 구단은 그동안 현실적인 전력약화와 선수 자신의 강력한 해외진출 의사 사이에서 고심하며 숙고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한화 구단의 결정은 거액의 이적료도 챙기고, 대외 명분도 세울 수 있는 바람직한 일이다. 이미 마음이 떠난 선수를 애면글면 붙잡고 있어봐야 서로 득 될 것도 없는 노릇일터. 

류현진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큰물에서 뛰고 싶다’는 뜻을 세우고, 안팎에 자신의 의지를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킨 뒤 구단의 결단을 이끌어낸 그의 해외 진출 과정은 예전 백인천(70) 전 LG 트윈스 감독과 선동렬(49) KIA 타이거즈 감독을 연상시킨다. 

경동고를 졸업하고 농협에 몸을 담고 있던 백인천은 1962년 1월 대만에서 열렸던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경유지였던 도쿄에서 일본 프로구단 도에이 플라이어즈와 덜컥 가계약을 해버렸다. 체육계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 5 16 쿠데타 이듬해였으므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했을 무렵이었다. 백인천은 선우인서 대한야구협회 회장과 김영조 감독 등 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선수단이 대한체육회 이주일 회장에게 귀국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일본에 가고 싶다는 소원을 털어놓게 된다.

 

당시 이주일 대한체육회장은 박정희 소장과 더불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맡고 있던 실세였다. 백인천은 이주일 회장의 “백 선수, 무슨 애로 사항이 있나”하는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소원이 있습니다. 일본에 보내주십시오. 도에이 구단과 계약을 하고 왔습니다.”고 호소했다. 백인천의 당돌한 말에 놀란 선우인서 회장이 그를 째려보았지만 백인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주일 회장이 선우 회장에게 “선우 회장, 갈 수 있겠나”라고 묻자, 선우 회장이 “유망주가 빠지면 우리나라 야구가 안 됩니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주일 회장이 “당신, 이상한 얘기를 하는구먼. 그런 생각은 발전에 도움이 안 돼. 가서 배우고 오면 후배 양성에 도움이 되지 않겠나. 여론조사 해봐”라며 오히려 면박을 주었다.

백인천은 결국 일본에 가게 됐지만, 그 와중에 한국의 신문에도 계약사실이 보도되는 바람에 ‘매국노’,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과 똑 같은 XX” 혈서가 그의 집에 날아드는 등 심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선동렬 또한 일본에 진출한 과정이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91년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 대표 팀이 본격적으로 교류의 장을 열었던 제1회 한 일 슈퍼게임이 열린 뒤 일본 구단들이 선동렬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주니치 드래곤즈 구단이 적극적이었다.

1993년 9월 10일 주니치 신문사의 하시모토 편집위원이 극비리에 내한, 광주 선동렬의 집을 찾아가 일본 진출 의사를 타진했다. 

당시 <일간스포츠> 기자였던 필자가 그 이튿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나 그 사실을 확인하고 기사화한 일이 있었다. 온 세상이 뒤집혔다고 해도 될 터였다. 물론 주니치의 사전 접촉은 한 일 선수계약 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 국내의 한 유력지는  ‘매국노’라는 용어를 써가며 거의 비방 수준으로 선동렬을 몰아붙였고, 해태 타이거즈 구단에도 ‘선수를 팔아먹으려는 구단’이라는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 때 선동렬은 일단 항복했다. 자신의 뜻을 잠시 접었던 것이다. 그 해 11월 주니치 신문사의 가토 미이치로 회장이 한국에 와서 박건배 해태 구단주를 만나 정중히 사과하고 소동의 당사자였던 하시모토 편집위원을 인사조치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나 선동렬은 1995년 제2회 슈퍼게임이 끈 난 뒤 자신의 일본 진출 의사를 공식화하면서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해태 구단은 펄쩍 뛰었다. 선동렬은 은퇴 배수진까지 치고 “일본에 못가면 코치 수업을 받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결국 해태 구단이 굴복했다. 여론도 선동렬의 의사 표시에 우호적이었다. 해태 구단은 ‘여론 조사’라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여론조사 결과 선동렬의 일본진출은 79.8%의 찬성(반대 20.2%)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박건배 해태 구단주가 결단을 내렸다. 그 즈음 해태 구단은 이미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선동렬의 일본 진출로 인해 해태 구단은 거액의 이적료를 챙겨 운영에도 숨통이 틔었고, 여론 조사를 통한 명분도 충분히 세운 셈이었다. 

당대 최고 야구선수들의 해외 진출 과정을 되살펴보면, 선수 자신은 부와 명예를 쌓는 계기가 됐고, 해당 구단은 명분과 실리를 함께 얻은 격이 됐다. 그들이 훗날 우리 야구발전에 기여한 점은 구태여 설명할 나위조차 없다. 

 

홍윤표 선임기자

 

자료출처 :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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