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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전설' 애런 헤인즈의 롤러코스터 같았던 KBL 인생

--민준구 농구

by econo0706 2022. 11. 2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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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2. 08. 

 

KBL에서만 11번째 시즌, 외국선수 최초의 1만 득점을 눈앞에 둔 사나이가 있다. 조니 맥도웰을 뛰어넘어 역대 KBL 최고의 외국선수로 군림한 남자, 애런 헤인즈가 그 주인공이다.

헤인즈는 보이시 주립대를 졸업한 후, 핀란드와 스웨덴, 아랍에미리트, 레바논 등을 거쳐 2008-2009시즌 삼성 에반 브락의 대체 외국선수로 KBL에 첫발을 디뎠다. 초창기 헤인즈에 대한 평가는 현재와는 너무도 달랐다. 비쩍 마른 체구로 인해 저평가를 받았고, 팀 동료였던 테렌스 레더에 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당시 함께 했던 이상민 감독은 “헤인즈에 대한 첫인상은 실망스러웠다. 당시 대부분의 외국선수가 탄탄한 몸을 자랑했다면 헤인즈는 말라도 너무 말랐었다(웃음). 플레이 스타일도 단순했다. 돌파만 주구장창 했으니까. 지금처럼 정확한 슛을 갖추지는 못했다”라며 헤인즈와의 첫 만남을 이야기했다.

이상민 감독의 말처럼 헤인즈는 ‘돌파 집착남’에 가까웠다. 첫 시즌, 헤인즈의 성적은 38경기 출전해 평균 25분 23초 동안 15.1득점 6.1리바운드. 점프슛은 지금처럼 정확하지 못했고, 운동 능력을 이용해 얻어낸 득점이 많았다.

헤인즈의 진가는 2008-2009시즌 KCC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발휘됐다. 삼성이 1승 3패로 밀린 5차전, 끝내려는 자와 이어가려는 자의 혈전이 펼쳐졌다. 73-73, 경기 종료 3초 전, 이대로 연장까지 가는 듯했던 상황에서 헤인즈가 위닝 점프슛을 터뜨렸다. 13,537명이 들어선 잠실실내체육관이 열광의 도가니로 빠진 순간이었다. 경기 후, 헤인즈는 “마치 코비 브라이언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라며 감격에 빠졌다.

첫 시즌을 마친 헤인즈는 이후 KBL 구단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 결과, 2009-2010시즌 역시 대체 선수가 되어 돌아왔다. 모비스의 압둘라히 쿠소가 라마단(이슬람교의 전통 행사로 한 달간 단식과 재계를 하는 것)을 지키며 컨디션 난조를 보인 것. 개인 기록은 아쉬웠지만, 역시 챔피언결정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첫 우승 반지를 품에 안게 된다.

헤인즈의 KBL 인생은 점점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2010-2011시즌, 처음으로 외국선수 드래프트에 지명(전체 13순위)되며 친정팀인 삼성에 돌아왔다. 53경기 동안 평균 23.1득점 8.4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득점왕에 올랐다. 지난 두 시즌처럼 챔피언결정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개인으로는 성공을 맛본 시즌이었다.

2011-2012시즌, 외국선수 자유계약제도가 재도입됐음에도 헤인즈는 외면받지 않았다. 물론 첫 시작을 함께한 건 아니다. LG는 시즌 시작을 올루미데 오예데지와 함께했지만, 공격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교체를 바랐고, 전시즌 득점왕 헤인즈를 선택했다. 문태영, 서장훈, 헤인즈로 이어진 삼각 편대는 매우 막강할 것으로 전망됐다. 전시즌, 전자랜드가 ‘서태힐(서장훈, 문태종, 허버트 힐)’ 트리오로 성공을 맛본 것과 비교될 정도. 그러나 세 선수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고, LG의 플레이오프 탈락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헤인즈는 빛났다. 평균 27.5득점을 퍼부으며 자유계약 외국선수들을 누르고, 두 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하나, 첫 플레이오프 탈락이라는 아쉬움 속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LG 박도경 차장은 “헤인즈는 자유계약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는 물론 다른 팀들도 대체 1순위로 꼽았던 선수였다. 좋은 선수들이 모여 하나의 힘을 내지 못한 게 씁쓸할 뿐이다. 아쉽게도 플레이오프는 나가지 못했지만, 기량 자체는 최고였다”고 회상했다.

한 번 바닥을 친 헤인즈는 개인과 팀 모두 성공을 이룬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바로 현재까지 인연을 이어간 SK에 합류한 것이다. 김선형을 중심으로 새판을 짜고 있던 문경은 감독은 헤인즈를 선택했고, 2012-2013시즌 44승 10패라는 최고의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헤인즈 역시 기대에 부응하며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SK와 함께한 세 시즌 동안 모두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개인 통산 5,000득점 역시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도 곧 찾아왔다. 2013년 12월 14일, KCC와의 경기에서 김민구의 옆구리를 가격하며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2경기 출전정지와 벌금 300만원의 징계가 내려졌고, 헤인즈는 한동안 비난의 중심에 서야 했다.

SK 한성수 통역은 “이때 일을 계기로 헤인즈가 많이 성숙해졌다. 민감한 문제인 만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도 성격은 좋았지만, 더 밝게 하려는 모습을 봤다”고 이야기했다.

성공적이었던 SK에서의 3시즌 이후 헤인즈는 생애 두 번째 우승 반지를 얻게 된다. 2015-2016시즌 오리온에 합류하며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끈 것이다. 3라운드 중반, 부상을 당하며 주춤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조 잭슨의 활약을 뒷받침하며 KCC를 무너뜨렸다. 2016-2017시즌 역시 4강 플레이오프까지 나섰다.

2017-2018시즌, 헤인즈는 생애 네 번째 대체 선수 자격으로 돌아왔다. SK가 대리언 타운스를 대신해 헤인즈를 불러들인 것. 과거만큼 못할 거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헤인즈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KBL 데뷔 이후 두 번째 풀타임 시즌을 보냈고, 팀을 정규리그 2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였던 KCC 전에서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플레이오프 출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인생의 희비가 한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SK는 헤인즈 없이 18년 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최준용을 비롯한 국내선수들은 헤인즈를 잊지 않았고, 그의 유니폼을 간직했다.

1981년생, 한국나이로 39살인 헤인즈는 여전히 SK의 에이스로 활약 중이다. 부상 여파가 커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느새 부활해 외국선수 첫 1만 득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23년의 역사를 자랑한 KBL에서 서장훈, 김주성, 추승균 등 단 세 명만이 해낸 대기록이다. 물론 팀은 플레이오프 가능성이 낮아졌지만, 개인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외국선수로서 달성 가능한 기록은 대부분 보유하고 있는 남자. 우리는 또 한 명의 전설을 지켜보고 있다. 한 농구 관계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헤인즈 같은 선수는 다시 나올 수 없다. 그가 처음이고, 마지막일 것이다.” 그만큼 헤인즈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헤인즈의 KBL 인생이 항상 순탄하지는 않았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기쁨과 아픔이 공존했다. 헤인즈의 마지막은 아직 물음표다. 끊임없이 레일을 타는 롤러코스터처럼 말이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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