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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드 파크] 아듀~막 내린 야구장들의 추억

---Outside Park

by econo0706 2023. 2. 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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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3. 04

 

올해 프로야구가 열리는 야구장은 총 아홉 군데다. 대부분 최근 몇 년 간 새로 지어지거나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구장들이다. 심지어 국내 최초의 돔구장인 고척 스카이돔과 최초의 팔각형 구장인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는 올해 역사적인 첫 플레이볼을 준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이제 대부분의 구장들이 2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갖췄다.

 

각자 개성이 뚜렷한 간판도 달았다.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 인천 SK 행복드림구장, 수원 kt 위즈파크,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처럼 이름부터 지역 연고와 홈 구단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게 대세다. 잠실구장, 사직구장, 마산구장 정도가 원래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메이저리그 식’이라는 수식어가 새롭지 않을 정도로 최신식 시설을 갖춘 요즘 야구장들. 그러나 낡고 허름해서 때로는 손가락질도 받았던 과거의 야구장들 역시 많은 팬들에게는 정겹고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어떤 야구장들이 프로야구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을까.
 

▲ 지난 2011년 정전사태로 삼성-두산 경기가 중단된 대구구장의 모습. / 사진제공=삼성구단


#사라진 동대문구장과 도원구장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6개 구단으로 출범했다. MBC는 서울 동대문구장, 삼미는 인천 도원구장(숭의야구장), OB는 대전구장(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해태는 광주구장(무등경기장 야구장), 삼성은 대구구장(시민운동장 야구장), 롯데는 부산 구덕구장(구덕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각각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이 가운데 동대문구장과 도원구장은 이미 철거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대문구장은 프로야구 출범 이전부터 아마 야구의 요람이자 한국 야구의 메카였다. 1925년 경성운동장 야구장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광복 이후인 1959년에 서울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했다. 1982년 3월 27일 역사적인 삼성과 MBC의 원년 개막전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초창기에는 지방 구단들이 동대문구장에서 팬 서비스 차원의 홈경기를 치렀을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었다. 

MBC가 1982년 7월 개장한 잠실구장으로 이동한 뒤에는 이름을 동대문야구장으로 바꿨고, 대전을 연고로 하던 OB가 1985년 서울로 옮겨 1년 동안 동대문을 홈구장으로 썼다. 그러나 OB가 1986년부터 MBC와 함께 다시 잠실에 둥지를 틀면서 동대문구장은 아마추어 전용구장으로 용도 변경됐다. 1989년 9월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가 잠실에서 열리는 동안, MBC가 일주일간 임시 홈구장으로 썼던 게 마지막 프로 경기였다. 그러나 2006년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 전면 철거와 재개발을 결정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야구계 전체가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현했지만, 2007년 12월부터 시작된 철거 작업은 2008년 3월에 완전히 마무리됐다.

도원구장은 1934년에 개장한 이후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지는 인천 연고팀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곳이다. 홈 플레이트부터 외야 좌우 펜스까지 91m, 가운데 펜스까지 110m로 역대 프로야구장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곳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천 연고팀에 부임하는 감독의 성향에 따라 펜스 높이가 3.5m에서 7m까지 수시로 바뀌는 변화도 감수해야 했다. 2000년 창단한 SK가 현대로부터 도원구장을 물려받았지만, 2002년 최신식 시설을 자랑하는 문학구장이 개장하면서 쓸쓸히 뒤로 밀려났다. 2003년부터는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열렸고, 2006년부터 3년간 SK 2군도 도원구장을 사용했다. 그러나 도원구장 역시 인천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개장 74년 만인 2008년 9월에 철거됐다. 현재 그 자리에는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들어섰다.
 

▲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한 장면. 구덕구장이 야구 경기 장면의 배경으로 사용됐다.


#구덕구장과 광주구장의 추억

구덕야구장은 1971년 부산 최초의 야구 전용 운동장으로 개장했다. 롯데가 원년부터 1985년까지 안방으로 사용했던 경기장이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올스타전(1982년 7월 1일 올스타 1차전)을 개최했고, 사상 최초의 사이클링히트(1982년 6월 12일 삼성 오대석)도 이곳에서 나왔다. 1986년 사직야구장이 개장하면서 롯데 홈구장의 자리를 물려줬지만, 이후에도 한동안은 부산에서 택시를 타서 “야구장에 가자”고 하면 자연스럽게 구덕야구장에 내려주는 택시기사들도 많았다는 후문이다. 동대문구장이나 도원구장과 달리, 여전히 아마추어 전용구장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에 인조잔디를 심기 전까지는 내야는 물론 외야에도 잔디 없이 흙만 깔려 있었던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야구 경기 장면의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프로야구 초창기 야구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구덕야구장이 비교적 일찌감치 프로야구와 결별했다면, 광주구장과 대구구장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야구팬들을 심장에 품고 역사를 써내려갔다. 늘 가장 낙후된 야구장이라는 오명을 달고 다녔지만, 오랜 팬들에게는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소중한 장소였다.
 

▲ 2014년 개장한 광주의 새 야구장인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왼쪽)와 홈구장 타이틀을 넘겨준 광주구장의 모습. / 연합뉴스


둘 중 먼저 작별인사를 건넨 것은 광주구장이다. 2013년 10월 4일 넥센과의 정규시즌 최종전을 마지막으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총 10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구고, 정규시즌에서 거둔 승리가 무려 1015승에 달했던 환희의 장소였다. 전신 해태부터 현재의 KIA까지 32년간 지켜온 타이거즈의 홈구장 타이틀은 바로 옆에 신축된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 넘겨줬다. 

사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야구장이었다. 1965년 제46회 전국체육대회 개최를 위해 부랴부랴 건설된 뒤 2005년까지 시설 개보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건축 당시의 상세한 자료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개축이 더 어려웠다. 비가 조금만 와도 배수가 잘 안 돼 경기가 쉽게 취소되기 일쑤였고, 2003년 7월에는 경기 도중 물방개가 출현하는 사건이 벌어져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 때문에 깔았던 인조잔디는 선수들 사이에서 “딱딱한 바닥에 카페트를 깔아 놓은 것 같다”는 혹평을 받으면서 오히려 잦은 부상의 원흉으로 지목되기까지 했다.

물론 2005년 말 펜스 확장공사를 시작으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도 보였다. 2007 시즌을 마친 뒤에는 KIA와 광주가 힘을 합쳐 인조잔디를 다시 최신형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선수들의 부상은 계속됐다. 야구장을 찾는 팬들의 불만도 갈수록 높아졌다. 광주의 야구 열기에 비해 너무 작은 관중석 규모(1만 2500석)도 문제였다. 결국 광주시는 2010년에 야구장 신설을 확정했다. 그리고 광주는 3년 만에 기존 구장보다 거의 세 배 가까이 커진, 새 타이거즈의 요람을 얻었다. 

#떠나는 대구구장, 제자리로 돌아가는 목동구장

대구구장은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와 함께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원년 야구장이다. 1948년에 처음 문을 열었으니, 무려 70년 가까운 세월을 무사히 버텨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대전구장과 달리, 대구구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열악한 환경’의 대명사로 통했다. 프로야구 출범을 앞둔 1981년에 큰 규모의 개축을 거친 게 전부였다.

단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국시리즈를 아무리 치러도 관중은 딱 1만 명밖에 못 들어왔고, 아무리 조금씩 이곳저곳을 손봐도 프로야구의 발전 속도와 팬들의 눈높이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낡고 허름하고 비좁았다. 가뜩이나 대구 날씨가 더운 데다 마땅한 그늘도 없어서 여름이면 ‘찜질방’, ‘사우나’와 같은 별명도 달고 다녔다. 2006년에는 안전진단 결과 철거가 요구되는 E등급(붕괴 위험) 판정을 받았지만, 철제 H빔으로 3루 더그아웃 위 관중석을 떠받치는 임시 처방을 해 팬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해프닝도 많이 생겼다. 더그아웃에서 쥐가 감독의 발밑을 가로질러 달아나는 일이 가끔 생겼고, 2011년에는 상대팀 선수가 기습번트를 대고 1루로 달려가는 사이 정전으로 야구장 조명이 꺼져서 서스펜디드(일시정지) 게임 처리되는 초유의 사태를 빚었다. 또 같은 해에는 ‘소방수’ 오승환의 개인통산 200세이브를 축하하는 불꽃놀이를 하다 전광판 위로 불이 나는 바람에 진짜 소방관과 소방차가 출동하기도 했다.

결국 삼성과 대구시는 연호동 대공원역 인근에 최대 2만 9000명까지 수용 가능한 규모의 새 구장(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을 지었다. 프로야구 출범 35년 만에 대구구장마저 뒤로 한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구구장이 남긴 기억은 여전히 삼성의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삼성이 2002년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 감격의 눈물을 흘린 장소이자 2003년 이승엽이 아시아 한 시즌 최다 기록인 56호 홈런을 때려낸 야구장이기도 했다. 대구구장은 올해부터 관중석 철거를 비롯한 리모델링 공사를 거친 뒤 2018년 사회인야구 전용 구장으로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 넥센을 고척 스카이돔으로 떠나보내는 목동구장은 다시 본래의 목적인 아마 전용 구장으로 돌아간다. 지난 2012년 청소년야구 한일전 모습. /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한편 넥센을 고척 스카이돔으로 떠나보내는 목동구장은 다시 본래의 목적인 아마 야구 전용 구장으로 돌아간다. 목동구장은 프로야구가 이미 출범한 뒤인 1989년에 개장했지만, 2008년 현대를 인수해 재창단한 넥센이 1군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프로야구 역사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 당시 프로야구 경기를 위해 부랴부랴 더그아웃과 관중석을 리모델링했고, 천연잔디를 인조잔디로 교체하는 작업도 했다. 중계석과 불펜도 설치해 모양새를 갖췄다.

물론 여전히 불편한 점은 많았다. 야구장 전광판 뒤에 경인고속도로가 뚫려 있어서 외야에 관중석 설치가 불가능했다. 프로야구장들 가운데 유일하게 외야 관중석이 없는 구장이었다. 또 야구장 주변이 대부분 주거 지역이라 초기에는 인근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오후 10시 이후에는 응원단 앰프 사용을 자제하기로 합의도 했다. 무엇보다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열릴 때는 목동구장을 내줘야 해 정작 넥센이 장기 원정을 떠나야 하는 불편도 겪었다. 같은 이유로 운동장 관리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목동구장은 넥센이 배출한 메이저리거 듀오 박병호(미네소타), 강정호(피츠버그)의 홈런 잔치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구장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넥센이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 목동구장의 마지막 세 시즌도 보람차게 막을 내렸다.

 

배영은 / 스포츠 자유기고가

 

일요신문 [제1243호] 

 

제2의 홈구장을 아십니까?

서울, 인천, 수원, 대전, 대구, 광주, 부산, 마산.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연고 도시들이다. 그러나 매년 이곳에서만 프로야구가 열리는 건 아니다. 이른바 ‘제2의 홈구장’을 보유하고 있는 팀들이 일부 있어서다.

2012년 7월에 완공된 포항구장은 그해 8월 한화와의 3연전을 시작으로 삼성의 두 번째 둥지가 됐다. 1만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지난해까지 1군 홈구장이었던 대구구장(1만 석)보다 오히려 규모가 컸다. 2013년과 2014년에는 당시 신생구단이던 NC 2군이 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개장 당시 가장 화제가 됐던 건 바로 ‘메이저리그 식’ 관중석.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포수 뒤편의 백스톱에 관중석이 배치돼 화제를 모았다. 삼성 장원삼이 첫 승리투수, 당시 한화 소속이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첫 패전투수였다.

무엇보다 포항은 삼성의 승률이 유독 높은 구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2012년 2승1패, 2013년 7승3패, 2014년 8승1패, 2015년 9승1패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둬 ‘약속의 땅’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삼성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이승엽도 포항에 가면 더 펄펄 날았다. 역사적인 KBO리그 사상 첫 개인통산 400호 홈런 역시 바로 포항구장에서 나왔다. 현재 지휘봉을 잡고 있는 류중일 감독의 고향 역시 포항이다.

청주구장은 한화와의 인연이 깊다. 1986년부터 한화가 제2의 홈구장으로 썼다. 처음에는 1만 석 규모로 개장했다가 2008년에 외야 등받이 좌석을 설치하면서 수용 인원이 7500석으로 줄었고, 2013년에 다시 큰 규모의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1만 500석으로 확충됐다. 그때 잔디를 천연잔디에서 인조잔디로 교체해 늘 지적받던 배수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보완했다. 다만 한가운데 펜스까지의 거리가 110m로 프로야구가 열리는 야구장들 가운데 가장 짧고, 그 탓에 홈런이 유독 잘 나와 ‘한국의 쿠어스필드’이자 ‘투수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한화의 청주구장 성적도 그리 좋지 않다. 2012년에는 대전구장 리모델링 공사가 늦어지면서 4월 한 달간 아예 청주에서 홈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롯데는 2012년 9월 개장한 울산 문수야구장을 제2의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2014년부터 10경기 안팎의 홈경기를 편성하기 시작했고, 지역에서 좋은 반응도 얻고 있다. 사실 롯데는 마산을 연고로 하는 NC가 창단하기 전까지 마산구장을 제2 구장으로 사용해왔다. 프로야구 원년이던 1982년 9월 26일 삼미와의 경기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꾸준히 마산에서 홈경기 일부를 치렀다. 2011년 NC의 창단이 승인되면서 마산과 작별했고, 울산이라는 새 집을 찾았다. 이밖에도 군산 월명야구장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KIA가 제2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야구장이다. 1990년대에는 전북을 연고로 하는 쌍방울(2000년 해체)의 제2구장으로도 쓰였다. 다만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가 개장한 이후에는 프로야구 경기를 유치하지 못하고 있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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