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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농구 (3)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3. 2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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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2. 28. 

 

와세다대학의 센터는 뒷날 우리나라의 두 번째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되는 이상백이었다. 이상백의 수준 높은 경기력에 충격을 받은 우리 선수들은 더욱 훈련에 정진해 1927년 3차 일본 원정길에 올랐고 이번에는 6승 2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 돌아왔다. 이상백배한일대학선발농구대회에 있는 그 이상백이다. 1929년 4차 원정에서 2승 2패를 기록했는데 당시 일본 농구 최강인 도쿄제국대에는 완패(스코어 미상)했으나 역시 강호인 메이지대학과는 21-22로 접전을 벌여 향상된 경기력을 확인했다. 4차 원정 명단에는 뒷날 손기정(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일장기 말살 의거를 하는 이길용과 베를린 올림픽에 장이진 염은현과 함께 출전하는 이성구가 포함돼 있다.

 

대한농구협회가 2008년 펴낸 ‘한국 농구 100년’에는 조선농구협회가 1931년 4월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총회를 열고 회장 안재홍, 부회장 김규면, 상무이사 김영구 등으로 임원진을 갖춰 출범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대한체육회가 2010년 발간한 ‘대한체육회 90년사’에서는 조선농구협회가 이보다 앞선 1925년 9월 창립돼 제 1회 농구 대회를 열었으나 서울YMCA 운동부의 농구 사업과 상충되는 바람에 제 1회 대회만 치르고 해산해 버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어 ‘한국 농구 100년’에 나온 대로 1925년 창립됐다가 한 차례 대회만 열고 해산한 조직과 명칭이 같다며 조선농구협회의 발족 시기를 1931년 4월로 적고 있다. 그리고 이때 출범한 조선농구협회는 조선체육회, 서울YMCA와 함께 농구를 지도하고 대회도 개최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농구협회는 1933년 9월 연희전문, 보성전문, 서울YMCA와 제휴해 집행부를 개편했고 일본농구협회 조선 지부와 맞서게 된다.

 

1931년 출범한 조선농구협회 임원진은 ‘한국 농구 100년’보다 ‘대한체육회 90년사’에 자세히 나와 있어 후자를 택했다. 보다 확실한 명단은 추가적인 고증이 필요할 듯하다.

 

▲ 1930년대 농구 연·보전이 끝난 뒤 두 학교 선수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 ⓒ한국 농구 100년

 

◇ 조선농구협회 창립 임원 명단 *회장=안재홍(독립지사, 뒷날 제 2대 국회의원) *부회장=김규면(제 5대 조선체육회 회장) *상임이사=김영구 최진순 *이사=이일(휘문고보) 이길용(동아일보, 손기정 일장기 말살 의거 주인공) 최등만(조선체육회) 왕조혁(백합) 김태식(중앙고보) 이병삼(동성상업) 최대환(대창) *평의원=강용수(보성고보) 김종연(협성실업) 김수기(배재고보) 김영환(숙명) 김을한(매일신보) 김정만(서울YMCA) 이세정(진명) 이원용(조선일보) 성의경(조선권투) 유두찬(동덕) 유기준(연희전문) 정문기(총독부) 최정홍(양정고보) 호정환(경성실업) 홍영후(중앙보육)

 

조선농구협회 창립에 뒤이어 1931년 4월 21일 서울YMCA 출신 농구인을 중심으로 조선농구심판협회가 조직됐고 이사로는 전성진 이건춘 장권 정인세 김화영 고인원이 선출됐다. 4월 30일 첫 이사회에서는 회장에 유억겸(제 6대·제 10대 조선체육회 회장, 제 12대 대한체육회 회장), 부회장에 현동완, 고문에 반하트를 각각 추대했다.

 

농구가 널리 보급되고 조선농구협회와 조선농구심판협회까지 생기자 조선체육회는 서울YMCA와 공동 주최, 동아일보 후원으로 전조선농구선수권대회를 창설해 첫 대회를 1931년 5월 27일부터 나흘 동안 서울YMCA 뒷마당에서 열었다. 이 대회에는 제 2고보 전숭실 보성전문 연희전문 백합 선린상업 세브란스의학전문 휘문고보 삼각 전경신 청년학관 협성실업 전주신흥 등 13개 팀이 나왔다. 결승에서 보성전문이 백합을 41-32로 물리치고 첫 챔피언이 됐다.

 

이 무렵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농구 라이벌 대결은 축구의 연·보전과 함께 장안의 화제였다. 오늘날 농구 연고전은 의미가 많이 퇴색했으나 두 학교가 우리나라 농구 발전, 특히 일제 강점기와 1950, 60년대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두 학교는 라이벌전을 바탕으로 농구의 경기력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는 연희전문이 1936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희전문은 은퇴한 지 2년여가 지난 이성구(진명여고보 교사)를 불러들여 ‘전연전’이란 이름으로 이 대회에 나서 준결승에서 일본 최강 도쿄제대를 46-38로 꺾었고 결승에서는 교토제대를 42-22로 크게 이겼다.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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