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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농구 (5)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3. 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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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3. 13.

 

그때 일부 체육인들로부터 친일파로 배척 받아 체육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농구인 이상백이 “모두 다 보낼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체육회 간부들이 그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3편에 나온 이상백은 일제 강점기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를 지내고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선수단 임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무를 맡았기 때문에 일부 체육인은 그를 친일파로 몰아세워 올림픽 선수단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견제했다.

 

그러나 다급해진 대한체육회로서는 이상백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며칠 뒤 미군정청은 올림픽 출전 한국 선수단에 관한 결정을 발표한다고 대한체육회에 통보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상백이 나타나지 않자 미군정청 관계자는 “이상백 씨는 왜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으면서 발표를 보류했다. 대한체육회 간부들은 이상백이 있는 동방문화연구소로 사람을 급히 보내 이상백을 발표장으로 불렀고 이상백이 참석하자 미군정청은 “주한 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지시로 한국의 올림픽 선수단을 모두 보내기로 했다”며 올림픽 선수단 파견에 따른 결정을 발표했다.

 

이상백은 선수단 축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지 중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움직였다. 하지 중장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윗사람이 태평양 주둔 연합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였다. 맥아더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고 1928년부터 2년 동안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체육인이다. 그때 미국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이상백과 친한 에이버리 브런디지였다.

 

1952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되는 브런디지는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하며 친한파로 활동하게 된다.아무튼 이상백은 미국에 있는 친구 브런디지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브런디지는 맥아더 원수에게 연락해 하지 중장으로 하여금 한국 올림픽 선수단을 모두 보내도록 만든 것이다.1948년 런던 올림픽 농구 대표팀은 코치 겸 선수 정상윤을 비롯해 장이진, 김정신, 방원순, 조득준, 오수철, 이상훈, 이준영, 강봉현, 안병석 등 9명으로 구성됐다. 이들 가운데 장이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경험이 있었다.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고 두 번째 대회인 런던 올림픽 농구에는 첫 대회(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승국인 미국과 준우승국인 캐나다 등 23개 나라가 출전했다.한국은 조별 리그 B조 1차전에서 벨기에를 29-27로 물리친데 이어 2차전에서 이라크를 120-20으로 대파했다. 3차전에서 필리핀에 33-35로 일격을 맞았지만 칠레를 28-21로 꺾었다. 이어 중국(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에 48-49로 졌다.

 

모든 경기를 마치고 나니 전패의 이라크를 제외하고 한국과 칠레, 벨기에, 중국, 필리핀이 모두 3승2패를 기록하는 대접전이었고 골득실차를 따져 한국이 1위, 칠레가 2위로 8강에 올랐다.한국은 8강전에서 멕시코에 32-43으로 져 5~8위 결정전으로 밀린 뒤 우루과이와 체코슬로바키아에 36-45, 38-39로 져 출전 23개국 가운데 8위를 차지했다.

 

▲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농구 대표팀이 대회를 앞두고 열린 초청 만찬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 ⓒ한국 농구 100년

 

아시아 나라 가운데 필리핀이 12위, 이란이 14위, 중국이 18위, 이라크가 22위였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독일과 함께 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1950년 6월 25일 발발한 민족상잔의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1951년 8월 부산에 있는 경남중학교 코트에서 조선운수, 육군예비사, 국방부, 육군헌병사령부, 전 부산, 제5육군병원(남녀), 저축은행(여) 등이 출전한 광복절 경축 대회가 열리는 등 농구 발전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해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열린 제 32회 전국체육대회 농구 중학부에서는 목포공업이, 남자 일반부에서는 육군본부가, 여자 일반부에서는 제5육군병원이 우승했다.전쟁 기간 열린 각종 대회의 우승 또는 준우승 팀 가운데 군팀이 많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농구도 다른 종목과 마찬가지로 군의 지원 속에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52년 10월에는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 코트에서 식산은행, 해병대, 조선운수, 대한중석, 헌병대 등이 출전한 가운데 동남아시아 원정 대표 선수를 뽑기 위한 대회가 열렸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나라의 경제력이 미약해 외국 원정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1953년 1월 원정길에 오를 수 있었다.

 

대표팀은 대만에서 6승1패,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각각 3승1패의 좋은 성적으로 올리고 귀국했다.이에 앞서 1950년 1월에는 그해 10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릴 예정인 제 1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대표 선수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가 한국은행, 전 고려대, 조선운수, 일반 선발, 전 연희대 그리고 특이하게도 중학선발군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중학선발군의 출전 문제는 논란이 있어 번외 경기로 치러졌는데 1차 리그에서 4승 1패로 전 연희대와 공동 1위를 하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2차 리그에서는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2승3패에 그쳤지만 당시 농구계에는 큰 충격이었다.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무산됐고 이후 김영수, 이동헌, 조병현, 이광우, 안영식, 최태곤 등 중학선발군 멤버들은 연희대와 고려대, 상과대에 진학해 1948년 런던 올림픽 세대의 뒤를 잇는 한국 남자 농구 2세대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신명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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