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농구 (6)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3. 19. 13:36

본문

2016. 03. 20.

 

이에 앞서 1950년 1월에는 그해 10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릴 예정인 제 1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대표 선수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가 한국은행, 전 고려대, 조선운수, 일반 선발, 전 연희대 그리고 특이하게도 중학선발군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중학선발군의 출전 문제는 논란이 있어 번외 경기로 치러졌는데 1차 리그에서 4승 1패로 전 연희대와 공동 1위를 하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2차 리그에서는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2승3패에 그쳤지만 당시 농구계에는 큰 충격이었다.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무산됐고 이후 김영수, 이동헌, 조병현, 이광우, 안영식, 최태곤 등 중학선발군 멤버들은 연희대(현 연세대)와 고려대, 상과대에 진학해 1948년 런던 올림픽 세대의 뒤를 잇는 한국 남자 농구 2세대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참화 속에서 농구도 다른 분야처럼 느리지만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1954년 여자 대표팀이 자유중국(대만) 3군체육회의 초청으로 원정길에 올라 5승2패의 전적을 남기고 돌아왔고 그해 남자 대표팀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해 4위에 그쳤다.

 

4년 뒤 도쿄에서 벌어진 제 3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4위였다. 그 무렵 아시아 남자 농구 서열은 필리핀과 대만, 일본 그리고 한국이었다. 1960년 1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도 이 서열은 변하지 않았다.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은 15개 출전국 가운데 14위에 그쳤다. 필리핀 7위 일본 10위, 대만 11위, 태국 15위였으니 이 대회에서도 아시아 서열에는 변화가 없었다.여자는 아직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니었고 세계선수권대회는 1953년 창설됐지만 첫 대회 개최지인 칠레는 멀고도 먼 나라였다. 출전은 꿈도 꾸지 못할 환경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57년 한국은행이 여자 농구부를 창단했고 뒤이어 1958년 상업은행이 여자 농구부를 만들었다. 여자 농구 금융단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여자 농구 금융단 시대는 1970년대 중반 태평양화학을 중심으로 하는 실업단이 주도권을 잡기까지 오랜 기간 이어진다.이 무렵 농구계의 현안 가운데 하나가 실내 코트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경기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1960년대 이전에도 체육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YMCA, 평양 숭실전문학교 등에 실내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규격에 맞는 실내 코트가 없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옥외 코트에서 치렀다. 해방 이후 몇몇 학교가 체육관을 지었으나 역시 경기를 하기에는 미흡했다. 1960년에 이르러 당시로는 국제 대회를 열 만한 관중석을 갖춘 정규 규격의 연세대학교 체육관이 지어져 이곳에서 일본의 릿카미싱팀과 한국팀이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지난해 1월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장충체육관은 원래 그 자리에 옥외 코트가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들이 스모(일본 씨름) 경기장을 세우려고 확보해 놓은 터였다.

 

해방 이후 그 자리에 서울시의 협조로 옥외 농구 코트가 들어섰고 한국은행이 농구대를 기증했다. 이후 민간 차원에서 실내 코트 건설 움직임이 있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옥외 코트이긴 하나 마루가 깔리고 관중석이 설치된 경기장이 육군의 주도로 건립됐다. 요즘 ‘다시 보는 대한늬우스’에 이따금 등장하는 마루가 깔린 옥외 코트에서 펼치는 농구 경기가 열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극난(남자), 양우(여자) 등 대만팀 초청 국제 경기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 이름이 육군체육관이다. 지붕이 없는 옥외 경기장인데도 ‘집 관(館)’자가 들어간 체육관이라고 한 게 특이하다. 당시 나라의 경제력으로 볼 때 큰 규모의 체육관을 짓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 1960년 3월 서울시는 900여만 원의 예산으로 기공식을 한데 이어 총 공사비 9,200만 원을 투입해 1963년 2월 1일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장충체육관을 완공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열기 위해 만든 효창구장 건설에 2억 3천만 원이 들었으니 당시 체육관 건립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당시 효창구장은 천연 잔디 구장이었으나 워낙 많은 경기가 열려 1970년대에는 완전한 맨땅 구장이 됐다. 비가 오면 논바닥이나 다름없는 진흙탕이 됐다. 몸이 무거워지는 걸 막기 위해 선수들이 스타킹에 비닐을 씌우고 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U 20 월드컵 전신) 4강 기념 사업으로 인조 잔디를 깐 게 오늘날의 효창구장이다.[사진]지난해 새 단장을 한 장충체육관은 우리나라 실내 스포츠 발전에 크게 한몫했다.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스포티비뉴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