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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피치] '라디오 야구' 의 묘미

---Inside Pitch

by econo0706 2023. 4. 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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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03. 29

 

4월의 문턱이다. 텍사스의 봄을 맞으러 갔다. 소나무 우거진 숲 속의 통나무집으로 갔다. 발치에 강물이 흐르고 등 뒤에는 산이 버티고 있는 곳. 숨을 들이켜면 꿈이 마셔졌다. 부담도 욕심도 집착도 없는 한나절이 마냥 평화로웠다. 전화도 없고 TV도 없었다. 산이 깊어 휴대전화도 무용지물이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진정 해방된 하루였다.

 

저녁이 되고 어둠이 내렸다. 달빛에 취해 있었다. 그러다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오늘 박찬호 등판경기가 있잖아….' 야구가 궁금해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집안 여기저기를 뒤져보고, 관리사무실에 TV가 있었나, 컴퓨터를 볼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헛일이었다.

 

모두 포기하고 달빛이나 더 즐길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쪽에 세워둔 차가 보였다. 그거였다. 왜 진작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라. 디. 오! 주파수를 맞췄다. AM 1080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텍사스 레인저스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계에 취했다. 얼마 만인가. 기억 저편을 더듬었다. 학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야구중계를 듣다가 정거장을 지나치곤 했던 기억. 교복 안주머니에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넣고 이어폰 줄을 소매 안쪽으로 나오게 해 귀를 만지는 척하며 수업시간에 야구중계를 훔쳐 듣던 기억. 군 졸병 시절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중계를 듣다가 고참에게 들켜 기합받던 기억…

 

라디오 중계는 TV 중계가 없거나,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단비였다. 또 TV가 갖지 못한 묘미를 전해주곤 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머리로, 마음으로 봤기에 그랬다. 거기에 박종세.김용.이규항.이장우 같은 뛰어난 캐스터가 있어 재미가 더했다. 타구음이 들리고 나서 홈런임을 확인시켜 주기까지 불과 몇 초, 그 사이에 흥분한 아나운서의 "홈런이냐, 홈런이냐…"는 몇 번이나 되풀이되며 애간장을 녹였던가. 김재박이 땅볼을 잡아 발 빠른 이해창을 아웃시키는 그 짧은 순간에 "아웃이냐…아슬아슬! (잠깐 침묵) 아웃-"같은 절묘한 기교로 초조한 가슴을 몇 박자나 빠르게 뛰게 했던가.

 

1980년대 초반, '버글스'는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로 라디오시대가 거(去)하고 비디오시대의 전성기가 왔음을 노래했다. 그러나 라디오의 묘미는 아직 싱싱하게 살아 있다. HDTV와 인터넷.휴대전화가 세상을 덮어버린 이 시절에도 라디오 중계가 갖는 차별화된 장점은 분명히 있다.

 

라디오는 깊은 산속에서, 차 안에서, 때로는 교실에서도(!) 들을 수 있다. 라디오는 보이지 않는 상황, 색깔, 날씨 등을 묘사하기에 듣는 이를 끝없이 자극할 수 있다. 무엇보다 보이는 것에 구속받지 않고 머릿속에 그려진 나만의 야구장 안에서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는 '자유'가 그 안에 있지 않는가. 

 

이태일 / 야구전문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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