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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의 母音] 마른 바람소리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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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여름의 지열(地熱)을 식히기 의해 그랬음인지 가을비답지 않게 구질구질 내렸다.
 
날이 들자 숲에서는 연일(連日) 마른 바람소리. 귀에 들리기보다 옆구리께로 스쳐가는 허허(虛虛)로운 바람소리. 그토록 청정하던 나무들이 요 며칠 사이에 수척해졌다. 나무들은 내려다 볼 것이다. 허공에 팔던 시선으로 엷어진 새 그림자를. 
 
들녘에서는 누우런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과원(果園)의 가지들은 열매의 무게로 인하여 휘어져 있다. 허공을 나는 새의 그림자들이 분주히 오고간다. 어쩔 수 없이 또 가을, 열매를 거두는 시절이 다가서고 있다.
 
가을은 중추명절(仲秋名節) 한가위를 고비로 갑자기 여문다. 물가고와는 인연이 먼 우리 조상들은 이날 "더도 덜도 말고 항상 오늘같이만"이라고 조촐한 소망을 빌었다.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감사히 여기고 넉넉한 줄 알던 선인(先人)들의 그 마음은 가을날 오후 창호(窓戶)에 번지는 햇살처럼 그지없이 아늑하고 향기로운 정복(淨福)이었다. 자기 분수를 알아 땀흘려 일하던 가슴만이 누릴 수 있는 거두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에겐 물량의 풍요와는 달리 늘 모자라기만 하다. 놀부처럼 긁어들여도 차지 않고 마시고 마셔도 갈증을 못 변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과욕이 아니라면 그만큼 마음이 엷어진 탓이다.
 
우리 다래헌의 추석은 동화책으로 지낸다. 출가사문(出家沙門)에게는 명절이 없기 때문이다. 마른 바람소리가 들려오면 불쑥 책가게를 찾아간다. 예쁜 장정과 잉크 내음이 싱싱한 동화책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올 때는 날개라도 돋칠 듯 마냥 부풀어 오른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치면 대목장 같은 것을 보아온 셈이다. 머리맡에 쌓아두고 잡히는대로 뒹굴면서 읽는다. 꿈이 담긴 동화책은 누워서 읽어야지 앉아서 읽으면 환상의 날개가 접혀지고 마니까.
 
이렇게 한동안 읽고 나면 메마른 나의 가지에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다. 흐려진 눈망울이 밝아지고 갈라진 목소리가 트이는 것 같다. 그리고 남을 서운하게 하지 않고 착하디착한 일만 하고 싶다. 이웃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
 
명절날 차를 타지 못해 타박타박 걸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길동무가 되어주고 싶다. 혼자서 엎드려 쓸쓸히 성묘하는 사람 곁에 함께 꿇어앉아 주고 싶다.
 
가을은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무게를 헤아리는 계절. 낙엽이 지는 일모(日暮)의 귀로에서 한번쯤은 오던 길을 되돌아보며 착해지고 싶은, 더도 덜도 말고 오늘 같이만이라고 정복(淨福)을 누리고 싶은 그런 계절이다. 
 
1970년 9월 4일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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