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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의 母音] 눈으로 하는 대화(對話)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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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의사(意思)를 전달하는 말의 기능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단절의 아쉬움과 벽으로 가로낙힌 답답증을 느낀다.
 
그런데, 그 말이 더러는 장바닥의 소음으로 들려올 때가 있다. 가령, 말로써 말이 많아 질 때라든가, 무슨 소린지 모르게 혼자서만 말을 독접하려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 침묵은 언어 이상의 밀도(密度)를 지니게 된다. 사실 말이란 생각에 비해 얼마나 불롼전한 것인가. 우리들이 입을 벌려 말을 하게 되면 생각은 벌써 절반이나 새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말이란 오해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가끔 바깥 모임에 참석할 경우 나는 옷빛깔만큼이나 이질감을 피우게 된다. 다른 자리에서보다도 하루 세끼의 식탁에서 초식동물적인 그 담백한 식성 때문에. 그래서 피차간에 곤란을 느낄 때가 있다.
 
식탁에서는 말보다 생각이 앞선다. 그런데 더러는 이때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투명한 마음이 있다. '두 개의 창문'에서 비쳐 나온 이쪽의 생각을 그쪽 창문을 통해 들은 것이다. 이런 걸 가리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던가. 포근한 친밀감을 느낀다.
 
수유리 숲속에 있는 하얀 집, 거기 '백운실'에 들면 나는 불완전한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두 개의 창문을 통해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생각을 전한다. 이렇게 해서 초식동물의 식성에 알맞게 싱신한 초원(草原)이 마련되는 것이다. 눈으로 하는 말은 피곤하지 읺아서 좋다.
 
어떤 모임에서나 그렇지만, 나의 관심은 주제에 못지 않게 거기 모이는 얼굴들에 있다. 전혀 생소한 사람들이 모일 경우와 지면(知面)들이 섞일 경우, 참석 여부의 회신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멍석을 깔고 하는 듯한 공식적인 대화보다도 식탁이나 사석에서 흉허물 없이 털어놓는 이야기쪽에 이끌리게 된다.
 
며칠 전 모임에도 몇몇 친면(親面)들을 실로 오랜만에 만났었다. 그런 자리가 아니라면 동시대 행정구역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업(業)이 다른 우리는 좀처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 대면(對面)만 가지고도 모임의 의미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유시간을 지하로 옮겨 흥을 돋우었다. 지하실의 인력에 끌려 몇몇 얼굴들이 늘어났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주제와는 상관도 없이 인간적인 대화를 마음껏 주고 받았다. 팔각정의 논설에서 묻은 피로가 말끔히 가시도록.
 
그런데 번번이 겪는 고충은 잠자리에서다. 그날도 언젠가처럼 나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두 분이 누워 밤새껏 계속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코로 하는 대화였다. 그 막강한 체력으로 골아대는 '대화'를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獨白)이었을 것이다. 온 밤을 고스란히 살치고 말았다. 허물은 독방만 거처해 온 이쪽에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함께 그 긴 밤의 독백에 맞장구를 칠만큼 코로 하는 독백을 익히지 못한 데 있다.
 
인간끼리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저마다의 독백에 있다. 그러한 독백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소음의 계열에 속할 것이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만이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대화를 불러 일으킨다.
 
그렇다면 태초에 말보다도 무거운, 무거운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1971년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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