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 YMCA에서는 82년 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선언이 거족적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월께 일이다. 2.8독립선언을 한 유학생 대표 송계백이 춘원 이광수가 쓴 독립요구선언서 초고(艸稿)를 모자테 속에 숨겨 쓰고 귀국해서 현상윤을 찾아갔다. 현상윤은 연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중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송계백이 찾아가게 된 것은 현상윤이 보성중학교 선배인데다가 동경유학생의 기둥노릇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초고를 내보이며 선언문 인쇄에 필요한 활자와 운동비용을 요청한 것이다.
평소에 독립을 위한 민족봉기를 염두에 두었고 그 봉기는 단결력이 강한 천도교(天道敎)가 주축이 되지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던 현상윤은 송계백을 데리고 최린을 찾아갔다. 그의 모교이기도 한 천도교 경영의 보성중학교 교장이기도 하고 이전부터 가깝게 지내며 마음을 통해온 터였다. 당시 천도교는 최린과 오세창, 권동진 세 사람이 교주 손병희를 보필하고 있었기에 이 유학생 독립선언서를 세 분이 들고 손병희에게 가 보였다.
이에 "어린 아이들이 운동을 한다 하니 우리로서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수 있겠느냐"며 최고간부회의를 열어 궐기를 결정짓기에 이른 것이라 한다.
이에 현상윤은 최남선과 접하여 동참할 것과 선언문을 기초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천도교 궐기소식을 듣던 날 밤 재동 최린의 내실에서 사인방인 최린, 송진우, 최남선, 현상윤 넷이서 은밀한 축배를 들었다.
현상윤은 고향에 내려갔다 올라온 송계백에게 유학생 독립선언문 인쇄에 필요한 국한문 활자 수천자를 최남선 경영의 신문관에서 구하고, 운동비 3000원을 정노식에게 얻어 일본으로 가게 했다. 기독교 연계의 일을 맡은 현상윤은 정노식과 모의하여 김도태를 정주에 보내 이승훈을 모셔오게 했고, 최린, 이승훈, 함태영이 한용운, 백용성과 접해 불교(佛敎)까지 연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비화는 근간에 출판된 <기당 현상윤 문집>에 실린 것으로, 2·8독립선언을 맞아 3·1절을 앞두고 그 두 민족운동의 고리를 되뇌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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