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내한(來韓)을 즈음하여 러시아와의 관계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무위(無爲)하지 않을 것 같다.
기록상 최초의 만남은 1246년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 3대군주인 정종의 즉위식 잔치에 러시아에서 보낸 축하사절과 볼모로 몽골에 가 있던 고려 왕족의 만남이요, 그 후에 있었던 관계사를 군사, 정치, 경제 세 측면으로 갈라 보면 이렇다. 이미 원나라 건국 초부터 몽골에는 외인부대를 두었는데 고려군 만호부와 아라사군 만호부를 두었으니 한·로간 만남과 교류를 소급 예상할 수 있다. 17세기에는 직접 교전(交戰)까지 했다.
나선(羅禪, 러시아)군이 자주 흑룡강을 타고 청나라 영토에 침입하자 우리나라에 두 차례에 걸쳐 원군(援軍)을 요청했다. 신유 장군이 이끈 1차 흑룡강 전투의 러시아측 기록을 보면 '이 전투에서 스테파노프 대장을 비롯, 270명이 전사하고 황제에게 바칠 담비가죽 3000장 대포 6문을 빼앗겼으며 겨우 배 한 척이 탈출했을 뿐이다'했으니 대첩(大捷)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으로는 강희제 때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갔던 오도일이 피터 대제가 강희제에게 보낸 초일급 비밀 문서를 빼내는 등 첩보전쟁도 치열했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이 벌어지고 있던 모스크바의 한쪽에서는 러시아 외상 로스토프스키와 일본군 원수 야마가다가 만나 한반도의 북반(北半)을 러시아가, 남반(南半)을 일본이 나누어 갖기로 한 은밀한 음모를 진행하기도 했다.
경제적 교류로는 북경 조선사신이 머물렀던 회동관과 아라사관이 이웃하고 있어 물물교류가 성했는데 주로 모피와 거울을 부채·종이·건어물과 교환했다고 실학자 홍대용이 사신기록에 적고 있다. 거울을 아라사(俄羅斯)의 변음(變音)인 어루쇠라 했음은 바로 아라사에서 비롯됐을 만큼 알려진 교역품으로 한·소교류의 상징적 마스코트랄 수가 있다.
푸틴 대통령은 세계 최대의 가스유전 개발에 중국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을 참여시켰고 경협(經協) 차관(借款)과 연계시켜 방위산업 원자재 대한수출에도 적극성을 보이며 특히 한반도와 시베리아를 잇는 횡단철도에 적극적이다.
아·태지역에 대한 꾸준한 그의 관심이 말해주듯 군사 강국의 영화(榮華)를 돌이키려 들 것이며 남·북한 문제를 두고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려 들 것이다. 그가 들고 온 어루쇠가 경제·군사·정치에 어떻게 반영될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