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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라운지] 아주 작은 것

--이용균 야구

by econo0706 2023. 2. 17.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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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5. 27

 

“혹시 그거 알아요?” 삼성 허삼영 전력분석과장이 물었다. “타이밍의 달인.” 타이밍의 달인? “타자 중에서도 투수의 타이밍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타자가 있어요”라고 했다. “슬슬 리듬을 타면서 결국 투수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지게 만들어요.” 언뜻, 곤충을 잡아먹는 식충식물이 떠올랐다. 파리지옥. 누구냐고 물었더니. “물론 양준혁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통산타율 3할2푼. 볼은 건드리지 않는 뛰어난 선구안. 무슨 공이든 칠 것 같은 공격적인 성향. 결국 순간의 실수가 실투. 안타, 또는 홈런. 대부분의 투수들에게 양준혁은 ‘파리지옥’이다. 자신의 타이밍을 오히려 타자의 그것에 빼앗겨 버리기 일쑤다. 비록 잠시 2군에 내려가 있지만 양준혁은 그래서 무섭다.

 

그도 도저히 타이밍을 뺏지 못하는 투수가 있다. 두산 이혜천이다. 제멋대로의 리듬에 제멋대로의 공이 들어온다. 느리면 또 모를까 한때 150㎞짜리 공을 던졌다. 양준혁은 언제부턴가 아예 이혜천이 선발인 날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다. 괜히 타석에 들어섰다가 오히려 자신의 타격 리듬을 망친다. 그날 안타를 못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제멋대로 리듬에 말려 타격 밸런스가 무너지기 일쑤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야구는 이렇게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무너지고 살아난다. 작다고 무시했다가는 큰일난다.

 

한화 투수 최영필은 올 시즌 한때 8경기 연속 무자책 행진을 이어갔다. 덩달아 팀 성적도 치고 올라갔다. 최영필은 “공 끝이 좋아서 누구라도 자신 있었다”고 했다. 조금 무리했다. 결국 연속 무자책이 깨졌다. 그러다 5월14일 KIA전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3-5로 뒤진 8회 무사 1루에 마운드에 올라 이재주에게 볼넷. 그리고 김선빈을 맞았다. 누가 봐도 보내기 번트 상황. 그런데 김선빈이 문제였다. 1m64의 프로야구 역대 최단신. 잔뜩 웅크린 채로 준비하고 있는 번트 상황. 최영필은 “자꾸만 포수 미트 대신 웅크린 김선빈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스트레이트 볼넷. “굉장히 창피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투구 밸런스가 흐트러졌다. 유격수 실책이 겹쳤다지만 24일 선발등판에서 3과 3분의 2이닝 6실점(4자책)으로 부진했다. “아주 작은 게 리듬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거 회복하려고 러닝부터 다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삼성의 새 4번 타자는 박석민이다. 한국의 유일한 ‘맨손타법’ 타자다. 2004년 입단할 때 한대화 수석 코치로부터 “맨손으로 쳐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듣고 장갑을 벗었다. 박석민은 “아주 작은 느낌도 전부 배트로부터 전해진다”면서 “배트가 나에게 말을 건다”고 말한다. “아픔? 하도 휘둘러대서 이제 고통도 아니다”란다.

 

야구는 작은 것부터, 세상도 마찬가지. 밤마다 작은 촛불들이 서울 한복판에 켜지고 있다. 촛불은 작지만, 결과는 크다. 함부로 끄려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다.

 

이용균 기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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