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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멋져!”

구시렁 구시렁

by econo0706 2007. 3. 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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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창가를 바라보며 술 한 잔 생각에 입맛을 다시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먹은 술은 몇 잔이나 될까?'하는…
 
재수 시절 처음 술이란 것을 입에 대었으니 대충 잡아도 30여 년. 그중 군대생활 3년 동안은 매일 가신 것은 아닐 터이니 그 기간을 빼어 30년 이라고 가정하면 365x30=10.950. 1년 중 30일 정도는 안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잡아 1만 일. 한 번 술을 시작하면 소주든 맥주든 양주든 20잔 정도는 먹었던 것 같으니 20만 잔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술을 먹을 때마다 상대방하고 잔을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이 술자리의 추렴새도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세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그냥 '건배!'라고 했던 것이, '위하여!'로 변했고, 그 이후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 속에 '지화자'도 생겼었으며,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자'는 '개나발'을 비롯해, '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해서'라는 '나가자' 등의 여러 말들이 오가는 술잔 속의 싹트는 우정을 위해 생겨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아주 새로운 추임새를 하나 배웠다. 이 선배는 지난 번 '여자를 얻는 다섯 가장 방법'에서 '주객5도'를 가르쳐 줬던 바로 그 선배인데 이번에도 한 수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술잔을 부딪치며 조용한 목소리로 '당신 멋져'라고 하는 것이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아니 이 양반이 왜 이러시나?'하는 생각에 다시 쳐다보았더니 이 선배가 정색을 하고 그 추임새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당'은 '당당하게 살자', '신'은 '신나게 살자', '멋'은 '멋지게 살자'라는 뜻으로 지금까지의 추임새와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져'가 내 마음에 일품(一品)으로 와 닿았다. '져'는 '우리도 이제는 한 번쯤은 져주고 살아보자'라는 뜻이란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자리의 추임새로 '져주고 살자'라니…
 
그러면서 내 인생이 뒤돌아보아졌다. 언제 한 번이라도 남에게 져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한 번도, 진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경쟁(競爭)에서는 반드시 승리(勝利)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인교육(全人敎育)을 모든 것에서 1등을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더구나 그냥 1등도 아니고, 전과목(全科目)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저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고, 달리게 하고 또 달리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국산사자음미실체', 그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미술, 실과, 체육 중 어느 한 과목만 못해도 큰일이 나는 줄 알고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시험에 오선지에 그린 악보 중 맞는 것을 찾으라는 문제가 나온다고 5·6학년 교과서에 나온 음악을 통째로 외웠으며, 턱걸이 6번을 못하면 감점이 된다고 하여 방과 후 보충체육까지 하면서 이 나라에서 살아왔다.
 
물론 덕분에 지금도 우리나라 산맥의 이름은 '강적묘언멸마광차노소'이며, 동해에서 나는 수산물은 '명청대오고꽁'이라는 우수한 기억력을 소지하게 됐으며, 6학년 음악책에 나왔던 '옹달샘'의 계명(係名)이 '미솔도미솔 파라라 솔시레파미레도'라는 걸 외우는 덕분에 가끔 노래방에서 별 희한한 놈 다본다는 시선 속에서도 우쭐 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 그런 놈이 나 하나뿐이란 말인가. 그렇게 열심히 1등을 위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건만 아직까지 1등 자리를 차지한 적은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1등 만능주의자가 나 하나뿐이 아닌 온 국민이다 보니 우리나라는 1등이 아니면 도저히 대우받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별로 많지도 않은 인구가,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 사는 이 척박한 나라에서 축구도 1등, 야구도 1등, 영화도 1등, 음악도 1등, 문학도 1등, 과학도 1등…을 바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우리는 절대적(絶對的) 1등보다 상대적(相對的) 1등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애가 1등을 못하는 건 참을 수 있으나 옆집 애가 우리 애보다 등수가 높은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음에 태권도, 피아노, 주산, 논술, 영어에다 발레, 컴퓨터까지… 다니는 아이도, 보내는 부모도 아이 앞에 학원차가 서기 전까지는 도대체 내가 오늘 어디로 가야하는 지도 모르고 허둥대며 살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차피 경쟁을 위해 나선 자리니까 누구나 1등을 목표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것까지야 누구도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 돼도 좋으나 쟤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한다면 그것은 이미 경쟁(競爭)이 아니라 전쟁(戰爭)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울타리 속에서 같은 마음으로 출사표(出師表)를 던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현상일 것이다.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아주 기분 좋지 않은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제쳐 놓고도 말이다.
 
한 번 모이기를 바란다. 모이면 악수만 하고 얼른 얼굴을 돌리지 말고 같이 앉아 토론하고,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며 열심히 싸우기 바란다. 그리고 끝나면 그냥 헤어져 자기 팀들에게로 돌아가지 말고, 조촐한 뒤풀이 장소를 만들어 술이라도 한 잔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꼭 이렇게 추임새를 넣기를 바란다. "당신 멋져"라고.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경쟁하고, 한 번쯤 지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 그 다음을 위해 다시 추스를 수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 한 번쯤은 지더라도 박수를 받는 사람이 나오는 대한민국이 되지도 않았는가 말이다.
 

2007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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