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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육상 (9)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1. 2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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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10

 

1958년 5월 24일부터 6월 1일까지 도쿄에서 열린 제 3회 아시아경기대회에 한국은 14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이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 선수단을 보낸 것은 일본에 살고 있는 많은 동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창훈의 마라톤 우승은 재일동포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6개국 9명의 선수가 출전한 마라톤 우승은 한국의 이창훈과 임종우, 일본의 사다나가 노부요시의 대결로 예상하고 있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도 쓰게 되는 메인 스타디움을 출발해 도쿄 서북방의 나리마스를 왕복하는 코스에서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는 도쿄 시내 연도에 나온 많은 재일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 선수들에게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찬 감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재일동포들은 다른 어느 종목보다 한국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열망하고 있었다. 2년 전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에서 4위에 올랐던 이창훈은 무더위를 이겨 내며 힘껏 달려 8만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메인 스타디움으로 들어왔고 2시간32분55초로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2위는 예상 외로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의 미퉁 나우(2시간42분46초), 3위는 사다나가 노부요시(2시간43분44초)였다.

 

경기가 끝난 뒤 이창훈은 “무더위 탓에 달리면서 정신이 아련해지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연도에서 응원하는 동포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달릴 수 있었다. 결승점에 들어섰을 때는 거의 의식이 없어진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때까지가 한국 마라톤의 제2 황금기에 해당한다. 제1 황금기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1위, 남승용이 3위를 각각 차지했던 1930년대 후반이다. 제2 황금기는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서윤복의 우승, 1950년 보스턴 마라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의 1, 2, 3위 싹쓸이,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최윤칠의 4위 그리고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이창훈의 4위와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이창훈의 우승이 이뤄진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다.

 

이창훈은 서윤복, 함기용 등과 함께 손기정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손기정은 조국이 광복되자 안암동 자택에 ‘마라톤 선수 합숙소’라는 간판을 달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마라톤 유망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훈련시켰다. 이어 1946년 만들어진 마라톤보급회는 위원장에 권태하, 총무에 김은재 그리고 남승용과 손기정이 지도원을 맡았다. 손기정처럼 세계 최고기록을 세운 데다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은퇴 뒤에는 세계적인 선수를 여러 명 키워 낸 마라톤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멀리뛰기에서 우승한 서영주(가운데)가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1958년 아시아경기대회 육상경기에서는 마라톤 금메달 외에 남자 멀리뛰기에서 서영주가 금메달을 보탰다. 그러나 종목 종합 순위에서 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독립하기 전 나라)과 인도, 필리핀, 중화민국(국내에서는 자유중국으로 호칭, 오늘날의 대만) 등에 밀려 6위에 그쳤다. 전체 종합 순위는 일본과 필리핀에 이어 3위였다. 반세기 전에도 한국 스포츠는 기초 종목인 육상경기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다. <10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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