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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육상 (7)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1. 2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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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9. 2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해 한반도 전체가 기쁨의 도가니가 된 가운데 1936년 8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제17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부터 수상(수영), 권투(복싱), 탁구 등 3개 종목이 추가됐다. 대회 운영을 위한 인적 자원의 부족과 경기장 마련 등의 문제로 이 대회는 거의 두 달에 걸쳐 열리게 된다.

 

종목별 경기 성적 가운데 육상경기 100m에서 한철호(공덕구락부)가 11초3으로, 1만m는 이 종목의 1인자인 유장춘(체신)이 34분20초4로 우승했다.

 

조선체육회는 1937년 9월 8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제18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인기가 시들어 가는 야구를 빼고 배구를 새로 넣었다.

 

육상경기는 배재고보가 강세를 보였다. 100m에서 박춘배가 12초로 우승했고 5000m는 유관흥이 17분7초5로 1위를 차지했다. 높이뛰기는 정한영(경성)이 1m63으로 우승자가 됐고 멀리뛰기는 김시환(배재고보)이 6m18로 패권을 차지했다.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일장기가 말살된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와 일장기 말살 의거를 일으킨 이길용 선생(오른쪽) / ⓒ대한체육회

 

일본인들이 조직한 대회이긴 하지만 육상을 비롯한 여러 종목의 발전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회가 있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에, 착공한 지 7년 만인 1925년 9월 조선신궁(정식 명칭은 조선메이지신궁) 완공에 맞춰 준공된 경성운동장(뒷날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그해 10월 제1회 조선신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기 3년 전인 1942년까지 계속됐다. 조선신궁경기대회는 1924년 도쿄 메이지신궁경기장에서 열리기 시작한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조선 지역 대표를 뽑는 선발전을 겸했다.

 

메이지신궁경기대회는 매년 또는 격년제로 개최됐으나 1932년 제6회 대회까지 한국인 선수들의 참가를 받아 주지 않다가 1933년 제7회 대회부터 한국인 선수들이 출전하게 됐다.

 

1933년 제7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 육상의 명문 양정고보가 중등부 800m 계주 우승을 차지했다. 2년 뒤인 1935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는 마라톤의 손기정이 2시간26분42초의 세계 최고 기록으로 우승했다. 축구 일반부에서는 김용식과 김영근, 이유형, 이영민, 채금석 등이 활약한 경성축구단이 우승의 영예를 차지했다.

 

1937년 제9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유장춘이 1위로 골인해 전 대회 손기정에 이어 한국인 선수가 2연속 우승했다. 1939년 제10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오동우가 1위를 차지해 한국인 선수의 3연속 우승을 실현했고 육상 1만m에서는 유장춘이 우승했다. 육상경기 장거리는 한국인 선수들의 독무대였다.

 

1940년 제11회 메이지신궁대회부터는 매년 개최로 바뀌지만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이 장기전의 수렁에 빠져 있는 데다 제2차 세계대전을에 들어가기 1년 전 이었던 탓에 이른바 국방 경기가 대두돼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41년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해로 그해 열린 제12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 육상 여자 중등부 100m에서 정임순(이화)이 우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메이지신궁경기대회 육상 남자 중등부 400m에서는 김기준(배재중학)이 우승했다. <8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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