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육상 (8)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1. 23. 19:26

본문

2016. 10. 03.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가 끝나면서 태극기를 단 우리나라 마라토너들이 신생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2시간25분39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1897년 제 1회 대회를 연 전통 있는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은 온 국민을 기쁨에 들뜨게 만들었다. 서윤복은 이 대회 첫 아시아인 우승자였다. 미국에서 열린 각종 행사에 참석한 뒤 태평양을 건너는 배를 타고 6월 22일 인천항을 거쳐 귀국한 손기정 감독(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과 서윤복, 남승용 선수(1936년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다.

 

1947년 10월 13일부터 1주일 동안 조선올림픽대회(제 28회 전국체육대회)는 3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육상에서는 최윤칠이 1만m와 마라톤을 제패해 두각을 나타냈다. 최윤칠은 1948년 7월 29일부터 8월14일까지 열린 제 14회 런던 올림픽에출전해 40km 지점까지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근육통을 일으키는 바람에 손기정에 이은 한국인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2연속 우승의 꿈이 깨졌다. 1950년 4월 19일 열린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는 함기용(2시간32분29초)과 송길윤(2시간35분58초), 최윤칠(2시간39분47초)이 1~3위를 휩쓰는 쾌거를 이뤘다. 보스턴 마라톤대회는 이렇게 한국과 오랜 인연이 있는데 이봉주가 2001년 대회에서 2시간9분43초로 우승해 인연의 끈을 다시 이었다.

 

▲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3위를 휩쓴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왼쪽부터) / ⓒ대한체육회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열린 제 15회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에서 2연속 출전한 최윤칠은 2시간26분36초로 올림픽 기록을 깨뜨리고도 4위에 그쳤다. 3위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얀손에게 29초 뒤졌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이창훈이 2시간28분45초로 4위를 기록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한 최윤칠에 이어 한국 마라톤은 올림픽에서 2회 연속 4위를 했다.

 

뒷날 이창훈은 “마라톤 경기가 열린 날 날씨가 무척 더웠다. 그래서 출발을 앞두고 오후 3시18분쯤 선수들을 모두 주 경기장 안에 냉방이 잘돼 있는 방에 대기시켰다. 실내 온도가 너무 낮아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때는 나이도 어려 대회 본부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가운 기운을 꾹 참고 출발 시간이 다 돼 밖으로 나가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밖에 나와 보니 헬싱키 올림픽 우승자인 체코의 ‘인간 기관차’에밀 자토펙 등은 땀을 뻘뻘 흘리며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동이 늦게 걸리는 스타일이라 경기 전에 워밍업을 충분히 해야 된다. 스타트를 한 뒤 한참을 달려도 몸이 풀리지 않았고 어느 순간 온몸에 땀이 쫙 흐르면서 몸이 풀리자 몸이 가뿐해지면서 스피드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메달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창훈은 37km 지점에서 헬싱키 올림픽 우승자 자토펙을 제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으나 3위인 핀란드의 베이코 카르보넨이 기록한 2시간27분47초보다 58초 늦어 동메달을 놓쳤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창훈이 제대로 워밍업만 했더라면 메달권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이창훈은 2년 뒤인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돼 올림픽 4위의 아쉬움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9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스포티비뉴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