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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양신' 양준혁의 전력질주

---KBO Legends

by econo0706 2009. 2. 1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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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양준혁 일러스트 / 출처=KBO

 

타격의 달인과 '양신'의 첫 만남

 

그날 학교 훈련장으로 찾아온 손님은 ‘달인’이었다. ‘타격의 달인’이었다. 1985년 이른 봄, 대구 경운중학교 3학년이던 양준혁은 그해 입학 예정이던 대구상고 야구부에 합류해 있던 중 우상을 만났다. 도성세 대구상고 감독이 대구상고 후배이기도 한 장효조를 임시 인스트럭터로 초빙한 것이었다. 장효조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이후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바로 타율 1위로 타격왕(0.369)에 오르는 등 국가대표 시절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야구부원 모두가 눈을 반짝인 그날, 양준혁은 그 중에서도 눈을 가장 크게 떴다. 소년 양준혁은 장효조에게도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장효조는 어린 후배들을 가르치고 떠나는 자리에서 도 감독에게 양준혁을 가리켰다.


“저 녀석, 볼수록 정말 괜찮네요. 한번 키워보세요.”

 

‘우상’ 장효조를 만난 그날

 

자부심을 가슴에 새긴 날이었다. 아마도 양준혁의 ‘야구관’ 또한 그 즈음 형성됐다. 양준혁은 당시 장효조 선배에게 들었던 얘기를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보니 장효조 선배님 지론이셨어요. 대뜸, 그러시는 거예요. 3타수 무안타는 괜찮지만, 4타수 무안타는 안된다고요. 볼넷으로라도 매경기 한번은 출루해야 한다고요.”

 

양준혁은 장효조로부터 타석에서 볼 보는 법을 배웠다. “눈을 크게 뜨고 몸 앞으로 볼을 불러들이듯 본다”고 표현했다.

 

▲ ‘많이 살아나가고, 덜 죽는 게 야구 잘하는 것’ 이것이 달인에게 배운 양준혁의 야구 철학이다. / 사진 출처=KBO

 

양준혁이 2010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당시에는 KBO리그 통산 기록을 9개나 보유했다. 후배들의 추격에 이제는 단 한 부문만을 손에 남겨두고 있다. 스스로 가장 값지게 여겼던 통산 4사구다. 양준혁은 통산 볼넷 1278개를 얻었다. 사구도 102개를 기록해 통산 1379개의 4사구를 기록했다.

 

양준혁 야구의 뿌리는 많은 안타를 치고 자주 출루하는 장효조 야구와 닿아있다. 양준혁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야구 지론은 많이 살아나가고, 덜 죽는 것이다. 그게 야구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90년대 중반, 삼성 라이온즈 전설적 클린업트리오의 멤버였던 김성래(왼쪽)와 양준혁(오른쪽) / 사진 출처=KBO

 

초창기 한국프로야구 ‘편견’과 싸운 시간들

 

양준혁은 영남대 졸업 후 상무를 거쳐 1993년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방위병 복무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106경기만을 뛰면서도 타율 1위(0.341)와 함께 23홈런 90타점으로 두 부문에서 2위에 올렸다. 4사구도 69개나 얻었다.

 

국내프로야구에서는 ‘괴물타자’라는 타이틀을 처음으로 달 만큼 인상적이던 이국적 스윙으로 리그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맞은 바람도 적잖았다. 양준혁의 스윙에 대한 ‘야구쟁이’들의 평가가 한결 같이 좋은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초창기 프로야구 연장선상에서 타자들은 방망이 중심에 공을 맞히는 게 최우선이던 시대다. 다운스윙 또는 수평으로 돌리는 레벨스윙이 강조되던 때다. 오픈스탠스로 잔뜩 움츠려있다가 폭발하듯 팔로스로를 한 뒤에도 뭔가 개운치 않다는듯 두세 번씩 어깨를 들썩거리는 양준혁의 스윙은 그 당시 잣대로는 ‘별나라 타법’이었다. 이질감을 느끼는 눈들이 많았다. 핀잔도 적잖았다. 양준혁에게는 스트레스였다.

 

▲ 김성래와 양준혁. 93년 프로야구 MVP와 신인왕 투표에서 각각 1위를 확정 지은 뒤 함께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 사진 출처=KBO

 

“야구 하시는 선배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98m만 넘겨도 홈런인데 왜 굳이 150m 이상 보낼 것처럼 그렇게 풀스윙을 해? 너는 툭 갖다대도 넘길 수 있잖아’, 이런 식의 얘기였어요.”

 

어찌 보면 양준혁은 20~30년은 시대를 선행한 야구를 했다. 지금은 KBO리그에서도 기동력으로 승부하는 일부 교타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타자들이 풀스윙을 한다. 지도자들 또한 자기 스윙을 100% 다 하는 것을 권장한다. 양준혁이 요즘 타자들의 스윙의 보며 과거의 여러 장면을 오버랩시키는 이유다.

 

“출루라든가 기본적인 접근법에서 장효조 선배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것을 기본으로 진화시키면서 제 스윙 스타일을 만들었어요. 무엇보다 임팩트 순간에 후려패듯 때리는 게 달랐죠.”

 

그 당시에는 볼넷을 자주 골라내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중심타자라면 모름지기 ‘때려야한다’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로 출루율의 가치가 지금처럼 부각되지 않던 때다. 양준혁은 툭하면 ‘아니 무슨, 4번타자가 쳐야지, 걸어나갈 생각을 하냐’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어쩌면 양준혁은 지금은 흔히 얘기하는 ‘눈의 야구’를 그 당시 하고 있었다. 홍창기(LG)와 정은원(한화) 같은 출루형 타자들이 리그의 흐름을 주도하는 요즘 프로야구와 대비해 보자면 양준혁은 이 대목에서도 시대를 앞선 야구를 했다.

 

아마도 20~30년쯤…시대를 선행하다

 

그래서 양준혁은 당시에 당연한듯 쓰던 클래식 기록의 잣대보다는 현대적 기록으로 해부했을 때 더욱 돋보이는 타자였다. 양준혁은 타격왕 4차례에 안타왕 2차례 오르는 등 여러 상을 받으면서도 ‘2인자’라는 그늘에 가려 있었다. 홈런 2위에만 3차례 오르는 등 실제로 2위로 시즌을 마친 부문이 유난히 많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흔히 쓰는 세이버매트릭스를 적용하면 양준혁의 야구는 더욱 도드라진다. 양준혁은 타자 평가의 잣대로 이제는 보편화돼있는 OPS(출루율+장타율) 통산 수치로 0.950를 기록했다. 3000타석 이상을 소화한 역대 KBO리그 타자 가운데 양준혁보다 통산 OPS가 좋은 타자는 통산 최다홈런(467개)을 배경으로 OPS 0.960을 기록한 이승엽 뿐이다.

 

바야흐로 지금은 WAR(대체선수대비승수기여도)의 시대이기도 하다. 기록전문 사이트인 스탯티즈에 따르면 통산 WAR(대체선수대비승수기여도)에서도 양준혁의 누적 기록은 87.22 이른다. KBO리그 역대 전체 야수 가운데 1위다.

 

양준혁은 1999년 해태로 트레이드된 뒤 2시즌째 LG에서 뛴 2001년 가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취득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2000년 타율 0.355로 타격왕에 오르는 등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선수협회 주동자로 낙인되면서 전구단의 외면을 받았다. 구단 사이의 은밀한 담합이 가능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당시 삼성 사령탑으로 영향력이 크던 김응용 감독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구단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KBO리그 울타리를 벗어나 선수생활 후반기를 맞았을 지도 모른다.

 

위태롭던 그 시절, 한줄기 희망이 돼준 것이 그의 이력이자 기록이었다. 양준혁은 당시 최희섭의 미국 에이전트이기도 했던 이치훈씨에게 “미국 팀을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하며 비상구를 찾았다. 그리고 반응이 왔다.

 

“영상과 기록을 보냈지만, 확신은 못했어요. 메이저리그라는 곳이 적어도 2~3년은 선수를 지켜보고 판단을 하는 곳이잖아요. 그러던 중에 뉴욕 메츠에서 응답이 왔어요. 삼진 대비 볼넷 같은 제 기록을 인상적으로 봤다고 들었어요.”

 

당시 메츠에서는 일본프로야구 스타 출신인 신조 쓰요시가 외야수로 뛰고 있었다. 아시아 선수들에 눈을 뜨던 메츠에서는 ‘신조보다 낫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에 메츠행이 현실화돼가던 터에 삼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응용 감독이 얽힌 실타래를 푼 것이었다. 양준혁은 김 감독이 내민 손을 잡고 고향팀 품에 다시 안겼다.

 

▲ 양준혁의 트레이드마크 만세타법 / 사진 출처=KBO

 

만세타법 탄생의 숨겨진 이야기

 

2002년 11월10일 대구 시민구장 전광판에 ‘20년 불비불명(不飛不鳴) 웅비(雄飛) 삼성 라이온즈’라고 적힌 플랜카드가 걸렸다. 21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못했던 삼성이 마침내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는 뜻이었다. 삼성은 ‘한(恨) 많은 팀이었다.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 이력이 있었지만 포스트시즌에만 오르면 힘을 쓰지 못했다. 이날이 바로 가을야구를 통해서는 처음으로 챔피언이 된 날이었다. 대구 시민구장은 감격에 젖었다. 이날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동점 3점홈런을 쏘아올린 이승엽과 끝내기 홈런을 때린 마해영만이 영웅은 아니었다. 선수 리더로 팀을 이끌던 양준혁 또한 삼성 복귀 첫 시즌에 우승컵을 가슴에 품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나 양준혁은 그 여운을 오래 즐길 여유가 없었다. KBO리그 역사상 장효조에 이어 2번째로 ‘방망이를 거꾸로 들어도 3할은 친다’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양준혁은 프로 데뷔 이후 그해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놓쳤다. 타율 0.276로 부진 속에 시즌을 마쳤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부진 이유는 분명했다. 양준혁은 그 즈음 양쪽 어깨 통증에 신음하고 있었다. 정밀 진단 결과, 양쪽 어깨에 물이 잔뜩 차올라 있었다. 양준혁은 외부로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기동력도 있었다. 도루 20개를 넘긴 시즌이 4차례나 된다. 습관적으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위풍당당’이라는 별명처럼 큰 체구를 땅에 떨어뜨릴 때마다 양쪽 어깨는 조금씩 병들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지만, 양준혁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살을 째고 수술 해야한다고 하더라고요. 완전히 회복하려면 1년 가까이 걸리겠더라고요. 나이 서른 중반을 바라볼 때예요. 자칫 선수생활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다른 방법을 찾았죠.”

 

병원을 찾아다닌 끝에 수술 대신 시술을 했다. 주사기로 어깨에 차 있던 물만 빼내는 타협점을 찾은 뒤 다시 방망이를 들었다. 그 이후로 밤낮으로 고민해 개발한 것이 ‘만세타법’이었다. 만세타법은 팔로스로를 한 뒤 마치 만세를 하는 것처럼 두 팔을 들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준혁은 어깨에 무리를 최소화하는 타법을 찾았다. 검객이 칼로 내리치거나 복서가 강한 잽을 날릴 때 타격한 뒤 검이나 주먹을 원상태로 빠르게 거둬들이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었다.

 

양준혁은 어깨 부상 이후 타격 뒤 큰 원을 그리며 팔로스로를 하는 것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임팩트 이후 몸쪽으로 팔을 접는 듯 당겨 어깨 부담을 최소화한 뒤 만세하듯 들어올리는 그림을 만들었다.

 

“2003년 하와이 캠프에 가서 연구하고, 실패하고, 다시 연구하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요약하자면, 맞는 순간 빨래를 쥐어짜듯 안으로 감았다가 풀 때 한 팔을 놔주면서 던져주는 거예요.”

 

양준혁은 만세타법으로 제2의 전성기를 연다. 2003년 타율 0.329에 개인 최다인 시즌 홈런 33개로 완벽히 부활한다.

 

삼성이 전부는 아니었다…해태에서도 배웠다

 

양준혁은 삼성 입단을 위해 ‘1년 재수’를 받아들일 만큼 고향팀을 사랑했다. 1992년 삼성이 투수 김태한을 지명하고 2차 드래프트로 나온 양준혁을 전년도 꼴찌팀 OB에서 잡으려 적극 회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OB 운영팀장이던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말하자면 ‘백지계약서’를 내밀었다. 대구 집까지 찾아가 삼성이 김태한에게 대우하는 것보다 더 잘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그때의 양준혁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양준혁을 지명한 팀은 쌍방울이었다. 그러나 실속 없는 선택이었디. 쌍방울은 지명권 1장만 허공에 날린다. 상무 입대로 한 시즌을 보낸 양준혁은 쌍방울의 지명권이 소멸된 이듬해 삼성 1차지명 선수로 파란 유니폼을 입는다. 양준혁은 그때만 하더라도 자신 만큼은 영원한 ‘삼성맨’일 줄 알았다.

 

양준혁은 1999시즌을 앞두고 해태로 트레이드 된다. 삼성은 투수 임창용을 받는 대가로 양준혁을 내준다. 양준혁은 섭섭함에 트레이드를 거부한다. 이 때 역시 “1년 뒤 다른 팀으로 보내주겠다”는 김응용 당시 해태 감독의 다독임으로 트레이드를 받아들였다. 해태행은 반전이었다. 양준혁은 “해태에서 정말 야구를 많이 배웠다”고 당시를 기억한다.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광주로 이사한 첫날이었다. 아파트 앞에 해태 오철민과 곽현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남대 후배이기도 둘은 당연한듯 이삿짐을 나르고 집 정리를 도왔다.

 

또 하루는 투수 강태원이 집들이를 하는 날이었다. 양준혁은 강태원과 친분도 없는 데다 가까운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일부러 도착 시각을 늦췄다. 쭈뼛쭈뼛 집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양준혁은 깜짝 놀랐다. 해태 후배들을 물론 김정수와 최해식 등 선배들까지도 모두 숟가락을 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양준혁이 자리에 앉고서야 식사는 시작됐다.

 

“해태가 이래서 우승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구나, 그런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받았어요. 큰 승부에 들어갈 때마다 그 힘으로 하나로 뭉쳤던 거예요. 제가 삼성에만 있었다면 우물 안 개구리였을 겁니다.”

 

‘만세타법’으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지만 그 또한 영원할 수는 없었다. 양준혁은 2009년 생애 처음으로 다리를 다친다. 종아리 부상으로 한달 이상 전력에서 이탈했다. 나이 든 선수에게 하체 부상은 치명적이다. 더구나 선동열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현장에서 ‘세대교체’에 속도를 내던 때다. 양준혁은 그해 역시 82경기만 출전한 가운데서도 타율 0.329를 기록했지만, 2010년 들어 입지가 급속도로 좁아졌다.

 

서글펐지만 아름다웠던 마지막 시즌

 

급기야 2010년 전반기가 끝날 무렵 구단 운영팀장으로 ‘잠깐 보자’는 연락이 왔다. 예상을 하고 찾아간 자리. 역시 은퇴 얘기였다.

 

“빙빙 돌려서 어렵게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먼저 답했어요. 아마도 10초도 되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아요. 사실, 벌써부터 마음 속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거든요.”

 

구단에서는 이 자리에서 ‘조건 없이 풀어줄 수도 있다’는 입장도 전했다. 그 사이, 당시 SK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 왔고,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가슴 안 어딘가에서 꿈틀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선수생활 말미에 삼성을 떠났던 선배들의 모습도 아련히 떠올랐다. 결국 양준혁은 삼성에서의 은퇴식과 영구결번을 선택했다.

 

▲ 2010년 양준혁의 은퇴식

 

김성근 감독과 대면한 것은 얼마 뒤 올스타전에서였다. 은퇴를 결정하고 맞이한 올스타 브레이크에서 낚시터로 마음을 정리하러 떠나던 중에 구단 매니저의 전화가 왔다. 대구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에 출전해야한다는 얘기였다. SK 박정권이 부상으로 출전을 포기한 가운데 동군 감독이던 김 감독이 대체선수로 양준혁을 추천한 것이었다.

 

차를 돌려 다시 대구행.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하루였다. 양준혁은 그날 김 감독에게 “그만 두겠습니다”라며 은퇴 결정 사실을 전했다.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김 감독은 양준혁에게 마지막 올스타전을 선물했고, 양준혁은 경기 감각이 뚝 떨어진 가운데서도 멋진 홈런으로 화답했다. 6회 수비에서 두산의 김현수 대신 좌익수로 출전한 뒤 7회 추격의 3점홈런을 쏘아올렸다. 양준혁은 ‘양준혁’을 연호하는 대구팬들 함성 속에서 사실상의 은퇴경기를 하고 있었다.

 

대타 위주로 고작 64경기에 출전해 타율로는 0.239를 기록한 가장 초라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양준혁이 그해 만큼은 장면 하나 하나를 생생히 기억한다. 2010년 7월1일 대구 롯데전에서 6-6이던 9회말 대타로 나와 통산 마지막인 2318번째 안타로 경기를 끝냈던 장면, 2010년 9월19일 대구 SK전에서 은퇴경기를 하며 야구인생 마지막 타석에서 송은범을 상대로 2루수 땅볼로 아웃됐지만 끝까지 전력질주를 했던 장면이 그렇다.

 

▲ 항상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던 양준혁

 

“야구는 열번 중 일곱번 실패해도 세번 성공하면 잘 하는 종목이지만 일곱번 실패할 때 그때마다 어떻게 죽는 지도 중요해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면 안되죠. 그게 제가 전력질주를 했던 이유예요.”

 

안승호 기자 / 경향신문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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