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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승-200세이브의 전설 '노송' 김용수

---KBO Legends

by econo0706 2009. 2. 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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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김용수 일러스트 / 출처=KBO

 

늘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았던 마운드의 파수꾼

 

면도날처럼 스트라이크존을 베는 핀포인트 컨트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강심장의 소유자. 김용수는 오랜 세월 묵묵히 마운드를 지킨 늘 푸른 소나무였다. 그래서 젊을 땐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나이가 들어선 ‘노송’이라는 닉네임으로 사랑 받았다.

마무리면 마무리, 선발이면 선발. 무엇이든 맡겨만 주면 해결을 하는 마운드의 파수꾼이었다. KBO 역사상 최초로 100승-200세이브의 신기원을 열었고,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로 두 차례 MVP를 수상했다. 잠실구장에 나부끼는 41번은 16년간 수고한 그의 어깨를 기리기 위한 영구결번이지만, 그 세월 우리의 희로애락이 담긴 추억의 번호이기도 하다.

 

‘노송’ 김용수를 떠올릴 때

 

LG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검니폼(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활짝 웃는 김용수의 얼굴과 그를 둘러싼 트윈스 선수들의 환호.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의 기념사진이다. 김용수 역시 사진으로 박제된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마지막 원아웃을 남겨놓고, (포수) 김동수가 올라왔어요. '형, 이번에 아웃 잡으면, 두 손만 번쩍 들고 있어. 내가 달려가서 안을 테니까.'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태평양 마지막 타자 김성갑의 타구가 내 앞으로 오더라고요. 땅볼을 잡아서 1루로 던지는데, 내야에 있던 이종열, 류지현, 박종호의 얼굴이 하나씩 다 눈에 들어왔어요. 그와 동시에 선수들이 거의 날다시피 달려와 나를 껴안았죠. 그때 나는 그 안에 파묻혀서 정신이 없었는데, 나중에 그 사진을 보고 '아, 이렇게 좋아하고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그 모습은 아직까지 LG가 기억하는 마지막 우승 장면이다. 그리고 김용수는 여전히 LG 역사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로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게 LG 트윈스는 1990년과 1994년 두 차례 우승의 역사를 썼는데, 김용수가 그 두 차례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MVP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994년엔 마무리 투수로 1승2세이브를 거두며 MVP가 됐다면, 1990년 창단 첫 우승 때는 선발투수로 1차전과 4차전 승리투수가 되며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 1990년 LG트윈스 첫 우승의 주역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김용수 / 사진 출처=KBO

 

김용수는 두 번의 우승 중 “1994년 마지막 우승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첫 우승 때는 멋도 모르고 신나게 던졌다면, 두 번째 우승은 왠지 더 욕심이 났어요. 류지현·서용빈·김재현 신인 삼총사가 등장해 팀이 신바람을 일으켰던 시절이고, 30대 중반인 나는 '올해가 아니면 은퇴 전에 언제 다시 우승 기회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시리즈 내내 '마운드에 온 힘을 쏟겠다'는 마음으로 던졌던 해였습니다.”

 

그는 LG의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구단의 역사를 쓰기도 했지만, 최초로 두 차례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는 KBO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김용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제구력. 스트라크존을 베어내듯 몸쪽과 바깥쪽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찔러 넣는 그의 핀포인트 컨트롤은 팬들뿐만 아니라 야구인들에게도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과거 그와 호흡을 맞췄던 레전드 포수 김동수는 “고등학교, 대학교, 국가대표, 프로에서 수많은 투수들의 공을 받아봤지만, 김용수 선배만큼 컨트롤이 좋은 투수는 없었다. 던지는 족족 내가 요구하는 코스에 정확하게 들어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 면도날 같은 제구력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전설을 썼다.

 

무엇보다 김용수는 LG를 넘어 한국프로야구에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의 개념과 가치를 확실히 각인시킨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1980년대는 지금처럼 '1이닝 세이브'는 꿈도 못 꾸던 시절, 김용수는 경기 중후반 위기 때마다 마운드에 올라 숱한 실점 위기를 막아냈다. 때론 2~3이닝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급할 땐 6회 무사 만루에서 등판해 위기를 정리하는 일당백의 기개를 보여주기도 했다.

 

1990년부터는 소방수로만 굳어져 가던 이미지를 깨고 선발투수로서 특급 활약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프로 통산 126승 89패 227세이브 1홀드, 평균자책점 2.98의 성적을 남겼다. 보통 투수들은 하나도 하기 힘든 100승과 200세이브. 김용수는 임창용(전 KIA)과 더불어 이를 함께 달성한 선수로 남아 있다.

 

전설의 시작

 

김용수는 남들보다 한참 늦은 동대문중 1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갔다. 심지어 본격적인 훈련은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했다. 그러나 동료들도 그의 남다른 재능을 금세 알아봤다. 처음엔 내야수였지만, 팀에 선발 투수가 부족한 상황이 오자 선후배 모두가 김용수를 대체자로 지목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김용수는 투수 치고 키(176㎝)가 크지 않고 체격도 왜소한 편이었지만,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제구력이 일품이었다. 김용수는 동대문상고와 중앙대를 거치는 동안 늘 팀의 에이스 역할을 도맡았다.

 

MBC 청룡도 그의 가치를 알아봤다. 1983년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은 연고지역 고교 출신 선수를 제한 없이 뽑을 수 있었는데, MBC는 서울 입성이 예정된 OB(현 두산·당시 대전 연고) 베어스와 드래프트를 통해 김용수를 2순위로 지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김용수는 고심 끝에 곧바로 프로에 들어오지 않고 실업야구 한일은행 입단을 선택했다. 프로 선수는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뛸 수 없던 시절이라 그는 군복무를 먼저 마친 뒤 프로에 입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때 MBC에서 뛰던 이해창 선배, 정영기 선배, 김용달 선배 등이 날 찾아와서 '네가 들어와야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고, 프로로 바로 오라고 설득하셨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래도 프로팀에 한 번 입단하면 실업팀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잖아요. 당시엔 군 문제 해결이 먼저라고 생각해서 한일은행과 입단 계약을 했었죠. 그런데 198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병역 대체복무 혜택을 받게 됐어요. 제 예상보다는 빨리 프로에 올 수 있게 됐습니다.”

 

MBC는 198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해태에 1무4패로 패한 바 있어 곧바로 김용수를 입단시키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던 상황이었다. 2년간의 한일은행 생활을 마친 김용수는 1985년 MBC와 계약금 2300만원에 도장을 찍었다. 팀도, 김용수도 고대했던 장밋빛 미래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곧바로 프로 마운드에 서진 못했다. 프로야구와 아마야구 사이의 자존심 대결이 벌어진 '선동열 사태'의 불똥이 애꿎은 김용수에게도 튀었다. 역대 최고 유망주로 꼽히던 고려대 투수 선동열이 해태(현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지 않고 실업야구 한국화장품과 계약한 게 화근이었다.

 

“선동열도 군복무를 일찌감치 마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 위해 실업야구를 선택한 거였어요. 하지만 '그 선동열'을 놓친 광주의 야구팬들이 난리가 났죠. 선동열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식당에 누군가 뱀을 풀어놓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결국 선동열은 마음을 돌려 해태로 가기로 했는데, 이번엔 한국화장품에서 이중 계약이라고 반발(프로입단 무효 가처분 소송)하고 나섰죠. 결국 KBO에서 대한야구협회와 합의해 반년 동안 출장 정지 징계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 바람에 실업팀에서 2년을 뛰고 와서 아무 문제가 없던 나까지 징계를 받아 5월 말에야 프로 마운드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김용수는 입단 후 6경기에서 21⅔이닝만 던진 뒤 무릎을 크게 다쳤다. 그는 아직도 그 부상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잠실에서 청보 핀토스와 맞붙은 날이었어요. 금광옥 선수 타석에서 공을 던졌는데, 타구가 순식간에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게 보이더라고요. 공이 내 무릎에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딱' 소리를 내면서 굴절돼 1루 쪽 불펜까지 날아갔어요. 그대로 시즌을 일찍 접었죠.”

 

그 부상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다. 김용수는 고교와 대학교, 실업팀에서 어깨가 빠져라 공을 던진 뒤였다. 매년 거의 혼자서 던지다시피 했다.

 

“막상 프로에 와서 공을 던져보니 제가 생각해도 구위가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이 정도 공으로 프로에서 통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운명적으로 타구에 맞아 어깨를 강제로 쉬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오히려 '투수 김용수'의 능력을 재충전할 수 있는, 값진 휴식기였다.

 

마무리로 선발로…‘전천후 투수’

 

부상에서 회복한 김용수는 사실상 1986년부터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소방수 김용수’의 전설이 시작됐다. 당시엔 세이브와 구원승을 합친 세이브포인트로 구원왕을 가리던 시절. 그해 9승(구원승) 9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1.67을 기록했다. 35세이브포인트를 거두며 MBC 청룡 최초의 구원왕에 올랐다.

 

말이 마무리 투수지, 60경기에서 178이닝을 책임졌다. 요즘은 웬만한 선발투수도 소화하지 못하는 이닝수다. 1986년이면 국가대표 출신 신인 김건우가 MBC 청룡 유니폼을 입자마자 18승을 올리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해. 김건우가 앞 쪽을 확실하게 책임지면, 김용수가 완벽하게 뒷문을 걸어 잠그는 패턴이었다.

 

김용수는 1988년에만 98⅔이닝(3승 5패 11세이브)을 던져 100이닝을 아슬아슬하게 못 채웠을 뿐, 1987년 141이닝(9승 5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98), 1989년 104⅓이닝(5승 5패 22세이브 평균자책점 3.19)을 각각 소화하며 연거푸 구원왕 타이틀을 따냈다.

 

당시 가을야구와 거리가 멀었던 청룡 팬들은 마무리 투수 김용수의 성장과 활약을 지켜보는 걸 낙으로 삼았다. 다른 건 몰라도 KBO리그 최고 마무리 투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희망을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김용수에게 변화가 닥쳐왔다. 팀 이름이 MBC에서 LG로 바뀐 1990년, 처음으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꿨다.

 

“마무리 투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성적이 예전 같지 않았어요. 전반기에 좀 고전했더니 백인천 감독님이 '후반기부터는 선발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시더라고요. 선발이었던 정삼흠과 내가 보직을 바꿨죠.”

 

불펜에서 선발로 전환하려면 단기간에 투구수를 끌어올려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김용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무리 투수를 할 때도 기본적으로 경기당 2~3이닝은 던졌고, 선발이 5이닝을 던지고 내려간 뒤 내가 연장전까지 6~7이닝을 혼자 떠맡은 적도 있었어요. 처음엔 갑자기 선발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잘 적응을 했던 것 같아요."

 

선발 전환 후 처음에 5이닝을 던지고, 다음 경기에서 6이닝, 그 다음 경기에서 7이닝을 버티며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이어 네 번째 선발등판을 완투승으로 장식하며 ‘선발 투수 김용수’의 존재감을 뽐냈다.

 

이전까지는 직구와 슬라이더만 던지는 '투 피치' 투수였지만, 그해 포크볼과 스플리터를 장착한 덕에 성공적인 선발 변신이 가능했다. 포크볼을 구사하는 투수가 흔치 않던 시절. 제구가 뒷받침된 김용수의 포크볼은 상대 팀 타자들을 애먹이기에 충분했다.

 

김용수는 1990년 12승 5패 5세이브(평균자책점 2.04)를 올리며 에이스로 자리 잡았고, 팀의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에도 12승 11패 10세이브(평균자책점 2.79)로 맹활약했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무리하게 던진 후유증이 1992년 찾아왔다. 좌골 신경통으로 고생하다 14경기에서 5승 4패 평균자책점 5.16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입단 첫 해를 제외하면 가장 적은 61이닝을 소화했다.

 

하지만 김용수는 그 후에도 팀을 위한 임무 교체를 멈추지 않았다. 1993년 다시 마무리 투수로 부활해 26세이브(평균자책점 1.55)를 기록했고, 1994년과 1995년엔 2년 연속 30세이브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어 1996년엔 척추분리증으로 선발 등판이 힘들었던 이상훈 대신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해 16승 7패 9세이브를 올렸다. 2년 뒤인 1998년엔 18승 6패 2세이브를 올려 역대 최고령 다승왕에 등극했다. 또 1999년엔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바꿔 26세이브를 기록했다. 100승과 200세이브. 양립하기 어려운 두 대기록을 한 명의 투수가 모두 갖게 된 이유다.

 

현역 선수 최초 영구결번

 

LG는 결국 1999년 4월 20일, 현역 선수 신분이던 김용수의 등 번호 41번을 KBO리그 역대 세 번째이자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현역 선수의 영구결번식이 열린 건 김용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시엔 영구결번이라는 문화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솔직히 '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됐습니다. 누구도 내 번호를 못 쓴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한 선수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따라오는지, 그때보다 지금 더 실감하고 있어요.”

 

다만 그 후엔 선수 생활을 오래 이어가진 못했다. 그는 2000년에도 127이닝을 소화하면서 6승 4패 4세이브 1홀드를 기록했지만, 이광은 당시 감독의 세대교체 방침에 따라 떠밀리듯 은퇴했다.

 

“그해 9월에 공이 더 좋아진 느낌이라 2년 정도는 더 던질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다른 팀으로 가지 않고 LG에 지도자로 남기 위해 어렵게 은퇴에 동의하게 됐죠.”

 

그는 원클럽맨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한 팀에서만 뛰면서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할 100승-200세이브의 전설을 썼다.

 

“사실 마무리투수로서 227세이브를 기록했는데 그 이상 미련이 없어요.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126승에는 조금 아쉬움이 남네요. 선발투수로 꾸준히 던질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 많은 170승, 180승까지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200승까지는 어려웠을지 몰라도, 오른손 투수 최다승은 가능했을 것 같아요.”

 

김용수는 그래도 웃음을 지었다. 그저 “LG 팬들에게 '영원한 LG맨'으로 기억되면 더 바랄 게 없다”면서.

 

▲ ‘영원한 LG맨’ 김용수, 사진은 94 우승 직후 / 사진 출처=KBO

 

김용수는 유독 LG팬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1980년대부터 시작해 1990년대를 거쳐 2000년까지 16년간 원클럽맨으로 뿌리를 내렸기에 폭넓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MBC 청룡의 추억이 있는 ‘청룡아재’부터 신바람야구의 전성기를 경험한 ‘X세대’와 2000년대의 문을 연 ‘밀레니얼세대’까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간판스타였다.

 

“지금은 프리에이전트(FA) 제도가 활성화 돼 '원 클럽맨'으로 남기가 점점 더 어려운 시대 아닌가요. 한 팀에서 16년을 뛴 것 자체가 내게는 자부심입니다. 'LG에서 시작해 LG에서 끝난' 선수로 기억되면 그걸로 충분해요.”

 

이재국 기자 / 스포팅제국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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