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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골매' 송진우의 210승-103세이브 신화

---KBO Legends

by econo0706 2009. 2. 1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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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송진우 일러스트 / 출처=KBO

 

선발로 마무리로…21년의 세월이 빚은 전설

 

“못 하겠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고, “안 한다”는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선발이 필요하면 선발로 나섰고, 마무리가 필요하면 마무리로 등판했다.

KBO 역사상 가장 많은 공을 던졌고, 가장 많은 타자를 상대했고,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한 땀 한 땀 승리와 세이브를 쌓아올린 결과 누구도 넘보기 힘든 200승과 100세이브를 함께 넘어서는 불멸의 역사를 썼다.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할 21년의 세월. ‘송골매’ 송진우가 자신의 등번호처럼 21년간 마운드를 휘감은 날갯짓은 그 자체로 위대한 전설이며 KBO의 역사였다.

 

모든 감독의 이구동성 “고마운 투수”

 

“신인일 때 처음 만났는데 도망가는 모습이 없었어요. 공도 빠르고 굉장히 강하게 나가는 투수였죠. 팬들에게도 그랬겠지만 감독한테도 늘 기분 좋은 투수, 고마운 투수였습니다. 심성이 참 착했던 선수로 기억합니다.” -전 빙그레 이글스 김영덕 감독.

 

“선발이면 선발, 마무리면 마무리, 맡겨만 주면 알아서 다 해내던 투수였죠.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노(NO)’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 성격이 상당히 긍정적인 선수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전 한화 이글스 강병철 감독.

 

“동국대 감독 시절 충북 증평 집까지 찾아가 스카우트를 했어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이 좋았어요. 대학 시절에 4번타자와 에이스로 우승을 이끌 정도로 다재다능했습니다. 한화에서 다시 만났을 땐 이미 최고 투수가 돼 있었죠.” -전 한화 이글스 김인식 감독.

 

송진우를 만났던 감독들은 하나같이 “고마운 투수였다”고 입을 모은다. 감독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다. 선발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투수였고, 마무리가 필요할 때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투수였다. 급할 땐 대타로 그를 찾기도 했다.

 

강병철 전 감독은 “보통 그 정도 급이 되는 다른 투수라면 자신이 좋은 것만 원할 수 있는데 송진우는 그런 게 없었다”면서 “감독이 원하면 어차피 자기가 할 일이라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 감독들의 신임을 받을 수 밖에 없던 마음가짐을 보여줬던 송진우 / 사진 출처=KBO

 

사고도 긍정적이었지만, 태도도 긍정적이었고, 도전과 결과에 대해서도 늘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였다. 그랬기에 KBO 역사상 누구도 해내지 못한, 아니 앞으로 누구도 해내기 힘든 200승과 100세이브를 함께 달성한 ‘전천후 투수’가 됐는지도 모른다.

 

송진우는 “내가 힘들면 남이 편하고, 내가 편하면 남들이 힘들다”는 좌우명을 실천하며, 자신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부지런히 마운드에 올랐다. 그렇게 21년간 역사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올렸고, 그것은 곧 KBO의 역사로 이어졌다.

 

돈보따리 들고 증평으로 찾아가 김인식 감독

 

“진우를 저한테 보내주시면 투수로 잘 키워보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1983년 가을 어느 날, 동국대 김인식 감독은 보따리를 들고 충북 증평의 한 시골마을로 찾아갔다. 보따리 안에는 가계약금 현금 700만 원이 들어있었다. 세광고 3학년 송진우의 부모님을 만난 김인식은 “아드님을 동국대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설득했다.

 

1983년이면 동국대가 봄철대학야구연맹전에서 우승하면서 대학무대 첫 정상에 선 해였다. 1982년 동국대 사령탑으로 부임한 뒤 동국대 야구부 창설 37년 만에 첫 우승을 이끈 김인식 감독은 지속적인 강팀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세광고 에이스 송진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김인식 감독님이 직접 보따리에 현금을 싸들고 오셨어요. 가방이 아니라 진짜 보따리, 말 그대로 돈보따리였죠. 저야 어릴 때였으니까 진로는 부모님과 학교 측이 상의해서 결정했어요.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졸업 전에 동국대에 미리 가서 한 달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송진우는 어린 시절 자신을 스카우트 하러 왔던 김인식 감독의 모습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동차도 귀하던 시절, 김인식 감독이 발품을 팔아 직접 증평의 시골마을까지 찾아간 것은 송진우의 투구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동대문구장에서 세광고 투수 송진우를 봤는데 볼도 괜찮고, 경기운영도 잘했어요. 타자로도 잘했지만 일단 투수로 가능성이 있어서 스카우트를 하러 증평까지 간 거죠.”

 

송진우는 세광고 2학년 시절이던 1982년 황금사자기에서 팀 역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1954년 야구부를 창단한 세광고는 송진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1회전 단골 탈락팀. 송진우의 역투 속에 세광고는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지금까지도 그게 세광고의 유일한 전국대회 우승으로 남아 있다.

 

송진우는 세광고 3학년이던 1983년에는 대통령배 결승까지 끌어올리면서 다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세광고의 가장 화려했던 전성기였다.

 

동국대 4번타자, 프로에서도 끝내기 안타

 

“스퀴즈번트 댈 수 있겠냐?”

한화 이광환 감독은 송진우에게 물었다.

 

“신윤호 공이 빠르니까 번트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냥 치겠습니다.”

 

송진우는 이광환 감독에게 “아웃되더라도 강공을 해보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2001년 6월 3일 청주구장 LG-한화전, 7-7동점이던 9회말 1사 2,3루였다. 한화는 총력전을 펼친 끝에 동점까지는 갔지만 지명타자까지 소진하다 보니 외국인투수 브라이언 워렌이 9번타자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엔트리에 남은 선수는 투수들밖에 없었다.

 

그 순간 송진우가 배트를 집어 들면서 헬멧을 썼다. 이 상황에서 이광환 감독이 가장 기댈 수 있는 선수였다. 송진우가 타자로 등장하자 세광고 시절의 추억을 기억하는 고향 청주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상대 투수 신윤호는 그해 LG 김성근 감독 지휘 아래 마당쇠로 활약하며 15승과 32세이브포인트(14구원승+18세이브)로 다승왕과 구원왕을 차지한 최고 투수였다.

 

1구와 2구 헛스윙. 제3구는 시속 144㎞짜리 속구였다. 송진우는 힘차게 방망이를 돌렸고, 타구는 1루수 키를 넘어 우익선상에 떨어졌다. KBO 역사상 최초 ‘투수 대타 끝내기 안타’가 터진 순간이었다. 이 장면은 송진우의 다재다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팬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송진우니까 믿고 대타로 내보냈죠. 안타를 친다는 보장은 없지만 대학 시절 4번타자로도 잘했잖아요. 송진우는 사실 투수가 아닌 타자를 했어도 성공했을 선수라고 봐요. 흔히 말하는 촉이 있는 선수였죠. 운동신경이 있으니 뭐든지 잘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끝내기 안타를 치더라고요.”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고 있는 이광환 전 감독은 21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실제로 송진우는 동국대 시절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1학년 시절 1984년 대통령기 우승을 이끌며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팔꿈치가 고장났다. 아무래도 고교 시절 많이 던진 후유증이 나타난 듯했다.

 

결국 2학년 말에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당분간 투수를 할 수 없자 그때부터 다시 방망이를 들었다. 3학년과 4학년 때 1년 후배 이강철과 함께 동국대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3학년 때 추계리그 감투상, 4학년 때는 백호기 최우수선수상 및 타격상(0.500)을 받더니 추계리그에서는 우수투수상을 받으며 투타에서 맹활약했다. 그런 타격 소질과 만능 감각이 훗날 프로에서도 끝내기 안타로 연결될 수 있었다.

 

데뷔전 완봉승 출발…4년만에 50W+64SV

 

정상적이라면 송진우는 1차지명을 받은 1988년에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야 했지만, 88서울올림픽 국가대표팀에 뽑히면서 1년간 프로 진출이 강제로 유보됐다.

 

1989년 4월 12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롯데전에 루키 송진우는 데뷔전을 치렀다. 4회초 2사까지 노히트 행진. ‘자갈치’ 김민호에게 첫 안타를 내줬지만 무실점을 이어갔다. 투구수가 다소 많아 9회까지 149구를 던졌지만 4안타 3볼넷 1사구 7탈삼진 무실점. 팀의 6-0 승리를 이끌면서 완봉승을 거뒀다.

 

데뷔전 완봉승은 1982년 KBO리그 출범 후 역대 5번째 기록이었다. 그리고는 송진우 이후 누구도 신인이 데뷔전에서 완봉승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시즌 초반부터 3연승 무패 가도를 달리는 등 기대 이상의 투구를 펼치자 빙그레 김영덕 감독은 송진우를 5월말부터 마무리로 돌리는 등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조커로 활용했다.

 

첫해 9승10패9세이브 평균자책점 2.81의 성적을 올린 뒤 1990년에는 38세이브포인트(11구원승+27세이브)로 데뷔 2년 만에 구원왕을 차지하며 송진우의 시대를 열었다.

 

▲ 선발, 마무리를 오가는 전천후 활약으로 전설을 써내려간 송진우 / 사진 출처=KBO

 

1991년 11승과 11세이브를 기록한 뒤 1992년에는 19승과 25세이브포인트(8구원승+17세이브)로 KBO 역사상 최초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했다. 입단 4년 만에 50승과 64세이브를 올리는 놀라운 퍼포먼스였다.

 

송진우는 강병철 감독 부임 이듬해인 1995년부터 선발로 자리를 잡는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임무는 후배 구대성이 맡았다.

 

송진우는 데뷔 초기에는 제구보다는 좌완 강속구 투수로 분류됐다. 직구와 슬라이더 ‘투 피치’로도 타자를 압도했다. 과감한 몸쪽 승부가 주특기였다. 1995년 13승, 1996년 15승을 거두며 선발로 자리를 잡는가했다. 그러나 1997년과 1998년 6승에 그쳐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속도 대신 각도, 시간 대신 공간

 

1998년 한화는 4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미국 애리조나로 마무리훈련을 갔다. 거기서 만난 제프 코치에게 배운 체인지업이 터닝포인트가 됐다. 1999시즌부터 프로 인생의 후반전이 전개됐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체인지업이 널리 쓰이지 않던 시절. 그 느린 볼로 뭘 하나 싶었지만, 막상 장착하고 나니 타자들의 방망이가 허공에 춤을 췄다. 슬라이더도 우타자 기준 몸쪽만 던지다 바깥쪽에서 돌아 들어오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지기 시작했다. 각도 큰 커브도 장착했다.

 

구종 다변화만이 아니었다. 구속을 1㎞ 더 늘리려는 노력보다 홈플레이트를 1㎝ 더 활용하는 제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몸쪽 높은 공과 바깥쪽 낮은 공, 바깥쪽 높은 공과 몸쪽 낮은 곳을 찔러넣는 ×자 투구를 펼치며 스트라이크존을 최대한 활용했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가 거칠다는 평을 듣던 송진우는 공은 느리지만 제구가 기막힌 투수로 거듭났다. 속도 대신 각도, 시간 대신 공간의 미학을 터득했다.

 

1999년 15승과 6세이브를 올리며 한화 이글스 역사상 최초 우승을 이끌더니, 2000년 13승, 2001년 10승, 2002년 18승을 올리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 기간 4년간 56승 12세이브를 추가했다. 프로 데뷔 후 4년간의 승수보다 더 많은 승리를 따내며 200승으로 가는 발판을 만들었다.

 

▲ 2002년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한 송진우. 아래 왼쪽에서 3번째 / 사진 출처=KBO

 

2000년 5월 18일 광주 해태전에서는 4사구 3개만 내준 채 6-0 승리를 이끌었다. KBO 역사상 10호 노히트노런. 당시 나이 만 34세3개월2일로 아직도 역대 최고령 노히터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아울러 외국인투수를 제외한 국내 투수 중 마지막 노히트노런이기도 하다.

 

2002년 4월23일 청주 SK전에서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신기록을 세웠다. 완투승으로 통산 147번째 승을 올려 선동열(146승)을 넘어섰고, KBO 역사상 통산 최다승 투수로 우뚝 섰다. 그때부터 통산 다승 부문은 송진우의 단독 드리블이었다. 호적상 1966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65년생. 2004년 11승에 이어 만 40세 시즌이던 2005년에도 11승을 추가했다.

 

210승, 3003이닝, 2048K…세월이 빚은 불멸의 기록

 

2006년 8월 29일 광주구장. 199승 이후 4차례나 승수 추가에 실패하며 아홉수를 겪던 송진우는 이날 KIA전에서 마침내 전인미답의 200승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일찌감치 터진 타선의 지원을 등에 업고 5이닝 1실점으로 투구를 마쳤고, 팀의 10-1 승리를 바라보며 KBO의 새 역사를 썼다.

 

200승 이후 송진우의 승수 사냥은 더뎠다. 2009년 4월 8일 대전 두산전에 가서야 개인통산 210승을 수확했다. 0-2로 뒤진 6회 1사 후 구원등판해 1.2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고, 타선 폭발로 거둔 승리였다.

송진우는 “사람이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200승을 돌파한 다음엔 사실 특별한 목표가 없었다”면서 “그 이후 거둔 1승, 1승은 기억에도 거의 없다”고 했다. 210승의 순간도 기억에 없다.

 

2009년 9월 23일 대전구장. 등번호 21번을 단 ‘송골매’가 21년간의 보문산 비행을 마치는 날이었다. 은퇴식에 앞서 LG전에 마지막 선발등판을 하면서 마지막 날갯짓을 했다. 1루 덕아웃에는 1983년 가을, 증평 시골마을로 찾아갔던 감독이 같은 오렌지색 한화 유니폼을 입고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송진우는 은퇴경기에서 LG 선두타자 박용근에게 3구 만에 글러브를 스치는 유격수 앞 내야안타를 맞았다. 생애 마지막 투구였다.

 

송진우는 강판되면서 새로운 전설 류현진에게 마운드를 넘긴 뒤 “송진우”를 연호 하는 팬들을 뒤로 하고 덕아웃 앞에 도열한 후배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송진우는 21년간 고무팔을 휘두르며 누구도 쉽게 넘보기 힘든 각종 기록을 화려하게 쌓아올렸다. 통산 210승은 단순 계산으로 10승을 21년간 꾸준히 해야 달성할 수 있고, 3003이닝은 150이닝을 20년 이상 던져야 도달할 수 있는 기록이다. 웬만한 선수라면 시작부터 엄두를 내기 힘들다.

 

여기에 KBO 역사상 유일하게 1만 타자 이상(1만2708명)을 상대했고, 유일하게 2000탈삼진 이상(2048개)을 뽑아냈다. 통산 투구수는 4만9024개.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거리(18.44m)로 환산하면 프로에서 던진 투구수의 총 길이는 약 904㎞다. 서울 광화문에서 부산 해운대(445km)를 왕복한 거리보다 길다.

 

▲ 송진우에게 한국프로야구 최초라는 수식어가 매우 많다. 사진은 최초 2000탈삼진 달성 기념 / 사진 출처=KBO

 

그 외에도 역대 최고령 기록이란 기록도 거의 다 그의 몫이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다.

 

▲최고령 선발승(42세 6개월 28일)=2008년 9월13일 문학 SK전 ▲최고령 구원승(43세 1개월 23일)=2009년 4월8일 대전 두산전 ▲최고령 완투승 및 완봉승(39세 6개월 23일)=2005년 9월8일 문학 SK전 ▲최고령 세이브(41세 3개월 15일)=2007년 5월31일 사직 롯데전 ▲최고령 홀드(43세 1개월 26일)=2009년 4월11일 대전 롯데전 ▲최고령 등판(43세 2개월 10일)=2009년 4월26일 잠실 두산전.

 

송진우는 26년 전 자신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찾아왔던 스승을 앞에 두고 은퇴사를 밝혔다. 이날 송진우가 초대한 것은 소속팀 사령탑인 김인식 감독만이 아니었다. 프로에서 만났던 6명의 모든 감독을 초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송진우는 ‘LEGEND 21’이 수놓아진 마운드 고무판에 키스를 한 뒤 스승들에게, 팬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 은퇴식. 그러나 송골매는 여느 선수들과 달리 울지 않았다. 행복한 미소를 안고 마운드를 떠났다. 한화 구단은 21번을 앞으로 누구도 달 수 없는 영구결번으로 처리했다.

 

“NO”라고 말하지 않은 선수…선수협 회장으로 헌신했던 전설

 

훈련 앞에서 늘 엄격했고, 야구 앞에서 늘 겸손했다. 모든 것의 우선순위는 야구였다. 그렇다 보니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하고, ‘야구밖에 모른다’, ‘자신만 챙긴다’며 서운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오해와 편견을 완전히 뒤집은 일이 벌어졌다. 2000년 1월 프로야구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으로 송진우가 추대됐다. 당시 후폭풍을 두려워해 모두가 맡기를 꺼려한 자리. 송진우는 최고령 선수이기도 했지만 이미 1999년 말 FA(프리에이전트) 제도 도입 후 1호 계약을 한 신분이어서 총대를 맨 것이었다. 한마디로 목을 내놓고 그 자리에 앉았다. 송진우는 꿋꿋하게 앞장서서 난관을 헤쳐나갔다. 그러면서 선수협은 여론을 등에 업고 KBO리그의 한 축으로 인정받게 됐고, 송진우는 ‘회장님’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글스에서 선발과 마무리를 오간 것도 그랬지만, 국제대회에서도 송진우는 자신에게 임무를 맡겨만 주면 언제나 “OK”였다.

 

1991년 한·일 슈퍼게임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1~2차전에서 일본에 대패를 당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나가는 투수마다 족족 얻어맞았고, 타자들은 일본투수들의 포크볼에 속수무책이었다. 수준 차가 너무나 컸다.

 

모두가 마운드에 서는 것조차 두려웠던 상황. 3차전 선발투수로 송진우가 낙점됐다. 송진우는 6회까지 단 1안타만 허용한 채 8탈삼진 무실점으로 씩씩하게 던졌다. 7회에 구위가 떨어지고 실책성 안타 등이 겹치면서 동점을 허용한 뒤 마운드를 내려왔지만, 그의 역투는 한국 선수단의 자존심을 살리기에 충분했다. 한국은 비록 역전패를 당했지만 송진우는 이날 우수투수에 선정됐다.

 

5차전에서도 빛났다. 선발투수 선동열이 3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뒤 발목부상으로 뛸 수 없자, 송진우는 4회부터 구원등판해 끝까지 무실점으로 막고 8-0 완승을 이끌었다. 한국이 가장 통쾌하게 일본을 이긴 날이었다.

 

송진우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도 대만과 결승전 마무리투수로 나서 4-3 승리를 막아내며 금메달을 확정지었다. 달려온 1루수 이승엽을 얼싸안고 환호하던 모습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명장면 중의 하나다.

 

승리만큼 소중한 최다패…내 기록은 9할이 노력

 

송진우의 빛나는 기록 이면에는 불명예 기록도 줄줄이 달려있다. 가장 많은 안타(2719개)와 가장 많은 홈런(272개)을 허용했고, 최다 볼넷(1156개), 최다 4사구(1272개), 최다 실점(1341점), 최다 자책점(1170점) 등 달갑지 않은 부문에서도 무수한 최고 기록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역대 가장 많은 패전(153패)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송진우는 그러나 이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153번의 패전이 있었기 때문에 210번의 승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승리만큼 소중한 패전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만 200패를 안 한 건 다행이다”며 웃었다.

 

‘타고난 천재’라는 말도 거부한다. 그는 “선수생활 21년간 10%만 좀 설렁설렁 한 것 같다”고 했다. 뒤집어 놓고 보면 90%는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 송진우는 “제가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했다. 훈련할 때 정열을 쏟아 부었다”고 치열했던 선수 생활을 돌이켰다.

 

▲ 2009년 본인의 영구 결번식에서의 송진우 / 사진 출처=KBO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승부의 정글에서 21년간 장수한 것은 노력과 자기절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 실제로 송진우는 그 시절 선수들이 흔하게 피던 담배도 피지 않았다. 술을 마실 줄은 알았지만 시즌 중에는 피치 못할 자리라도 소주 한 잔만 했다. 구도자와 같은 생활. 그러면서 한결같은 몸매와 공을 유지했다.

 

“입단할 당시만 하더라도 7년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4년을 마쳤고, 88서울올림픽으로 1년 늦게 들어와서 막연히 30대로 넘어가는 나이 정도까지 뛸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죠. 100승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200승 투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21년이나 선수로 뛰었고, 팬들의 박수를 받고 마운드를 떠났으니 행복하게 선수 생활을 한 거죠. 제 스스로에게도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 본인의 은퇴식에서 헹가래를 받는 송진우 / 사진 출처=KBP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21번은 자신에게 무슨 의미이냐고.

 

“박철순 선배 영향으로 21번을 달았고요. 세광고 시절 21번을 달고 우승하고 나서 계속 21번을 사용했죠. 프로 첫해 21번을 달고 계신 선배님이 계셔서 잠시 1번을 달았는데, 이듬해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때부터 21번을 달게 됐습니다. 21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고, 210승을 했고, 선수 시절 월급날도 21일이었고…(웃음). 21번은 저에게 각별하죠.”

 

송진우에게도 21번이 운명이겠지만, 팬들도 21번을 만난 건 운명이다.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 걸린 21번을 보면 송골매와 함께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먼 훗날 아들과 손자에게 대전 하늘에 나부끼는 21번을 가리키며 “내가 송진우라는 위대한 선수와 동시대를 살았노라”고 전설을 들려주지 않을까.

 

프로에서 공을 던진 동안 5명의 대통령(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을 만났고, 6명의 감독(김영덕~강병철~이희수~이광환~유승안~김인식)이 지나갔다.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를 열었고, 한화 이글스의 유일한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암흑기의 아픈 역사도 함께했다.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한 세월 동안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마운드에 서서 이글스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21년간 1만 명이 넘는 타자와 싸움을 끝낸 ‘송골매’는 KBO 역사에, 팬들의 마음에 위대한 발자국을 남긴 채 최고령의 늙은 날개를 접었다.

 

이재국 기자 / 스포팅제국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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