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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맨'으로 포장된 '성실맨' 홍성흔의 야구인생을 바꾼 순간들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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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홍성흔 일러스트 / 출처=KBO

 

유리 멘탈의 소유자

 

"저는 멘탈이 약한 유리멘탈의 소유자였어요. 멘탈이 약해서 중·고교 시절 파이팅 좋은 선수이기만 했죠. 경희대 2학년 때였어요. 문득 '내가 프로에 가면 과연 이 상태로 1군에서 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고민에 휩싸인 시기였죠."

1996년 봄. 경희대 포수 홍성흔은 딜레마에 빠졌다. 불안이 쓰나미 처럼 덮쳤다. 프로에 갈 실력은 되는건지, 프로에 간들 주전포수는 될 수 있는 건지, 회의가 들었다. 확신이 없었다.

소속팀인 경희대 강진규 감독(작고)을 찾아갔다. 평생 은사님으로 꼽는 분과의 그 때 그 만남, 모든 것이 달라졌다.

 

108배를 시작하다

 

"강진규 감독님께 여쭤봤어요. '제가 프로가면 잘 할 수 있겠느냐'고요. 냉정하게 말씀하셨어요. '넌 실력이 그것 밖에 안된다고, 지금 상태로는 1군 시합도 못 뛸 거라고요."

 

충격이었다. 가뜩이나 약한 멘탈에 지진이 날 지경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선, 힘을 키워야 했어요.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했죠. 힘이 붙고, 몸이 커지니까 조금씩 육체적으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약한 멘탈을 바꿔보려 아버지를 따라 절에 갔는데 스님께서 108배를 권하시더라고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바른 마음가짐으로 '잘 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매일 108배를 시작했죠. 매일 꾸준히 하루 하루 하다보니 어느덧 하체 힘도 생기고 나만의 루틴도 생기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신감이 솟구치는 거에요."

 

자신과의 약속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지켰다. 루틴은 곧 자신감이 됐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3학년인 1997년 부터 홍성흔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학리그 5경기에서 0.375의 타율과 3홈런, 11타점. OPS가 1.236에 달했다. 1년 전인 1996년도 3경기 0.182의 타율을 기록했던 존재감 없던 2학년생 포수의 깜짝 변화였다. 자신감에 올라탄 그는 폭주를 시작했다.

 

4학년 홍성흔은 무시무시했다. 1998년 12경기에서 0.511의 타율과 3홈런, 19타점을 기록했다. 출전한 매 경기 안타를 뽑아냈다. 5월18일 고려대 전에서는 4번 포수로 선발 출전해 6타수6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리그 개막 후 10경기 타율이 0.558에 달했다. 대학야구가 약하지 않던 시절이란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였다.

 

'대학야구에 대단한 포수가 등장했다'는 찬사 속에 OB의 1차 지명을 받은 그는 대학생 신분으로 주성노 감독이 이끄는 방콕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승선했다. 그와 LG 조인성, OB 진갑용, 아마추어 포수는 홍성흔이 유일했다. 박찬호 김병현 등 메이저리그를 개척한 해외파를 만난 것도 그 때에서였다.

 

"박찬호 선배 같은 대선수도 아침마다 명상을 하는 등 자신만의 루틴이 있더라고요. 그 때 깨달았죠. 모든 위대한 선수는 루틴이 있구나 하는, 제 습관도 더 굳어졌어요. 프로 입단 후 숙소에서 선배들이랑 방을 같이 쓰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108배 만큼은 꼭 했어요. 대략 12분에서 15분 정도 걸리거든요. 룸메이트에게 안 보이게 하느라고 밖에 나갔을 때 하고, 계속 있으면 화장실에서도 했어요. 몸과 마음이 달라지더라고요. 일어섰다 앉았다를 계속하면서 실패해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부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이 됐죠. 설령 시합을 나 때문에 지더라도 '난 다시 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전에 소심하고 '난 안돼' 하던 홍성흔이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터닝포인트였어요.

 

두산에서 두 산을 맞닥뜨리다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병역혜택까지 받았어요. 여유와 자신감이 부풀어 있는 상황에서 프로에 입단했죠. 그런데 선배님들이 너무 쟁쟁하고, 경쟁이 너무 치열한 거에요. (최)기문이 형이 롯데로 가셨는데도 쓰꾸미 캠프에 4명이 갔죠. 김태형 감독님과 진갑용 선배님, 두 거대한 산이 버티고 있었어요. 제가 진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그랬더니 다들 웃더라고요. 특히 진갑용 선배는 포수로서 노련미도 있고, 방망이도 잘쳤어요. 같은 팀이지만 경쟁자를 이겨야 살아남는 거니까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했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대졸 신인 포수 홍성흔이 처한 상황 그대로였다. 본격적으로 SWOT(강점(Strength),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기(Threat)) 분석을 시작했다.

 

"세상 일이란 게 '하다보니 되더라' 이런 건 없어요. 뭐든 노력해야 얻을 수 있죠. 새로 들어온 제가 시합을 뛰려면 포수 지분을 나누든지, 주전이 되든지, 아니면 백업을 하든지 선택은 세가지 뿐이었어요. 그 때부터 갑용이 형이 잘하는 게 어떤 건지, 안되는 건 어떤 건지, 내가 잘하는 게 어떤건지에 대한 데이터를 다 뽑았어요. 갑용이 형은 리드, 경험, 송구, 상황대처능력 등 많은 면에서 저보다 좋았죠. 저는 경험과 송구가 약하고 블로킹은 연습으로 커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중요한 건 투수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미트질, 프레이밍에 집중했죠. 미트질이 좋고 파이팅이 넘쳐야 투수들한테 호감을 살 수 있거든요. 매일 미트를 소리가 잘 나도록 닦고 또 닦았어요. 투수들이 던진 공이 미트에 맞고 쩌렁쩌렁한 소리가 잘 나게끔요. 그럼 투수들 기분이 좋거든요. 방망이 파워 하나는 자신 있게 칠 수 있도록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어요. 갑용이 형 보다 화이팅 있고, 미트질 잘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려 캠프 때 투수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방망이까지 잘 치는 포수가 되면 질 것 같지 않았거든요."

 

▲ 1999년 신인왕을 차지한 홍성흔 / 사진 출처=KBO

 

"저 쟤랑 한번 해볼래요"

 

치밀한 준비와 충만한 의욕으로 시작한 프로 첫 시즌. 하지만 세상 일은 뜻대로 술술 풀리지 않았다. 프로의 벽은 높았다. 조바심이 나면서 스텝이 꼬였다. "시즌 시작하자마자 헤매기 시작했어요. 블로킹도 안되고 저랑 어쩌다 호흡을 맞추는 투수 성적도 안나고요. 타석에서도 대타로 나가 7타수 무안타였어요. 총체적 난국이었죠."

 

결국 2군행. 입단 후 첫 좌절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날, 희망이 찾아왔다. "2군으로 가는 날이었어요. 김인식 감독님께서 부르시더라고요. '너는 능력이 좋은 놈이니까 2군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 금방 부를게'라고 하시는데 놀랐어요. 보통 신인한테 그런 말씀 잘 안하시거든요. 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구나, 희망을 찾았죠. 좌절했을 수도 있는데 더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하고 있었더니 진짜 7일 만에 부르셨어요."

 

2군에서의 일주일. 홍성흔은 더 단단해져 있었다. 언제든 기회만 오면 잡을 준비가 돼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기 마련. 학수고대하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5월4일에 비가 엄청 많이 왔어요. (강)병규 형 선발이 하루 밀려서 불펜에서 화이팅 내면서 볼을 받아줬거든요. 불펜 피칭 마치고 병규 형이 김경문 당시 배터리 코치님한테 갑자기 가서 '내일 쟤랑 하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한 거에요. 캠프 때부터 화이팅 내고 미트질을 원하는 방향으로 하니까 눈 여겨 봤던 것 같아요. 그날 김경문 코치님께서 저를 불러서 '성흔아, 우황청심원 준비해라. 내일 8번 포수 선발이다' 이러시더라고요."

 

프로 데뷔 첫 선발출전. 그것도 1년 중 최대 빅매치 중 하나인 5월5일 어린이 날, 잠실 라이벌 LG전이었다. "잠을 잘 못 잤죠. 벌벌 떨면서 연습하러 그라운드에 나왔는데 관중이 들어차기 시작해요. 8번 홍성흔 이름이 불리고 애국가가 나올 때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거의 이 정도였어요. 타격이고 뭐고 그저 (강)병규 형만 잘 던지게끔 하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류지현 서용빈 김재현 선배한테 계속 맞고 4실점 하면서 강판됐어요. 얼굴을 못 들겠더라고요. 그래도 타석에서 0-4로 지고 있다가 투아웃 만루에서 2점 추격하는 적시타를 쳤어요. 그날 3타점을 치고 안경현 선배 끝내기 안타로 역전승 하면서 제 이름이 스포츠신문 1면에 나왔죠. 그 다음날 가판대에 신문 사러 다녔어요. 그 때부터였어요. 주전으로 뛰기 시작한 시점이요. 그리고 6월인가 갑용이 형이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죠."

 

진갑용은 결국 그해 7월31일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다. 홍성흔은 111경기에서 0.258의 타율과 16홈런, 63타점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바야흐로 꿈에 그리던 OB 주전 포수 홍성흔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스티브블래스 증후군과 또 다른 길

 

2000년대 초·중반은 포수 홍성흔의 전성시대였다. 방콕아시안게임으로 병역 문제까지 해결한 그 앞에 걸림돌은 없었다.

 

2004년 165안타로 최다안타 1위에 오르며 2001년에 이어 두 번째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박경완과 함께 출전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에 이어 2001년에는 팀 우승포수로 진필중과 감격의 파이널 세리머니를 펼치기도 했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획득 직후 세레모니 / 사진 출처=KBO

 

▲ 2001년 두산의 미라클 우승 직후 세레모니 / 사진 출처=KBO

 

국제대회 마다 대표팀 포수로 출전하던 홍성흔은 2006년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WBC에도 LG 조인성 삼성 진갑용과 함께 발탁됐다. 6승1패로 3위를 차지하며 국위선양을 했지만 홍성흔 야구인생에 최대 위기를 안겨준 대회였다. 3월3일 도쿄돔에서 열린 대만전. 주전 포수로 출전한 홍성흔은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발목을 다쳤다. 홍성흔의 포수 인생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2006년에 WBC에서 발목 다치고, 팔꿈치에 뼛조각이 돌아다니는 상태였어요. 아픈 거 참고 무리하게 했었죠. 2006년 겨울에 발목하고 팔꿈치 수술을 한꺼번에 다했어요. 재활을 하는 과정에서 2007년에 시합을 빨리 나가고 싶어서 급히 몸을 만들었는데 그때 감각과 밸런스가 깨졌던 것 같아요. 공을 던지는데 갑자기 이상한 데로 가는 거에요. 영점이 안 잡히더라고요. 당황하고 심리적으로 쫓기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입스에 스티브블래스 증후군까지 가고 만거죠."

 

고통스러운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생 포수만 했던 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이었다. "2007년 시즌 중이었어요. 김경문 감독님께서 방으로 부르셨어요. '감독이 경험해 봤는데 이건 이겨낼 수가 없다. 포지션을 옮겨서 방망이로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평생 포수만 해오던 제겐 사형선고를 받는 느낌이었어요. 공격형 포수였지만 그때까지 공격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FA 시즌이 다가오고도 있었죠. 그래서 저는 '감독님, 저는 포수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이겨내 보고 싶습니다. 다른 포지션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시즌 끝나고 감독님께서 또 한번 포지션 바꾸자고 제안을 하셨고 저는 버텼어요. '포수로 구상에 없다'고 하시길래 저는 '그럼 트레이드를 시켜주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죠."

 

고난이 시작됐다. 미계약 선수로 남게 된 그는 해외 전지훈련 대신 배재중학교에 남았다. 어린 중학교 선수들과 함께 합숙생활을 하며 개인훈련으로 겨울나기에 들어갔다. 프로 입단 후 가장 막막했던 시간이었다. 결국 트레이드는 불발됐고, 결국 백기를 든 홍성흔은 대폭 삭감된 연봉에 사인하고 팀에 합류했다.

 

그래도 포수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은 더 이상 포수 홍성흔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천 SK전에서 도루 2개를 잡아내는 등 활약했지만 끝내 입스를 극복하지 못했다. "문학 경기 마친 뒤 하루 쉬고 화요일 잠실 경기였어요. 입스 충격과 공포가 다시 엄습했어요. 도루를 5개나 내주고 투수에게도 공을 잘못 던지고 난리도 아니었죠. 결국 경기 중간에 빠졌어요. 그날 결심했죠. 김경문 감독님 방에 찾아가서 '감독님께서 보시는 눈이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래, 외야 펑고 받고 해보자. 넌 야구센스가 좋은 선수니까 꼭 해낼 수 있을거야'라고 위로해주시더라고요."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쪽 문을 열어놓는다. 벼랑 끝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에게 새 희망이 열렸다. 무거운 포수 장비를 내려놓는 순간 타자로서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해 홍성흔은 0.331의 타율로 팀 동료 김현수에 이어 타율 2위에 올랐다. 4년만의 3할 타율. 3년 연속 타율 2위 진기록의 출발점이었다. "포수 걱정이 사라지고, 체력이 세이브되니까 다른 세계가 펼쳐지더라고요. 타석에 설 때마다 너무 홀가분하고 편한 느낌이었어요."

 

타자 홍성흔의 잠재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김경문 감독의 안목은 옳았다. "성흔이는 그 어느 야구선수보다 노력하는 자세가 배로 좋은 선수였어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모든 기를 피처한테 불어넣는 헌신적인 포수였죠. 하지만 포수는 훈련도 힘들고 투수에게 다 맞춰야 하고, 경기 전 상대 타자 데이터 분석도 해야할 일이 너무 많잖아요. 공격력이 워낙 좋은 성흔이었기에 그 부담을 덜어내고 타격에 더 집중할 수 있었죠."(김경문 전 감독)

 

2008년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홍성흔. 이후 3번의 골든글러브를 더 수상한다 / 사진 출처=KBO

 

부산 갈매기 날개를 펴다

 

격동의 2008년 시즌을 보낸 홍성흔은 포수가 아닌 타자 FA로 극진한 대우 속에 롯데로 이적했다. 새로운 출발.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의 만남은 '타자' 홍성흔에게 또 다른 지평을 열어준 전환점이었다.

 

"KIA전 연장전에 3번타자로 나갔는데 무사 2루에 제 판단으로 기습 보내기 번트를 댔어요. 결국 우리가 2대1로 이겼거든요. 그런데 제가 번트대는 순간 로이스터 감독이 덕아웃 책상을 내리치면서 '왓 더 X'하며 진심 화를 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를 불러서 대뜸 '너 왜 번트댔어'라고 묻길래 '팀을 위해 댔다'고 했죠. 그랬더니 정색을 하고 '팀을 위한다면 클린업트리오로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찬스를 해결해서 네가 영웅이 돼야 하고 그렇게 강력한 팀컬러를 보여줘야 한다. 삼진 먹어도 좋으니 풀스윙 해라. 다시는 너가 번트 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저는 솔직히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진짜 배짱이 두둑한 분이구나 생각했죠."

 

▲ 2009년 롯데의 히어로 홍성흔

 

롯데 2년차인 2010년. 로이스터 감독의 전폭 지지 속에 거침 없는 풀스윙이 시작됐다. 2009년 0.371 타율로 커리어하이를 찍은 그는 2010년 0.350의 고타율을 유지하면서도 한 시즌 최다인 26홈런, 116타점을 기록했다. 정확도와 장타력, 해결사 본능까지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 타자 홍성흔의 최전성기였다.

 

"2009년에 갈매기 타법으로 어깨를 닫으면서 변화구 대처가 되고 밸런스가 잡힌 상태였어요. 밀어치고 당겨치고가 다 되던 시기였죠."

 

부산 팬들의 뜨거운 성원 속에 타자 전성기를 구가한 홍성흔은 2013년 친정 두산으로 돌아와 맏형으로 선수단을 이끌며 2015, 2016년 두차례의 우승을 경험하고 파란만장한 18년의 프로생활을 마무리 했다. 통산 1957경기에서 0.301의 타율, 2046안타, 208홈런, 1120타점. '2000안타-200홈런-1000타점' 고지를 모두 넘어섰다. 고비마다 노력으로 극복하고 쌓아올린 소중한 금자탑이었다.

 

▲ 홍성흔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포효 세레모니 / 사진 출처=KBO

 

오버맨의 유쾌한 이미지 뒤에 감춰져 있던 진짜 모습은 성실파이자 노력파였던 홍성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야구 여정을 되새김질 해본 그는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노력하면 된다지만 저는 하는 일이 재미가 있어야 노력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억지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목표를 삼고 진심으로 노력할 수 없거든요. 저는 야구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관중 앞에 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도전하고 노력했습니다. 흥미롭다 생각하면 파고드는 게 정답인 것 같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도전하지 않는 것, 그래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정현석 기자 / 스포츠조선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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