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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투 완봉이 가장 쉬웠던 남자 정민철의 반전 야구 인생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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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정민철 일러스트 / 출처=KBO

 

정민철의 1997년 5월 23일

 

포수 사인은 바깥쪽 직구였다. 볼카운트는 투수에게 절대 유리한 1(B)-2(S). 마운드의 한화 정민철은 우타자 먼 쪽 보더라인 낮은 구석을 겨냥했다. 직구로는 눈 감고도 스트라이크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존이었다. 그런데 손 끝에서 공이 살짝 빠졌다. 이른바 ‘반대투구’였다. 아차 하는 순간, 공이 몸쪽 깊은 곳으로 흐르고 말았다.


1997년 5월23일 대전 OB-한화전. 8회초 1사 뒤 정민철의 4구째 직구가 한화 포수 강인권의 미트를 튕겨 뒤로 흐르지만 않았다면 KBO리그 역사 40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퍼펙트 피칭’에 대한 목마름은 그때 해소됐을지 모른다.

 

퍼펙트 게임에 가장 가까웠던 사나이

 

심정수는 체크스윙을 했다. 삼진이었다. 그러나 공이 빠지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부리나케 1루로 뛰었다. 스트라이크 아웃은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으로 바뀌었다. 8회 1사까지 이어진 퍼펙트 피칭도 동시에 깨졌다.

 

정민철은 심정수가 1루를 밟은 뒤로도 안경현을 외야 뜬공, 문희성을 내야 땅볼로 잡아내며 가볍게 이닝을 마쳤다. 8-0으로 앞선 상황에서 올라간 9회에도 진갑용과 이종민을 범타 처리한 뒤 김민호를 삼진으로 잡아 경기를 마쳤다. 4사구 또는 실책조차 없는 노히트노런. 그날 두산 타자들은 28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자신감이라면 독수리보다 높이 솟구쳐 올라 있던 만 25살 청년 에이스였다. 흔히 대기록을 화두에 둔 선수들은 “기록은 의식하지 않았다”는 의례적인 얘기도 한다. 그러나 그날의 정민철은 정말로 기록을 의식하지 않았다.

 

통산 61차례 완투에 완봉승만 20차례 기록한 투수. 완봉승 횟수로는 윤학길(전 롯데)와 함께 통산 공동 2위다. 더구나 그때는 완투와 완봉을 밥먹듯 하던 시절이다. “8회에 그 상황이 나온 뒤에 갑자기 관중석이 웅성웅성 하더라고요. 그제서야 그런가 했죠. 그 전엔 진짜 몰랐어요. 의식을 안하고 던졌어요.”

 

정민철은 등판 경기 도중 전광판을 잘 보지 않은 습관도 있다. 정민철은 “경기 중 전광판을 잘 안봤다. 이닝 흐름에 따라 상대 타순 정도만 봤다”고 했다. 그날 역시 전광판 스코어보드 각종 칸이 ‘0’으로 이어져있는 것이 정민철의 시야에는 없었다.

 

경기 중반 이후로 정작 바짝 긴장을 한 것은 한화 야수들이었다. 정민철은 그날을 회고하며 “경기 끝나고 돌이켜보니 이닝 교대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올 때면 다들 격려를 해주곤 하는데 그날은 그런 모습이 없었다. 모두 조심했던 것”이라며 “내 뒤의 야수 모두가 ‘나한테 공이 안 왔으면’ 했다는 얘기도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정민철은 그때 인터뷰에서도, 또 지금도 같은 얘기를 한다. 공식 기록이 폭투가 아닌 포일(패스트볼)이었다. 이 때문에 퍼펙트 피칭이 깨진 장면이 조명될 때면 당시 포수 강인권이 꼭 등장한다. 정민철은 다른 각도로 얘기했다. “거꾸로 포수 덕분에 노히트노런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가 평소에 공부도 준비도 참 많이 했어요. 그날도 저는 던지라는 대로 던졌습니다. 패스트볼이 나온 것도 ‘반대투구’를 한 제 책임이고요.”

 

정민철과 강인권은 대전 신흥초등학교 1학년부터 맺어진 오랜 친구다. 신흥초 4학년 때 야구를 함께 시작해 충남중-대전고도 함께 다녔다. 또 그날은 경기 뒤 저녁식사 겸 야식을 함께 하자는 약속도 있었다. 그런데 야구장을 나서는 길이 평탄치 않았던 기억도 있다. 사정 모르는 일부 팬들이 패스트볼로 기록을 무산시킨 포수에게 잔뜩 화가 난 상태로 경기장 출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어쩌면 낭만 시대, 그 시절 팬들의 표현 방식이었다.

 

정민철이 만든, 대반전의 1992년 봄

 

정민철 야구인생에서 그날보다 더 극적였던 것은 1992년 프로 데뷔전이었다. 정민철은 1992년 대전고를 졸업하자마자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주목받던 신인은 아니었다. 정민철은 박찬호·임선동·조성민 등 걸출한 투수들이 줄이어 나온 ‘92학번 세대’ 가운데서 자기 자신은 ‘언더독’이었다고 지칭했다. 더구나 새 얼굴들이라면 대부분이 대졸 신인이던 시절이다.

 

정민철 또한 대학을 선택할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고3 황금사자기 대회 때 대활약 이후 대전까지 직접 내려온 최남수 고려대 감독으로부터 강력한 입학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정민철은 앞서 대전고 재학중 학교까지 찾아온 빙그레 스카우트의 한마디, “우리가 너를 눈여겨 보고 있다”는 메시지가 가슴에 깊이 꽂혀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정민철은 충남중 시절 키가 또래보다 작아 1년 유급을 했다. 원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에 동기가 선배가 되고, 후배가 친구가 되는 생활을 대학에서 몇해 더 하자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몸과 마음은 자연스럽게 프로 직행 코스로 향했다.

 

1992년 빙그레 최고의 유망주는 동아대를 졸업한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의 지연규였다. 그에 반해 프로 문턱을 넘는 고졸 신인 정민철의 현실은 초라했다. 계약금 1400만원에 연봉 1100만원. 입단 조건부터 정민철의 2군 출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민철은 첫 시즌 1군 전력이 아니었다. 일본 시마바라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서부터 제외됐다. 그런데 변수가 하나 생긴다. 주목받던 지연규가 캠프에서 어깨를 다친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정민철이 대안은 아니었다.

 

정민철이 기회를 잡은 건 스프링캠프 이후 3월이었다. 시범경기를 앞두고 국내훈련이 이어진 가운데 1군 시츄에이션 타격훈련을 돕기 위한 ‘도우미 투수’가 필요했다. 2군에 있던 정민철이 추천을 받았다. “이정훈, 이강돈, 강석천, 이중화…, TV에서나 볼 수 있던 떨리는 이름들이었요. 훈련이었지만,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공을 던지는 제 모습을 김영덕 감독님께서 잘 봐주신 모양이에요.”

 

원래대로라면 잠시 1군 훈련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훈련용 투수로 등판 뒤로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진다. “1군에 합류하라”는 얘기였다. 정민철은 충남중 시절만 해도 키가 작았지만 대전고를 졸업할 때는 181㎝까지 키가 자랐다. 그런데 프로 입단 뒤 무려 7㎝가 더 커 188㎝까지 성장했다. 정민철의 입지도 키 자라듯이 달라졌다.

 

정규시즌 첫 등판은 참담했다. 대전에서 이어진 LG와의 개막시리즈. 장정순이 선발로 등판한 경기에서 한화는 위기를 맞는다. 그때 김명성 당시 투수코치가 정민철에게 다가갔다. “민철이 팔 풀어.”  몸을 푸는 중에도 주자는 쌓여갔다. 그렇게 맞은 생애 첫 등판이 만루 위기였다. 정민철은 “마운드로 가는데 내 다리가 없는 기분이었다.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았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정신이 번쩍 든 것은 LG 김동재에게 만루홈런을 맞은 뒤였다. “난 이제 영락 없이 2군이구나, 싶었어요. 내려와서 계속 낙담하고 있었죠. 그런데 반전이었요. 김영덕 감독님이 오시더니 ‘너, 광주 해태전 두번째 경기 선발이다’, 그러시는 거예요. 사실, 그때 만루홈런 맞은 내가 왜 선발인가 스스로 궁금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요.”

 

그때 빙그레에서 다음날 선발은 사복을 입고 관중석에서 야구를 봤다. 정민철은 광주 원정 첫 경기를 보면서 공포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스 한용덕이 해태 강타선에 7실점이나 하는 것을 생생히 지켜봤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가 ‘내일이 진짜 마지막이겠구나’ 하고 있던 터에 포수 김상국 선배로부터 호출이 왔다. 글러브와 수건을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지시. “섀도우 피칭을 하라”는 선배의 얘기를 따르며 불안함 속에 다음날을 준비했다.

 

믿기 어려운 반전이었다. 정민철은 포수 미트만 보고 공을 던졌다. 그 사이 아웃카운트가 하나씩 쌓여갔다. 최강 해태와 선발 데뷔전에서 6이닝 1실점의 쾌투를 한다. 장채근에게 솔로홈런을 맞은 것을 빼고는 깔끔한 피칭을 했다.

 

정민철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민철은 입단 첫해에만 33경기에 등판해 14승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8을 기록했다. 이 중 완투가 무려 11번, 완봉이 3번 있었다.

 

정민철은 일본프로야구에서 뛴 뒤 돌아와 2009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161승(128패)으로 우완 통산 승수에서 1위에 올라있다. 또 통산 이닝(2394.2이닝)에서도 송진우(3003이닝)에 이어 2위에 올라있다. 또 입단 첫해부터 해외 진출 전인 1999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따내는 내구성을 보였다.

 

▲ 1992년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한화 이글스, 좌측에 55번 정민철 / 사진 출처=KBO

 

완투의 일상화…외야 잔디에 ‘롱런의 길’을 만드다

 

신체조건은 하나의 동력이었다. 정민철은 팔과 다리가 굉장히 길다. 당시는 측정기구가 따로 없었지만 포수 앞으로 끌고 나가 던지는 ‘익스텐션’이 굉장히 좋았다. 손 또한 보통 사람보다 손가락 마디 하나는 더 길다. 한창 때는 150㎞를 웃도는 직구를 던졌지만 구속보다 구위가 특히 돋보였던 이유였다. 볼을 채는 힘이 좋아 회전수가 남달랐다. 여기에 언제라도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는 특급 변화구 ‘낙차 큰 커브’가 있었다.

 

정민철은 “직구를 던져 파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훈련이다. 이글스에는 송진우, 구대성, 이상군 등 중량급 선배투수들이 즐비했다. 일상이 곧 배움이었다. 그 당시에는 선배들과 거의 죽도록 많이 뛰었다. “외야 폴과 폴 사이 잔디가 패여 러닝하는 길이 생길 정도였다”고 말했다. 정민철은 이 대목에서 “투수로서 롱런의 비결을 묻는다면 나는 지금도 ‘러닝’이라고 답한다”고 말했다.

 

정민철 스스로 돌아본 최전성기는 1995년~1996년이다. 1995년 한일슈퍼게임 때 일이다. 현지 훈련 과정에서 포수 박경완을 앉혀놓고 불펜피칭을 할 때다. 곁에 있던 선동열 선배가 “낮게 던져봐라”하는 말을 툭 던지고 자리를 떴다. 그때 박경완이 정민철에게 슬쩍 전한 말. “그런데 민철아, 네 공 선동열 선배 공과 비슷하다.” 이 이야기는 박경완이 “내가 받아본 최고의 공은 정민철 직구”라는 타이틀로 미디어를 통해서도 알려졌다.

 

정민철은 그해 일본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슈퍼게임 3차전에 선발 등판해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다. 5차전에서 구원으로 2.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숙소로 일본 구단들이 찾아올 만큼 주목받던 때다. 오릭스와 다이에 같은 구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그 즈음 해외로 갈 수 있었다면 정민철의 야구 여정이 달리 열렸을지도 모른다.

 

정민철은 1997년에도 31경기에 등판해 14승11패 평균자책점 2.46을 기록했다. 팀 승률이 0.413로 7위까지 밀릴 만큼 전체 전력이 약세로 돌아선 때로 승수 추가는 어려웠지만 2년 연속 200이닝을 넘겨 던지며 최고의 경기력을 보일 때다.

 

정민철은 데뷔 첫 해부터 195.2이닝을 던지고 200이닝 이상을 4시즌이나 던졌다.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경기만 출전 가능했던 1993년에만 148.1이닝으로 이닝수가 적었지만, 그 해 역시 18경기에 등판해 10경기를 완투하며 13승(3패)을 올렸다.

 

부상 한번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던 터에 부상이 찾아왔다. 1998시즌 들어 팔꿈치가 아팠다. 전반기에 1승만 거두고 한동안을 뛰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해마저도 후반기에 복귀해 무려 9승을 추가하는 괴력으로 10승 고지를 밟는 위엄을 보인다. 이후 국내리그에서 유행이 됐던 전기치료를 일본 요코하마 이지마 치료원에서 받고 온 뒤였다. 훗날 일본에서 돌아온 뒤 2003년 말 결국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한다. 이를 감안하면 정민철 또한 결국 부상 탓에 내림세로 돌아선 것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을 대목이다.

 

그러나 정민철은 다른 얘기를 했다. 정민철은 1999년 데뷔 이후 최다인 18승(8패)을 올렸다. 양대리그로 진행된 그해 정규시즌에서 팀을 매직리그 2위로 올려놓은 뒤 드림리그 1위 두산과 플레이오프를 거쳐 오른 한국시리즈 롯데전에서 한화에 첫 우승을 안기기도 했다. 정민철은 1·4차전 승리투수가 됐다. “승수는 꽤 올렸지만, 평균자책이 3점대 중후반(3.75)까지 올라갔어요. 내 공에 대한 타자들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구위가 전과 같지 않은 것을 느끼던 시즌이었어요. 통산 100승을 넘기면서 준비가 소홀해졌어요.”

 

정민철은 그해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 100승(27세3개월2일) 기록을 세웠다. 1999년까지 프로 8년간 거둔 승수만 109승에 이르렀다. 정민철은 가장 높은 곳에 있었지만, 전과는 달리 바람에 흔들림을 느꼈다.

 

자기 고백과도 같았다. 앞서 쌓은 업적이 상당량의 훈련과 준비에 따른 결과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롱런의 ‘보약’ 같던 러닝 훈련량부터 전과 같지 않았다. 연이은 성공이 절실함 같은 것을 줄여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련의 시간, 인생을 제구한다

 

정민철은 그해를 마치고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우승하면 해외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구단이 지킨 것이었다. 그러나 정민철은 1999시즌의 연장선상에서 ‘준비 부족’을 새삼 느꼈다. 요미우리는 스타군단이다. 일본에서는 훈련량이 가장 적다는 소문도 있었다. 착각이었다. “스프링캠프 첫날 갔더니 훈련량이 어마어마 했어요. 간판선수들이 러닝부터 양이 엄청난 거예요. 준비가 소홀했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당시 선발진만 해도 구와타 마스미, 우에하라 고지, 구도 기미야스 등 쟁쟁한 스타들이 있던 요미우리였다. 이미 요미우리에서 뛰고 있던 조성민 그리고 발비노 갈베스 등 경쟁자들도 많았다. 외국인선수 보유 제한도 없어 한두 번 신통치 않으면 2군으로 가야하는 구조였다.

 

잘 생긴 얼굴에 키까지 훤칠한 정민철은 일본프로야구 하나의 브랜드인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꽤 잘 어울렸다. 그러나 정민철의 공은 이미 ‘정민철의 공’이 아니었다. 패스트볼 구속 자체가 10㎞ 가까이 줄어있었다. 그해 5월 야쿠르트전에서 7이닝 4안타 1실점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고, 6월 요코하마전에서는 완봉승도 거두지만 이전의 압도적인 구위로 거둔 성과는 아니었다. 정민철은 이듬해 5월에도 주니치전에서 무사사구 완투승을 따내기도 한다.

 

정민철은 요미우리에 있는 2년 중 적잖은 시간을 2군에서 보낸다. 그러나 그 때의 배움과 깨달음으로 2002년 귀국 뒤 52승을 더 거두고 지도자로서도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타국에서 2군생활을 하면서 ‘나도 비주류로 시작했던 사람인데’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도 여러 면으로 눈에 들어왔어요. 유니폼 벗으면 생활인이잖아요. ‘사람 정민철’로 균형감이 생긴 시간이었습니다.”

 

▲ 국내로 복귀한 정민철 / 사진 출처=연합뉴스

 

정민철은 한화 복귀 뒤 2002년 7승, 2003년 11승을 거둔다. 그러나 팔꿈치 수술 뒤 2004년에는 0승(6패)에 머무는 참담함을 맛본다. 은퇴를 고심할 때 만난 은사가 당시 ‘재활공장장’으로 통한 김인식 감독이다.

 

김인식 감독은 젊은 유망주들로 구성된 2004년 나가사키 마무리캠프 명단에 정민철을 넣었다. 정민철이 은퇴를 고심할 때다. 더구나 아내가 첫 아이 출산을 앞둔 때였다. 정민철은 김인식 감독을 찾아가 마무리캠프에서 빼줄 것을 부탁했지만, 김 감독은 유머 섞인 한마디로 거절했다.

 

“사실, 어렵게 말씀드렸죠. ‘감독님, 저 팔도 안좋고 와이프도 곧 출산하고요’ 하면서…. 그랬더니 감독님 특유의 어투로 그러시는 거예요. ‘니가 애 낳아?’”

 

정민철은 이듬해 9승을 거두며 부활했고 2007년에는 12승이나 따낸다. 은퇴를 최종 결정한 2009년 승수 추가가 없지만. 앞서 4년간 34승이나 더 기록했다. “제가 수건을 던지기 전까지는 감독님이 기회를 주셨어요. 보답을 위해서라도 뭐라도 해야했고요. 팔 각도도 바꿔보고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면서 뛰던 때입니다.”

 

레전드의 품격, 영구결번은 가슴에 단다

 

정민철은 1990년대 선명한 전성기를 보냈다. 이른바 실력과 외모, 말솜씨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스타플레이어로 우뚝 섰다. 그러나 정민철이 ‘레전드의 품격’을 갖춘 것은 투수로는 고전했던 선수생활 후반기였다.

 

정민철은 2009년 9월12일 은퇴식을 했다. 대전 히어로즈전에서 5회 이후 클리닝타임 때 30분간 진행된 몰입감 높은 은퇴식이었다. 그날 정민철의 23번은 ‘영구결번’이 됐다. 2005년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하며 기존의 55번을 작별하며 새로 단 번호였다. 대전구장에 걸린 23번은, 여전히 정민철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운전하다가도 이따금 화가 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야구장에 걸린 번호를 떠올리면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바로 들어요.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또 하나, 함께 번호가 걸려있는 종훈이 형(35번) 진우 형(21번), 태균(52번)이는 뭔가 명확한 것을 남겼는데, 전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능력 이상으로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승호 선임기자 / 경향신문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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