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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적인 '현대 에이스' 정민태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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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정민태 일러스트(출처=KBO)

 

유니콘스의 에이스

 

“너는 왜 LG만 만나면 새가슴이 되냐?” 1998년 한국시리즈를 앞둔 선수단 미팅에서 김재박 현대 감독이 정민태에게 물었다. 동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여긴 정민태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해 정민태는 17승(2위), 평균자책점 2.83(7위)에 오르며 현대를 정규시즌 1위로 이끌었다. 그래도 김재박 감독은 정민태가 LG에 약한 걸 걱정했다. 1차전 LG의 선발은 다승 1위(18승) 김용수가 유력했다.

 

‘가을의 전설’ 탄생한 98년

 

자존심이 상한 정민태는 반항했다. 훈련에 나와 러닝만 하고 피칭은 하지 않았다. 사흘을 태업하자 구단은 난리가 났다. 김재박 감독이 그를 따로 불러 이유를 물었다.

 

“절 믿지 못하신다면 던지고 싶지 않습니다. 감독님께 섭섭합니다.” “감독이 한마디 했다고 네가 그러면 안 되지.” “감독님도 많은 선수들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네 말이 맞다. 미안하다. 걱정도 되고, 네가 자극을 받았으면 해서 그랬어. 서운한 마음 풀고 팀을 잘 이끌어 줘라.”

 

둘의 ‘밀당’은 뒤끝 없이 끝났다. 정민태는 훈련에 복귀했다. 사실 피칭을 하지 않으면서도 준비는 하고 있었다. LG 구단이 자신의 투구 폼을 파악했다는 소문을 듣고 대비한 것이다. “구종 노출을 피하기 위해 세트 포지션에서 글러브 위치와 손목 각도를 살짝 바꿨습니다. 그리고 새 무기도 하나 준비했고요.”

 

스플리터였다. 손이 작은 정민태는 공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던지는 포크볼을 구사하지 못했다. 대신 두 손가락을 포크볼의 반 정도만 벌려 던졌다. 스플리터는 포크볼보다 빠른 대신 낙폭이 덜한 구종이다. 정민태는 정규시즌에 LG를 만나면 2~3이닝도 버티기 힘들어 했다. 뭐라도 바꿔야 했다. 평소에는 간간이 던졌던 스플리터를 다듬기 위해 그는 동료 타자들의 라이브 배팅에 등판했다. 정민태는 그립을 바꿔가며 스플리터를 계속 시험했다. 처음엔 “공이 밋밋하다”고 했던 타자들이 한국시리즈를 앞두고는 “쓸 만하다”고 합격점을 줬다.

 

10월 23일 인천 숭의야구장. 1회 초 현대 홈구장 마운드 위에 정민태가 섰다. 정민태의 초구는 패스트볼이었다. 그에게 유난히 강했던 LG 1번 타자 류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민태는 2구와 3구도 직구를 뿌렸다. 거칠게 몰아붙인 끝에 삼구삼진. “초구를 던지고 바로 알았어요. 오늘 내 공에 힘이 있구나. 예전에는 류지현과 만나면 무조건 풀카운트까지 갔는데 그날은 아니더라고.”

 

정민태는 2번 김재현, 3번 주니어 펠릭스도 삼진으로 잡아냈다. 직구 스피드가 시속 150㎞가 넘으니, 스플리터도 날카롭게 떨어졌다. 단 1이닝만 봐도 이 승부가 ‘정민태 시리즈’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민태는 1차전을 8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LG의 홈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4차전에서 다시 김용수를 만나 8이닝 5피안타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정민태로 시작한 시리즈는 정민태로 끝났다. 6차전 8회 1사에 마무리로 등판한 그는 1⅔이닝 2피안타 무실점 세이브를 거두며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김재박 감독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정민태를 ‘헹가래 투수’로 만들어줬다.

 

▲ 98년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한 정민태 / 사진 출처=KBO

 

‘인천 에이스’의 탄생

 

이 순간은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진 인천 연고팀이 KBO리그 출범 17년 만에 처음으로 챔피언에 등극한 날이었다. 오랫동안 만년 꼴찌를 응원한 인천 팬들은 목 놓아 울면서 한을 풀었다. 정민태가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최고로 꼽은 순간이다.

 

인천 숭의초-동산중-동산고를 나와 한양대에 입학한 정민태는 92년 1차 지명을 받고 태평양에 입단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완성형 투수에 가까웠던 그는 당시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1억7200만원)을 받았다.

 

정규시즌 첫 등판이었던 4월 22일 쌍방울전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4명의 선배들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 슈퍼 루키다운 출발이었다. 그리고 2회 피칭 중 오른 팔꿈치가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처음 느껴본 고통이었다. 공을 던질수록 팔꿈치가 부풀어 올랐다. 아픈 채로 던졌어도 6⅓이닝 2피안타 2실점을 기록했다. 다음날 정형외과 병원 여러 곳을 갔지만, 통증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구단은 거액의 계약금을 준 선수를 쉬게 하지 않았다. 통증이 있는 데도 정민태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마운드에 가끔 올랐다. 그해 9월까지 7차례 등판해 1승 3패 평균자책점 3.81을 기록했다.

 

정동진 태평양 감독의 배려로 정민태는 미국에서 검진을 받았다. 곧바로 토미 존 서저리(팔꿈치 인대접합 수술)를 받았다. 한국 선수 최초로 이 수술을 받은 것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지는지 잘 몰랐어요. 팔꿈치에 칼을 대면 큰일 나는 줄 알던 시대였지만, 별 수 없었죠. 수술보다 재활훈련이 더 힘들었어요. 미국에서 받은 프로그램대로 했는데, 너무 단순했어요. 또 지루했고요. ‘과연 이렇게 해서 공을 던질 수 있나’ 싶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민태 야구인생이 끝났다’, ‘태평양이 정민태에게 속았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화가 치밀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재활 치료뿐이었다. 주위 시선은 싸늘해졌다. 몇몇 코치들은 인사도 받지 않았다.

 

정민태는 버림받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버리진 않았다. 독기를 품었다. 93년 5경기만 던진 그는 94년 스프링캠프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통증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공식 경기도 아닌데도 정민태는 진통제를 맞고 던졌다. “세 번째 시즌에도 재기하지 못하면 방출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던지지도 못한 채 잘리나, 아파서 그만두나 결과는 똑같을 거 아닙니까?”

 

피칭한 날에는 오른손으로 양치도 못할 만큼 아팠다. 팔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통증이 쿵쾅거렸다. 그렇게 2주째가 되니 좀 나아졌다. 캠프가 끝날 땐 직구 스피드가 시속 140㎞까지 나왔다. 수술 전 구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아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94년 정규시즌 첫 등판이었던 4월 14일 한화와의 원정 경기. 지난 2년간 프로 선배들과 제대로 붙어본 적 없었던 정민태는 7⅔이닝 7피안타 무실점하며 승리 투수가 됐다. 이 경기를 통해 정민태는 팔꿈치 통증에 대한 걱정도 함께 날렸다.

 

그러나 가슴에 맺힌 한은 풀지 못했다. 정민태는 자신을 냉대했던 류영수 코치를 찾아가 말로 ‘직구’를 던졌다. “코치님, 왜 인사를 안 받아주셨습니까?” “뭐라고? 살다 살다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당황한 류영수 코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오늘 널 보니 ‘될 놈은 된다’는 말이 생각나는구나. 미안했다. 네가 더 잘 되게 하려고 그랬나보다.” “그렇게 인정하시니 저도 다 털어내겠습니다.” 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도 정민태와 류영수 코치는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그해 8승(9패)을 거둔 정민태는 프로야구 역대 최고 연봉 인상률 145%(1100만원→2700만원)를 기록했다. 95년에도 8승(14패)을 거뒀다. “야구가 잘 되기 시작하니까 더 이기고 싶었습니다. 94년에는 잘 던지고 진 날에는 야수 탓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95년에는 달라졌어요. 남 탓하지 말고 내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 거죠. 어린 나이에 마운드 위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

 

96년 3월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했다. 태평양의 ‘소년 가장’이 현대의 ‘황태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정민태의 피칭은 정점을 향하기 시작했다. 부상 걱정을 완전히 떨쳐낸 그는 평균 시속 140㎞ 중후반, 최고 시속 150㎞ 이상의 직구를 던졌다. 슬라이더도 날카로웠다. 가끔 던진 체인지업과 스플리터도 효과적이었다.

 

▲ 보란듯이 재기한 정민태,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로 기억되고 있다. / 사진 출처=KBO

 

현대의 첫 시즌, 정민태는 210⅓이닝을 던지며 15승 9패 평균자책점 2.44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새 무기를 장착했다. 현대가 그를 포함한 선수 3명 일본 긴데쓰 버펄로스로 연수를 보낸 덕분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던져도 정민태에게 말을 붙이는 이는 없었다. 정민태는 ‘또’ 따져 물었다. “사토 코치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께 ‘구단이 투자해서 내가 여기 온 것이다. 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느냐. 난 놀러 온 게 아니라 배우러 왔다’고 했죠. 그랬더니 ‘슬로 커브를 던져보라’고 하는 겁니다. ‘커브는 수술 받은 팔꿈치에 부담을 줄 것 같다’고 했더니 ‘커브 말고 슬로 커브’라고 답하더라고요.”

 

사토 코치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왜 슬로 커브를 던져야 하는지, 어떤 그립을 잡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정민태는 혼자서 계속 시험해보니 제법 그럴 듯하게 들어갔다. 그래도 이렇게 느린 공을 실전에 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97년 초, 정민태는 경기 중 가래톳 부상을 입었다. 허벅지 안쪽에 피멍이 들어 스트라이드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체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직구 위력도 떨어졌다. 그때 생각한 게 슬로 커브였다. 시속 90㎞의 느린 공에 타자는 깜짝 놀랐다.

 

부상 회복 후에도 슬로 커브는 꽤 요긴했다. 시속 150㎞ 강속구와 속도차가 워낙 컸기 때문에 타자는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배트를 잡은 타자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팬들은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박수를 쏟아냈다. 정민태는 피칭 리듬을 바꿀 때뿐 아니라 팬들이 지루해 할 타이밍에도 느린 커브를 던졌다.

 

정민태는 KBO리그 통산 1278개의 삼진을 잡는 동안 볼넷은 491개만 내줬다. 타고난 감각에 지독한 노력을 더해 제구력을 키운 덕분이었다. 불펜 피칭을 해도 그는 적당히 던지는 법이 없었다. 원하는 곳에 던진 뒤에야 글러브를 벗었다.

 

그는 칼 같은 제구 때문에 심판들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스트라이크존 보더라인(특히 바깥쪽)에 직구를 던진 뒤 다음에는 공 하나 정도를 바깥으로 더 빼는 것이다. 볼이라고 해도 직전 공과 비슷해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확률이 높다. 그 다음 바깥쪽으로 더 뺀다. 정민태의 제구에 현혹된 어떤 심판은 “너, 나랑 장난 치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정민태는 97년 13승 13패를 거둔 데 이어 98년에는 17승(2위) 9패, 99년 20승(1위) 7패를 기록했다.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가 바로 정민태다. 여기에는 구원승이 하나 포함돼 있다. 20승 기록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4위 싸움을 위해 한시적으로 불펜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정민태는 2000년 임선동, 김수경과 함께 공동 다승왕(18승)에 올랐다. 아울러 96년부터 이어온 시즌 200이닝 이상 투구 기록을 5년째 이어갔다. KBO리그 40년 역사에서 최동원(83~87년)과 그만이 가진 이 기록을 정민태는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전근대적(前近代的)이라고 볼 수 있는 이닝 기록을 20세기 말미 현대에서 이뤄냈다.

 

▲ 1999년 20승과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한 정민태 / 사진 출처=KBO

 

‘쇠 가슴’ 투수, 완숙에 이르다

 

정민태는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일본 진출을 추진했다. 그때까지 번 돈을 모두 집안의 빚을 갚는 데 쓴 그가 목돈을 벌 기회를 찾은 것이다. 정민태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현대 구단은 그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보내줬다. 임대 이적료는 5억엔에 이르렀다.

 

요미우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2군에서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어도 콜업이 되지 않았다.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감독은 정민태를 존중한 반면, 일부 코치는 그러지 않았다. 불펜 등판 기회도 어렵게 얻었다. “1군에 올라갔는데 나흘 연속으로 등판을 시키더라고. 일본 투수들은 3연투도 잘 시키지 않던데 말이죠. 3경기를 무실점으로 막고 4경기째 실점하니까 더그아웃으로 돌아가기 전에 ‘2군에 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미련을 버렸어요. 2002시즌 뒤 남은 1년 계약을 해지하고 귀국했습니다.”

 

요미우리 1년 연봉(1억엔)을 포기하고 돌아온 정민태를 현대는 충분히 예우했다. 2003년 당시 프로스포츠 최고 연봉(5억원)을 줬다. 일본 리그까지 경험한 정민태는 더 노련해졌다. 18승을 거둬 세 번째 다승왕과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다. 압권은 SK와의 한국시리즈였다. 1, 4차전 승리투수가 된 정민태는 최종 7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또 다시 ‘헹가래 투수’가 됐다. MVP도 그의 몫이었다.

 

사실 그의 컨디션은 그리 좋지 않았다. 허리 통증으로 투구에 힘을 줄 수 없었다. 평소보다 느린 공을 던져도 타자들은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SK 타자들은 내 공이 스플리터인 줄 알고 덤볐어요. 그러나 그건 투심 패스트볼이었습니다. 스플리터보다 빠르게 날아오다 살짝 가라앉으니 속수무책이었죠. 투수는 주 무기가 통하지 않을 때 플랜 B를 평소에 준비해야 합니다. 에이스라면 ‘어떻게든 버텨야 할 때’ 버틸 수 있어야 하죠.”

 

완숙의 경지에 오른 정민태는 이 즈음 마운드 위에서 모든 걸 내려다 봤다고 한다. 상대 더그아웃에 앉은 선수들의 움직임과 표정까지 읽어냈다. 1층 기자실에서 누가 짜장면을 먹는지도 보였다. 자신의 힘은 떨어졌지만, 상대의 힘을 역이용할 줄 알았다.

 

정민태의 피칭은 가을에 더 뜨거웠다. 포스트시즌 21경기에서 KBO리그 역대 최다인 10승(1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11)을 거뒀다. 한국시리즈 최다 선발승(6승)을 거두며 네 차례의 우승을 이끌었다. 큰 경기일수록 그는 더 대범했고, 예리했다. 새가슴이 아니라 ‘쇠 가슴’이었다.

 

연고 잃은 그의 뿌리는 현대

 

정민태에게 모자란 게 하나 있다. 바로 팬 사랑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 인천 연고 팀에 입단한 그는 98년 우승 후 영웅으로 대접 받았다. 그러나 2000년 현대가 인천을 떠나는 바람에 지지기반을 잃었다. 인천 연고를 차지한 SK전에 등판할 땐 관중석에서 “배신자”라는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SK로부터 3승을 거두자 더 미움을 받았다. 야구를 잘하면 인천 팬들이 분노했다. 못하면 상대 팀 팬들이 조롱했다. 2007년 현대가 해체되자 SK가 아닌 KIA로 이적했다고 또 욕을 먹었다.

 

“2005년 말 어깨 수술을 받은 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어요.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은퇴하려고 SK와 협상했으나 잘 안 됐죠.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날 별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배우고 싶었는데….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감독님이 이해하시더라고요. 인천 팬들과 인연도 끝내 이어지지 않았죠. 그게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 인천, 현대 왕조를 이끌었던 에이스 정민태 / 사진 출처=KBO

 

2000년 이후 정민태의 프랜차이즈는 지역이 아니라 기업이었다. 12년 동안 네 번이나 우승한, 이 찬란한 왕조는 너무나 빨리 사라졌다. 그래서 더 전설적이었다. “현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멋진 팀이었죠. 강명구 부회장님(구단주 대행)과 가끔 통화하면서 그 시절을 추억합니다. 현대가 없어진 날, 내 야구인생도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 ‘현대맨’들이 있어요. 그들이 자긍심과 애사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현대는 그럴 만합니다.”

 

김식 기자 / 일간스포츠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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