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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겸장' 영원한 안방마님 박경완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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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박경완 일러스트 / 출처=KBO

 

연습생 포수에서 영구결번 레전드로

 

4연타석 홈런을 친 포수. 20홈런-20도루 클럽을 개설한 포수. 감독과 투수들이 믿고 맡기는 포수. 박경완은 KBO 역사상 최고의 공수 겸장 포수로 평가 받고 있다. 5차례나 우승을 지휘한 야전사령관이었고, 연습생으로 출발해 영구결번까지 간 최초의 안방마님이라는 역사를 썼다.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그가 몸담았던 세 팀 이름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박경완’이라는 이름으로 써내려간 전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될 성 부른 떡잎…그러나 미완의 대기

 

#1. “쟤 누구냐?”

 

쌍방울 레이더스 조범현 배터리코치는 깜짝 놀랐다. 1992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한 뒤 처음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청년 한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주구장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는 조 코치는 주변에 “누구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박경완이라고, 우리 팀 포수입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조 코치에게 설명을 했다.

 

“포수라고?”

 

“예. 아직 1군에서 2군 왔다 갔다 하는 선수입니다.”

 

“선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 되나? 허허. 저놈 봐라. 맹랑하네.”

 

박경완에 대한 조범현 전 감독의 첫 기억이다. 당시 배터리코치였기에 포수 자원이라고 하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2. “쟤는 왜 센터 앞으로 던지냐?”

 

1991년 연습생으로 입단한 포수가 도루하는 주자를 잡기 위해 2루에 공을 던지는데 악송구가 됐다. 내야수를 넘어 아예 중견수까지 총알처럼 날아갔다.

 

“그놈 어깨 하나는 타고 난 것 같네.”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사령탑으로 1991년부터 1군 무대에 진출한 김인식 감독은 포수 한 명을 보고 껄껄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 포수가 방망이를 잡고 타격 훈련을 하는데 타구가 펑펑 담장을 넘어갔다. 체격도 좋고 힘도 좋아보였다.

 

“안 맞아서 그렇지 맞으면 장거리야. 힘 하나는 장사 스타일이네.”

 

김인식 감독은 다시 한 번 껄껄 웃었다.

 

김인식 감독은 1991년부터 연습생 포수 박경완을 정식 선수로 조금씩 기용하기 시작했다. 다소 거칠어 보였지만 어깨가 좋고 파워를 갖춘 원석이자 미완의 대기. 그때만 해도 박경완은 주머니 속에 감춰진 송곳이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 조범현을 만나 튀어나오다

 

“야, 너 지금 뭐하고 있어. 미친놈 아이가?”

 

1993년 어느 날, 조범현 코치는 쌍방울 숙소 문을 열고는 자고 있는 박경완을 발길질로 깨웠다. 박경완은 소스라치며 놀라 눈을 비비고 일어나 주섬주섬 유니폼을 입었다. 오전 9시 반에 훈련 시작인데 박경완이 잠을 자느라 지각을 한 것이다.

박경완이 그때까지 잠을 잔 이유는 있었다. 1993년 8월에 군복무를 위해 전주 지역 모 사단에 방위로 입대했다. 야간경계병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다. 밤에 12시간 근무를 하고 나면 36시간 휴식이 주어지는 보직. 근무 시간 외에는 훈련에 나가거나 경기에 뛸 수 있어 프로야구 선수에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야간근무와 훈련, 경기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늘 잠이 부족했다.

 

하지만 조 코치는 약속된 훈련 시간에 나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았다. 그렇게 숙소까지 찾아가 박경완의 목덜미를 잡고 나왔다.

 

“그땐 정말 조범현 코치님이 저승사자처럼 보였어요. 매일 지옥훈련이었죠. 정말 저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셨어요. 방위로 야간경계병을 해서 잠이 부족했는데 코치님은 인정사정 없었어요. 단체 훈련이 끝나도 매일 1대1로 블로킹 훈련을 따로 시켰어요. 펑고 배트로 치는 바운드된 공을 하루에 100개, 200개도 아니라 700~1000개 정도 받았으니까요. 그리고는 쪼그리고 앉아 풋워크 연습을 했죠. 시즌 끝나는 게 오히려 무서웠어요. 시즌 때는 경기를 해야 하니까 그나마 훈련이 덜한데 시즌이 끝나면 하루 종일 훈련을 했으니까요. 오전훈련, 오후훈련, 야간훈련…. 그땐 너무 힘들었지만 그걸 통해 블로킹만큼은 자신 있었어요.”

 

박경완은 당시 조범현이라는 이름을 듣거나 얼굴만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시간을 가장 고맙게 여기고 있다.

 

▲ 레전드 박경완, 그 뒤에는 조범현 코치가 있었다. / 사진 출처=KBO

 

조범현 전 감독 역시 당시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배터리 코치로 처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때 만난 제자였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를 타던 박경완을 붙잡아 놓고 유독 혹독하게 훈련을 시킨 이유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박경완은 신체적 조건도 좋고, 어깨도 강하고, 몸도 유연했어요. 좋은 밸런스만 가지면 좋은 포수가 되겠다 싶었죠. 저도 젊었으니까 펑고 강도가 얼마나 강했겠어요. 투수 공이 포수 사인대로 다 들어옵니까.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공을 막아내야 하는 게 포수의 운명이기 때문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반응하도록 만들었던 거죠. 스로잉 훈련 1년, 블로킹 훈련 1년, 그렇게 2년을 훈련시켰더니 최고의 포수가 됐어요. 그 훈련을 다 받아낸 첫 번째 선수가 박경완이었고, 두 번째가 삼성에서 만난 진갑용이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았다. 비가 와서 그라운드 훈련을 하기 힘들면 박경완은 비를 맞고 운동장을 수십 바퀴 돌아야 했다. 그때도 조범현 코치는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아니라 운동장에서 비를 주룩주룩 맞고 박경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채찍만 든 게 아니었다. 조 코치는 훈련이 끝나면 아내에게 “밥 좀 해놓으세요”라고 부탁했다. 포수들을 집에 데려가 저녁을 먹이면 박경완만큼 먹는 대식가가 없었다고 한다. 고기에, 장어에, 비빔국수까지 싹싹 다 비웠다.

 

“포수들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일부러 고스톱을 치곤했어요. 그러면 박경완이 제일 잘 쳐요. 그만큼 영리하다는 거죠. 그런 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죠. 플레이를 하는데 지혜가 있었어요.”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타던 선수는 최고 포수로 도약하고 있었다.

 

쌍방울에 연습생으로 들어간 사연

 

박경완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중 하나는 ‘연습생’이다. 그러나 그의 연습생 신화는 사연이 다소 다르다.

 

박경완은 친구인 투수 김원형과 함께 나름대로 전주고에서 유망주 포수로 평가받았다. 김원형은 고려대로 진학하려다 프로행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쌍방울과 입단계약을 했다.

 

쌍방울은 처음엔 박경완에게도 계약금 1300만 원에 연봉 1000만 원의 조건에 입단 제의를 했다. 당시 고려대에서도 박경완에게 원서까지 보내주며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그런데 원광대에서 “박경완이 오면 전주고 선수 몇 명을 함께 받아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전주고 감독은 박경완 측과 상의도 없이 박경완을 원광대에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박경완의 아버지가 반발했다. 싸움이 커졌다. 고려대로 가면 친구들을 버리고 가는 모양새가 됐다. 박경완은 “친구들과 원광대로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전주고 측에 “프로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원광대로 가기도, 고려대로 가기도 어려워졌어요. 프로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당시엔 고졸 선수가 프로에 가기 위해서는 10월 15일까지 계약을 해야 했어요. 쌍방울과 계약하려고 구단 사무실로 찾아갔죠. 그런데 구단 직원이 ‘사장님, 단장님이 안 계시니 내일 오라’고 하더라고요. 다음날 갔더니 ‘사장님, 단장님이 무주에 가셔서 아직 안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15일 낮 12시까지만 계약서를 KBO에 보내면 된다’며 오전 10시에 오래요. 그래서 15일 오전에 갔는데 구단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낮 12시까지 기다렸는데 말이죠.”

 

박경완은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야구를 그만둘 위기였다. 부모님에게 “방황 좀 하겠다”고 선언하고 한동안 가출을 하기도 했다.

12월 중순쯤 쌍방울 측에서 “연습생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박경완은 “안 간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그 때 어머니 눈물을 처음 봤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야구를 했는데 한번은 해봐야 하지 않느냐’면서 우시더라고요. 동계 훈련 시작할 때쯤 저도 ‘알겠다’고 하고 쌍방울로 갔어요. 그런데 연봉 600만 원만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초 금액에서 반 토막도 안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됐죠.”

 

눈물 속에 쌍방울에서 현대로 팔려가다

 

박경완은 1994년부터 쌍방울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엔 방위병도 홈경기뿐만 아니라 휴가를 통해 원정경기도 뛸 수 있었다. 타율(0.238)은 낮았지만 홈런(14개)이 터지기 시작했다. 102경기에 출장해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날렸다. 군복무를 마친 뒤 처음 합류한 1995년 19홈런을 때리더니 1996년 15홈런, 1997년 16홈런을 기록했다. 수비는 이미 완성품이 되고 있었고, 홈런포까지 갖춘 포수로 진화했다.

 

1996년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는 곧바로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준우승에 그쳤다. 당시만 해도 ‘부자 구단’ 현대가 투자를 펑펑 하던 시절. IMF 사태로 ‘가난한 구단’ 쌍방울의 가세가 기울자 현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97년 11월 11일 현대가 박경완을 현금 9억원에 영입하면서 이근엽과 김형남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는 소식이 터졌다.

 

“구단에서 불러서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트레이드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장난치지 마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며 웃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트레이드됐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 많이 울었죠.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거든요.”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로 팔려간 심청이처럼 박경완은 몸값 9억 원을 친정팀 살림살이에 보태주고 눈물을 흘리며 현대로 넘어갔다.

 

홈런치는 포수, 도루하는 포수…현대에서 꽃을 피우다

 

그러나 현대 이적은 박경완의 커리어에 별을 달아준 전환점이 됐다. 1998년 이적 첫해 현대는 첫 우승을 했고, 곧바로 우승 포수가 됐다.

 

당시 현대 사령탑이었던 김재박 전 감독은 “박경완이 포수로 앉으면 감독으로선 든든했다. 현대를 투수왕국이라고 했는데 박경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쌍방울 시절엔 타율도 낮고 홈런도 아주 많이 치지 않았지만 현대에 와서 홈런타자가 됐다. 성실했고 노력하는 선수였다. 웨이트트레이닝도 정말 많이 했다. 홈런수가 점점 많아졌다. 포수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으로도 큰 몫을 했던 선수였다. 7~8번 타순에서 홈런을 펑펑 쳤다”고 돌이켰다.

 

김재박 전 감독의 말처럼 박경완은 2000년에 포수뿐만 아니라 타자로서도 꽃을 피웠다. 5월 19일 대전 한화전에서 KBO 역사상 최초로 ‘한 경기 4홈런’의 전설을 썼다. 그리고는 그해 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40홈런 포수’가 됐다. 이어 정규시즌 MVP로 선정됐다. 포수가 MVP가 된 것은 이만수(1983년) 이후 역대 두 번째였다.

 

▲ 박경완의 잊을 수 없는 2000시즌. 한 경기 4홈런, 포수 최초 40홈런 등 최고의 활약을 만들었다 / 사진 출처=KBO

 

2001년에는 KBO 역사상 포수로는 최초로 ‘20홈런-20도루’ 클럽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포수가 20-20을 달성한 것은 1999년 이반 로드리게스 한 명뿐이었다. 포수는 체력 소모가 많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발도 느리다.

 

그러나 박경완은 초등학교 때 육상 단거리 달리기 선수로 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었을 정도로 발이 빠른 포수였다. 20-20 클럽을 달성한 데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2000년에 40홈런을 기록하고 시즌 MVP가 됐어요. 기자회견에서 소감을 인터뷰했는데 말미에 한 기자가 ‘내년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20-20으로 벌써 정했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기자회견장이 웃음바다가 됐어요. 그래서 ‘만약 내년에 20-20을 하면 제가 이 자리에 또 앉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기자들이 ‘아, 그럼 무조건 해주죠’라며 웃고 난리가 났어요. 그때만 해도 다들 농담인 줄 알았나 봐요. 저는 진지했는데 말이죠.”

 

박경완은 어릴 때 단거리 달리기 훈련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육상선수의 기억을 되살렸다. 스타트 훈련도 많이 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2001시즌에 들어갔다. 도루를 하기 시작했다. 홈런도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루수가 정체됐다.

 

그 때 현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대도’ 전준호가 박경완에게 도루의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특히 자신의 비밀노트에 있는 투수들의 투구 습관을 자세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도루를 13개까지인가 하고 한 달 정도 도루를 못했어요. 그러면서 전준호 선배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죠. 예를 들면 어떤 투수는 어떤 자세면 무조건 홈으로 던지니까 그때 스타트하라는 걸 알려주시더라고요.”

 

박경완은 2001년 24홈런과 21도루를 성공하면서 포수 역사상 유일한 ‘20-20 클럽’을 개설하게 됐다. 81타점도 곁들였다.

 

박경완은 ‘홈런 치는 포수’였고, 동시에 ‘도루하는 포수’였다. KBO 역사에서 ‘신개념의 포수’로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시즌 후에 좀 서운하더라고요. MVP는커녕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못 받았어요. 포수로서 20-20은 정말 쉽지 않은데 아무 의미 없다 싶더라고요. 도루를 하면 체력 소모도 심한데, 아무도 안 알아주니 그때부터 그냥 도루를 안 했죠.” 박경완은 이듬해 6개의 도루만 기록했고, 은퇴할 때까지 그보다 더 많은 도루를 한 시즌은 없었다.

 

박경완이 만난 명장들, 명장들이 만난 박경완

 

박경완은 프로 데뷔 후 KBO에서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감독들을 많이 만났다. 쌍방울 데뷔 시절엔 김인식 감독을 만났고, 현대로 이적해서는 김재박 감독을 만났다. SK에서는 조범현 감독과 김성근 감독을 만나 야구인생의 꽃을 피웠다.

 

쌍방울 시절 박경완을 지켜봤던 김인식 전 감독은 박경완에 대해 “처음 봤을 때 어깨도 좋고 파워도 있고 방망이도 맞기만 하면 장거리였다”면서 “연습생이라고 했지만 키워볼 만한 재목이라고 보고 첫해부터 조금씩 기용을 해봤다. 그러다가 나중에 OB 감독이 돼 상대팀으로 박경완을 봤는데 포수도 되고, 방망이도 되는 선수로 변해 있었다”고 기억했다.

 

박경완은 2002시즌 후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어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김재박 전 감독은 당시 상황을 두고 “2000년대 들어서 현대에서 FA로 다른 팀으로 많이 이적했는데 다른 선수는 어떻게든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박경완이 나갈 땐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돌이켰다.

 

쌍방울 시절 박경완이 현대로 트레이드될 때에는 김성근 감독이 화가 난 나머지 아예 야구장에 나오지도 않았던 일화도 있다. 어떤 지도자든 박경완을 얻을 땐 기뻐했고, 잃을 땐 화를 냈다. 그만큼 ‘대체불가 포수’라는 의미였다.

 

반면 2003시즌을 앞두고 SK 와이번스 사령탑에 오른 조범현 전 감독은 박경완을 얻은 뒤 곧바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SK도 박경완 영입 후 약체가 아닌 강팀의 토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쌍방울 시절 잠이 많던 선수로 기억하고 있던 박경완이 잠이 없는 선수가 돼 있더라고요. 현대 시절부터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먹고 있었다고 해요. 포수로서 고민을 많이 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죠. 경기장에 나와서 눈을 제대로 못 뜰 때가 많았어요. 안쓰러워서 ‘오늘은 좀 쉬어’라고 해도 박경완은 항상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선수였어요. 그만큼 책임감도 강했습니다.”

 

박경완은 2007년 김성근 감독을 맞이했다. 쌍방울 시절 1996년부터 1997년 2년간 감독과 포수로 만났다가 현대로 팔려가면서 헤어졌던 둘은 10년 만에 SK에서 조우했다.

 

SK는 그때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박경완은 2007년, 2008년,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진두지휘한 포수로 각광 받았다. 인천야구와 SK의 전성시대는 박경완과 함께했다.

 

김성근 감독은 당시 박경완을 두고 “SK 전력의 절반”이라고 표현했다. 박경완은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둘도 없는 칭찬이었지만 난 반대로 들리더라”면서 “ ‘전력의 절반이라고까지 했는데 쉬어서 되겠느냐, 나이가 들었지만 계속 몸 관리 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며 웃었다.

 

김인식, 김재박, 조범현, 김성근…. 박경완이 명장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어쩌면 그 명장들이 박경완 같은 포수를 만난 게 더 큰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박경완이 말하는 야전사령관의 매력

 

박경완은 현대 시절까지 포함하면 5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게 됐다. 명포수라는 직인이 찍힐 수밖에 없는 경력이었다.

 

2013시즌까지 통산 23년간 활약하며 무려 2044경기에 출장했다. 포수로만 1989경기에 마스크를 썼다. 포수 중 역대 최다 시즌 활약과 최다 경기 출장 기록이다. 통산타율 0.249(5949타수 1480안타)에 314홈런, 995타점. KBO 역사상 통산 300홈런을 돌파한 선수는 단 14명인데, 그 중 포수로서 300홈런 이상 기록한 선수는 박경완뿐이다. 4차례 골든글러브(1996년, 1998년, 2000년, 2007년)를 수상했다.

 

박경완의 분신인 ‘26번’은 2014년 SK 와이번스에서 은퇴식을 하며 영구결번이 됐다. 쌍방울에서 7년(1991~1997년), 현대에서 5년(1998~2002), SK에서 11년(2003~2013년)간 골고루 뛰었지만, SK 와이번스와 인천을 상징하는 인물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가 됐다. 2021년 SSG가 SK를 인수하면서 박경완은 SK 와이번스 소속으로 영구결번 된 최초이자 유일한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됐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박경완이 소속됐던 팀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는 이제 추억의 이름이 됐다.

KBO 역사에 남을 위대한 홈런타자이자 최고의 포수. 연습생으로 출발해 영구결번까지 간 입지전적 인물인 박경완은 ‘영원한 포도대장’으로서 레전드로 불리기 충분하다. 그렇다면 타자로서 홈런을 칠 때가 좋았을까, 포수로 뛰는 것이 좋았을까. 박경완은 주저 없이 “포수”라고 대답했다.

 

“밖으로 보여지는 건 타자 쪽이겠지만, 희열을 느끼는 건 포수였어요. 미리 짜놓은 게임플랜대로 경기가 풀린다든지, 위기 상황에서 각본을 짜놓은 게 맞아떨어지면 그만큼 짜릿한 게 없거든요. 남들은 모를 거예요. 특히 한국시리즈 등 큰 경기에서 그런 상황이 나오면 더 희열을 느껴요.”

 

여기에 덧붙여 그는 “어린 투수들이 하나씩 만들어질 때 포수로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정)민태 형처럼 원래 잘했던 투수는 잘할 수밖에 없지만, 어린 투수들이 하나하나 성장하고 만들어질 때만큼 기쁜 일도 없었어요. 현대 시절엔 김수경, 마일영, 신철인, 송신영 등이 있었고, SK 시절엔 채병용, 제춘모, 윤길현, 송은범, 정우람, 김광현 등등이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투수들은 박경완이 내는 사인에 고개를 흔들지 않았다. 그만큼 포수 영역에서는 누구나 신뢰하는 고수였다는 방증이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가 우승할 당시 마운드의 김광현이 박경완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한 것도 그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박경완은 “우승 순간 김광현이 나한테 안길 줄 알고 달려가는데 갑자기 인사를 해서 당황스러웠다”면서 “오히려 김광현이 너무나도 대견해서 안아줬다”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포수는 어떤 포지션보다 고되고 힘든 자리지만, 그는 “다시 태어나도 포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포수였고, 은퇴할 때까지 포수였어요. 포수에 대해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른 포지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할 것이고, 또 포수를 할 겁니다. 왜냐? 포수는 내 운명이니까요. 저는 포수를 해서 부와 명예를 얻었고, 이렇게 KBO 40주년 레전드 40인에도 선정됐잖아요. 가문의 영광이죠. 은퇴를 했지만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뜻이니까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재국 야구전문기자 / 스포팅제국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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