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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난투사] (16) 난폭했던 대전구장 관중들, 이렇게 달라질 수가

---[韓國프로野球 亂鬪史]

by econo0706 2022. 9. 2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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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4. 19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4월 18일, 한화 이글스가 13연패를 마감하고 3연승을 거두자 응원하던 대전구장의 여성 관중 두 명이 서로 얼싸안고 기쁨에 겨워하며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중계방송 화면에 잡혔다.

올 시즌 개막 이후 연패를 거듭하던 한화를 바라보며 많은 한화 팬들은 질책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격려와 지긋한 인내로 견뎌내는 성숙한 관전태도를 과시했다.

아, 옛날이여. 예전의 응원 풍토를 그리워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달라진 응원 문화에서 격세지감을 느낀 탓이다. 여성 관중이 대폭 늘어나고 가족 단위와 친구나 연인들의 야구팬이 야구장의 주인으로 자리 잡으면서 응원 또한 ‘연성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냉정하게 보자면, 연패도 야구의 한 모습일진데, 그것이 프로인데, 동정이 끼어들 틈이 없어야 마땅하거늘 ‘팬심(心)’은 그렇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한화를 응원하는 팬이 아닌 다른 구단 관중들도 한화의 추락을 안타까워했을까. 한화의 연패는, 김응룡(72)이라는 백전노장의 위축된 모습과 오버랩 돼 더욱 동정심을 자아냈는지도 모르겠다. 동정과 연민이 물결쳤다고나 해야 할까.

어느새 응원하는 관중이나 그렇지 않은 관중들도 한마음이 돼버린 것이다. 감정이입이 자유로웠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저 불길한 추억, 18연패(1985년 3월 31일~4월 29일)를 떠올리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30년 사상 이렇게 가슴조이며 애타게 특정 팀의 승리를 바란 적이 있었던가.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 ‘김응룡 할아버지’ 덕분이 아니겠는가.

‘할아버지’라는 표현에 당사자는 거북스럽겠지만, 연패 기간 동안 천하의 김응룡 감독이 안절부절 못하고 눈길을 자주 허공으로 돌리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드디어 연패의 사슬을 끊어낸 김응룡 감독이 선수들의 선전에 박수를 치는 모습을 목격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언제 그가 그렇게 살가운 태도로 선수들을 맞이한 적이 있었는가. 김응룡의 재발견이었다. 김 감독의 그런 모습에서 그의 감추어져 있던 인간미를 엿보았다고 할까. 

어찌됐든 한화는 막내 구단인 NC 다이노스를 딛고 누구 말마따나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갔던’ 팀을 북진시킬 기력을 회복한 셈이다.

▲ 1988년 5월 19일 대전구장 관중 난동의 와중에 빙그레 유승안 포수가 심판을 구타하는 관중을 끌어안고 말리는 모습.  / 일간스포츠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으며 무던히 참아냈던 한화 응원 관중들의 시계를 1980~1990년대로 되돌려보자. 그들은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관중들은 조급했고, 창단한지 얼마 안 된 한화의 성적에 성말라했다.

‘일부 몰지각한’  관중들의 준동은 상습화되다시피 했다. 난폭하고 거친 그런 관중들이 야구장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대전과 한화의 제2 구장으로 사용했던 청주는 한화는 물론 다른 팀들에도 기피 지역이었다. 올해 같은 연패가 그 때 일어났더라면, ‘일부 몰지각한’ 관중들은 당시 유행병처럼 번졌던 노상 청문회를 몇 번이라도 열었을 것이다.

서두가 길었다. 이 시리즈에 걸맞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과격했던 빙그레 이글스(한화 전신) 시절의 대전구장의 대표적인 관중 난동 사례를 찾아가보자.

1988년 5월 19일 대전 구장 관중 난입, 심판구타

해태 타이거즈-빙그레의 대전구장 경기 도중 심판판정에 불만을 품은 200여명의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 무법천지를 연출하며 심판들을 구타하는 등 그라운드 난동을 부렸다. 

그날 밤 8시 46분께 3-2로 앞서 있던 해태의 6회 초 공격 때 1사 후 서정환의 2루 앞 땅볼 타구가 내야안타로 처리되자 관중들이 흥분하기 시작, 빈병과 돌 따위를 그라운드에 마구 던져댔다. 곧이어 1, 3루 쪽 200여명의 관중들이 펜스를 넘어 그라운드로 짓쳐 들어갔다.

그에 앞서 해태 김성한이 5회 초 2-2 균형을 깨는 솔로 홈런을 날렸고,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자 화가 난 김성한이 불경스런 제스처로 응수해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경비원 39명이 이들을 막아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그 와중에 한 관중이 심판들에게 달려가 시비를 걸다가 한 심판의 발길에 채이자 떼로 달려들어 심판들 집단 구타했다. 빙그레 유승안 포수가 달려 나가 난동 관중을 끌어안고 제지 하는 장면도 눈에 들어 왔다.

30여분 동안 그라운드를 휘젓는 가운데 6명의 심판들이 관중들에게 얻어맞아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오광소 주심을 비롯해 백대삼 1루심, 김찬익 우익선심 등이 허리와 등, 옆구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 1993년 8월 17일 청주구장에서 열렸던 태평양 돌핀스-빙그레 이글스전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관중 10여명이 그라운드에 난입, 경기가 10여분 간 중단됐다. 한 관중이 그라운드에서 소란을 피우다 청원경찰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 일간스포츠

 

1만 1000여명의 관중들로 들어찬 그날 대전구장에는 이웅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와 박현식(고인) 심판위원장이 사태를 지켜봤다. 난동은 30여분간 계속 됐다.

박현식 심판위원장은 밤 9시 20분께 “홈구장 팬들이 경기 속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소란을 계속 피우면 규정에 따라 몰수게임 패를 선언할 수 있다”고 장내 방송으로 경고했다. 해태 김응룡 감독은 “이 같은 불상사 속에서 경기를 치를 수 없다”고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경기규칙 3 18조에 따르면 ‘홈팀은 질서유지에 충분한 경찰의 보호를 준비해야 하면 2명 이상의 사람이 경기 중 경기장 안에 들어와 방해할 경우 방문 팀은 플레이를 거부할 수 있다. 15분이 지나도 사람이 나가지 않으면 주심은 포피티드게임(몰수게임)을 선언하고 방문 팀의 승리로 한다.’고 명시 돼 있다. 56분간이나 중단됐던 그 경기는 해태가 5-3으로 이겼다.

그날 불상사는 몰수게임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KBO는 상벌위원회를 열어 경기장 질서유지에 소홀한 빙그레 구단에 책임을 물어 벌금 100만 원을 매겼다.

대전구장의 관중 난동은 취약한 구장 시설이 촉발시킨 면도 있었다. 내야 1, 3루 쪽 펜스 그물이 중간선까지만 설치돼 있어 다른 구장과 달리 관중들이 쉽사리 그라운드로 뛰어내릴 수 있게 돼 있었던 것이다. 

KBO는 그 사태 직후인 5월 20일 경기장 폭력사태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관중들의 투병, 투석이 일어나면 홈 구단에 1차 경고를 하고, 계속될 경우 몰수게임을 선고하며, 관객이 구장에 난입, 난동을 부릴 경우는 즉시 몰수경기 패를 선고한다는 것’이었다.

 

홍윤표 선임기자

 

자료출처 :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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