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제 전설이 된 '거인의 발걸음'…'아듀, 조선의 4번 타자'

---Sports Now

by econo0706 2022. 10. 8. 22:56

본문

2022. 10. 07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40)가 22년에 걸친 프로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지난 7월 28일 KBO 올스타전을 시작으로 후반기 내내 은퇴 투어를 이어 온 그는 10월 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시즌 최종전에서 현역 선수 생활의 마지막 타석에 선다. 부산의 홈 팬들 앞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열고 '진짜' 작별 인사를 전한다. 

▲ 10월 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마지막 타석을 끝으로 이대호가 현역에서 물러난다. / 사진=연합뉴스

 

이대호는 한국인 타자 최초로 한국·미국·일본 프로야구 1군 리그를 모두 경험한 기념비적인 선수다. 해외에서 5년을 뛰었지만, KBO리그에서는 오직 롯데 유니폼만 입었다. 롯데는 이대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고(故) 최동원에 이은 롯데 구단 두 번째 영예다. 이제 사직구장에는 최동원의 등번호 '11'과 이대호의 등번호 '10'이 나란히 걸리게 된다. 20세기의 롯데와 21세기의 롯데를 대표하는 투타의 두 기둥이 마침내 '합체'한다.

# 프로 입단 후 3년간 시련

이대호는 부산 수영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부 입단을 위해 전학 온 추신수(SSG 랜더스)가 덩치 큰 같은 반 친구에게 "나랑 같이 야구하자"고 제안한 게 그 시작이다. 꼬마 이대호는 얼떨결에 야구부에 따라갔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때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던 '역사적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그 후 이대호는 경남고 에이스, 추신수는 부산고 에이스로 활약하며 전국 고교야구를 주름잡았다.

추신수가 메이저리그(MLB)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뒤 이대호는 2001년 고향팀 롯데에 2차 1라운드(전체 4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처음엔 투수로 뽑혔지만 1년 만에 타자로 전향했다. 프로 첫 스프링캠프 때 '빨리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무리하다 어깨를 다친 탓이다. 부상 여파로 직구 구속이 시속 140㎞ 밑으로 떨어졌고, 주특기였던 포크볼도 힘을 잃었다. 결국 투수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설움도 많이 겪었다. 일부 지도자들은 체중이 120㎏에 육박하던 거구의 내야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이대호에게 "살을 빼라"고 압박했다. 체중 감량을 위해 과도한 훈련을 하다 무릎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이대호는 유연성도, 회복력도 남다른 '천재형' 선수였다. 2004년 이대호가 홈런 20개를 때려내며 서서히 궤도에 오르자 체중을 둘러싼 걱정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메이저리그(MLB)에서 온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은 "저 정도 체격의 선수가 3루수를 맡는 건 MLB에서도 본 적이 없다. 운동능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 부산의 붙박이 4번 타자 탄생

미완의 대기는 2006년 꽃을 피웠다. 그해 이대호는 1984년의 이만수 이후 22년 만에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 크라운(타율·타점·홈런 1위)을 달성했다. 투수 트리플 크라운(승리·평균자책점·탈삼진 1위)을 달성한 '괴물 신인' 류현진(당시 한화 이글스·현 토론토 블루제이스)이 없었다면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도 가능했던 성적이다. 이대호는 2007년에도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 상위권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리그 최고 타자 중 한 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대호는 2008년 또 하나의 꿈도 이뤘다. 롯데가 8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데뷔 후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경험하게 됐다. 온 부산이 하나가 돼 야구 열기로 들썩이던 시기다. 상대 팀 지도자들은 "이대호는 늘 우리 투수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존재"라고 감탄했고, 롯데 타자들은 "이대호가 우리 타선에 있기에 늘 부담 없이 타석에 설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해 그는 무명 시절부터 함께한 오랜 연인 신혜정 씨에게 프러포즈했고, 이듬해 웨딩마치를 울렸다.

# KBO리그 전무후무한 발자취

이대호는 2010년 선수 생활의 하이라이트를 맞았다.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타율·타점·홈런·득점·안타·출루율·장타율) 타이틀을 석권하면서 타격 7관왕을 달성했다. KBO리그 역사에 전무후무한 발자취다. 4년 전 MVP를 겨뤘던 류현진이 1점대 평균자책점을 남기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지만, 이번만큼은 이대호에게 MVP 왕관을 내줘야 했다.

이대호는 또 그해 8월 4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부터 14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까지 9경기 연속 홈런을 쳐 이 부문 세계기록도 세웠다. 역사가 150년에 육박하는 MLB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외신들도 이 기록에 주목할 만큼 전 세계 야구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롯데는 이 기록의 가치를 기리기 위해 이대호에게 순금 30냥으로 제작된 1㎏짜리 황금 배트를 선물했다.

이대호는 승부욕이 대단한 선수로도 유명했다. 2010년 두산과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그 백미였다. 1-1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0회 초, 롯데는 먼저 1사 2루 득점 기회를 맞았다. 타순도 좋았다. 3번 조성환과 4번 이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성환은 이날 이미 안타 두 개를 때려내면서 좋은 타격감을 과시하던 참이고, 이대호는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아 앞선 네 번의 타석에서 무안타로 돌아선 뒤였다. 두산은 고심 끝에 조성환을 고의4구로 내보내 1루를 채우고 이대호와 승부하는 쪽을 택했다.

대기 타석에 있던 이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앞 타자 고의4구'라는 생경한 풍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어진 1사 1·2루에서 좌월 결승 3점 홈런을 날려버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이대호는 이대호'라는 걸 보여줬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었다"며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 한국에서 최고의 타자로 성장한 이대호는 일본 무대로 진출,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하는 등 성공적 활약을 펼쳤다. / 사진=연합뉴스

 

# 일본을 점령하고 MLB까지 도전

이대호는 '한국 최고'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유계약선수(FA)가 된 2012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오릭스 버펄로스,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4번 타자로 활약했다. 특히 소프트뱅크 시절이던 2015년엔 일본시리즈 MVP에 오르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보다 한 수 위 리그인 일본에서 무척 성공적인 4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소프트뱅크의 재계약 제안을 뿌리치고 2016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1년 400만 달러에 스플릿 계약(MLB 소속일 때와 마이너리그 소속일 때 연봉이 다른 계약)을 했다. MLB 진입도 보장받지 못한 채,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로 참가해 처음부터 다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 결과 이대호는 MLB 타석에 서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현실로 만들었다. 동시에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모두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낸 유일한 타자가 됐다.

이대호는 국가대표로도 최고의 활약을 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3 WBC, 2015 프리미어12, 2017 WBC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중심타자 역할을 해냈다. 이대호의 국제대회 41경기에서 통산 성적은 타율 0.323(133타수 43안타), 홈런 7개, 41타점이다. 1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 중 타점 1위, 홈런 2위, OPS(출루율+장타율) 1위다.

롯데는 2017년 KBO리그로 복귀한 이대호와 4년 총액 150억 원에 상징적인 FA 계약을 했다. 올해 김광현(SSG·4년 151억 원)이 경신하기 전까지, KBO리그 역대 최대 규모 계약으로 남아 있었던 금액이다. 그럼에도 이대호에게는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결단이기도 했다. 그는 2014년과 2015년 소프트뱅크에서 합계 12억 5000만 엔을 받았다. 롯데와 4년 계약 총액과 큰 차이가 없다. 심지어 이대호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외국인 타자가 그해 소프트뱅크와 3년 15억 원에 사인하기도 했다. 이대호가 마음만 먹었다면, 한국 복귀 전 일본 프로야구를 경유하면서 더 많은 돈을 챙길 수도 있었을 터다.

실제로 일본의 몇몇 구단은 시애틀과 계약이 끝난 이대호에게 롯데보다 수십억 원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서 러브콜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대호는 이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롯데 복귀를 선택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모두 뛰겠다는 꿈은 이제 다 이뤘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 팀 동료, 후배들과 함께 우승을 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이유에서다.

# 은퇴 투어에서 날린 만루홈런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지 못한 채 마지막이 왔다. 이대호는 롯데와 계약 종료를 앞둔 올 시즌 개막 전 "1년만 더 뛰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KBO는 "그동안 국내 리그와 국제대회에서 활약했던 공로를 인정한다"며 이대호를 이승엽(2017년)에 이은 역대 두 번째 은퇴 투어 주자로 선정했다. 지난 7월 28일 서울 잠실구장(두산)에서 시작된 구장별 은퇴 투어는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창원 NC파크-인천 SSG랜더스필드-서울 고척스카이돔-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수원 케이티위즈파크-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를 거쳐 지난 9월 22일 다시 잠실구장(LG)에서 끝났다.

이대호는 이 기간을 단순한 '작별 인사'로 여기지 않았다. 은퇴 투어 때마다 기념비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면서 여전히 강력한 '롯데 중심 타자'의 존재감을 뽐냈다. 창원 은퇴 투어 기간인 8월 24일 NC전에서 1-0으로 앞선 9회 초 2사 후 개인 3호 대타 솔로홈런을 터트려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선수 생활 내내 주전으로 뛰었기에 그의 대타 홈런은 개인 통산 3호 기록이다.

이뿐 아니다. 인천 고별전이던 8월 28일 SSG전에선 1-2로 뒤진 9회 역전 결승 2점포를 쳤다. 고척 최종전이던 8월 31일 키움전에선 오른손 타자 최초로 통산 1400타점 고지를 밟았다. 9월 20일 한화 이글스와 대전 은퇴투어에선 9회 역전 결승 만루홈런을 폭발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대호의 통산 12번째 그랜드슬램이었다.

이대호는 은퇴를 앞둔 올 시즌에도 타율·홈런·타점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웬만한 타자의 전성기 시즌보다 나은 성적을 올렸다. 은퇴 시즌에 100타점을 넘긴 타자는 이대호가 사상 최초다. "은퇴 전 꼭 한국시리즈 무대에 서보고 싶다"던 염원 하나만 빼면, 프로 선수로서 거의 모든 환희를 다 누리고 그라운드를 떠나는 셈이다.

이대호를 야구의 길로 이끌었던 추신수는 "대호는 어린 시절 많은 시련을 함께 겪은 친구다. 그때 이대호라는 라이벌이 없었다면, MLB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런 경쟁자가 있어 참 행복했다. 박수를 받고 떠나는 친구가 참 부럽고 대단하다"고 했다. 롯데 시절 이대호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포수 강민호(삼성 라이온즈)도 "형에게 어릴 때 참 많은 걸 배우고 의지하면서 야구를 했다"며 "은퇴한다니까 아쉽기도 하지만, 정말 멋지게 박수 받으며 떠나는 것 같아서 후배로서 기쁘고 자랑스럽다"며 울먹였다.

 

‘선제타점에 홀드까지’ 소문난 이대호 은퇴식, 먹을 것 많았다

 

성대하게 치러진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롯데)의 은퇴식에는 역시나 볼거리가 풍성했다.

이대호는 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2022 KBO리그’ 정규시즌 최종전을 끝으로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소속팀 롯데가 올 시즌에도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면서 이대호의 은퇴 무대는 포스트시즌이 아닌 올해 정규리그 144번째 경기가 됐다.

현역 시절 전무후무 타격 7관왕, 9경기 연속 홈런 세계신기록, 2008 베이징올림픽 전승 금메달 주역 등 한국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쓴 이대호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사직구장은 전국에서 모여든 팬들로 시즌 세 번째 매진을 기록했다. 경기는 오후 5시부터 열렸지만 오후 2시15분께 2만2990석이 모두 매진됐다.

경기 시작 전 사직 전광판에는 이대호가 가족에게 남긴 영상 편지가 송출돼 감동을 안겼다. 이어 이대호의 딸 이예서 양이 시타, 아들 이예승 군이 시구에 나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포자로 나서 예승 군의 공을 받은 이대호는 만족의 엄지척을 들어 올려 보이기도 했다.

이날 4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전한 이대호는 첫 타석부터 변함없는 실력을 과시했다. 그는 1회 첫 타석에서 대형 2루타로 선제 타점을 기록했다. 2사 2루에서 타석에 등장한 이대호는 LG 선발 김영준을 상대로 펜스 직격 중월 2루타를 터트리며 사직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 이대호가 8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LG트윈스와 홈경기 첫 타석에서 2루타를 때린 뒤 환호하고 있다. / ⓒ 뉴시

 

8회초에는 깜짝 투수로 등판했다.

이대호는 경남고를 졸업하고 2001년 롯데에 입단했을 때 투수로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부상 때문에 야수로 전향해 ‘조선의 4번 타자’로 거듭났다.

프로 입단 이후 투수로 마운드에 오를 기회가 없었던 이대호는 자신의 은퇴 경기서 깜짝 투수로 등판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롯데가 3-2로 앞선 8회초 이대호가 마운드에 오르자 사직구장은 또 한 번 큰 함성으로 가득 찼다. LG 또한 최고 마무리 고우석을 타석에 세우며 제대로 맞불(?)을 놨다.

고우석을 상대로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꽂으며 제구력을 과시한 이대호는 4구만에 투수 땅볼로 아웃카운트를 챙겼다. 고우석의 타구가 정면으로 날아왔지만 민첩함을 과시하며 공을 잡아 여유 있게 1루로 던졌다. 최고 구속은 129km까지 나왔다.

 

▲ 이대호가 8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은퇴 경기서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고 있다. / ⓒ 뉴시스


한 타자만 상대하고 마운드를 내려온 이대호를 향해 롯데 홈팬들은 “대호~”를 외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롯데가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했기 때문에 최고의 타자 이대호는 은퇴 경기서 ‘홀드’라는 진기록까지 챙겼다.

이대호의 눈부신 호투 덕(?)에 롯데는 최종전에서 3-2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은퇴 경기서 선제 타점에 홀드까지 챙긴 이대호로 인해 사직구장을 가득 채운 홈팬들은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이대호 은퇴식·영구결번식 사직에서 열려


‘조선의 4번 타자’ ‘롯데 자이언츠의 영원한 10번’이 정든 사직 그라운드와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대호(40·롯데)가 뜨거운 박수와 눈물 속에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 롯데 이대호가 8일 부산 동래구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와의 경기가 끝난 후 열린 은퇴식·영구결번식에서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뉴스1


이대호는 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LG와의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투타에 걸쳐 맹활약 하며 롯데의 3대2 승리에 앞장섰다.

이대호는 1회말 첫 타석에서 가운데 담장을 맞히는 선제 1타점 2루타로 사직구장을 열광의 무대로 만들었다. 이후 팀이 3-2로 앞선 8회초 팀의 4번째 투수로 깜짝 등판해 LG의 ‘마무리’ 고우석을 상대로 땅볼을 유도해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으며 프로 데뷔 후 첫 홀드도 올렸다. KBO(한국야구위원회)리그 통산 1971경기를 소화한 이대호가 ‘투타 겸업’을 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롯데는 마무리 김원중을 올려 한 점 차 우위를 지켜내며 최종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 롯데 이대호가  LG와의 경기 중 8회초 마운드에 올라 LG 고우석을 상대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 뉴스1


이날은 2001년 프로에 데뷔한 이대호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다. 이대호는 올 시즌이 끝나면 줄곧 은퇴를 하겠다고 한 바 있다. 정규시즌을 8위로 마쳐 ‘가을 야구’ 진출에 실패한 롯데는 이날이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이대호는 2001년 롯데에 입단해 2012~2016년(일본 4년, 미국 1년) 해외에서 활약한 것을 제외하면 롯데에서만 뛴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안방에서의 LG전이 끝난 뒤 이대호의 은퇴식과 영구결번식 행사를 통해 그와 그의 등번호 10번은 롯데의 역사가 됐다. 이날 이대호의 마지막 순간을 보러 사직구장엔 만원 관중(공식 2만2990명)이 몰렸다.

영구결번식에 앞서 열린 은퇴식에선 이대호와 동고동락했던 동료들과 감독 등이 전광판을 통해 이대호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건넸다.

수영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같이 하자며 계기를 만들어준 절친 추신수(SSG)를 시작으로 동갑내기 오승환(삼성), 이우민(전 롯데) 등이 등장한 뒤 MLB(미 프로야구)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함께 뛴 로빈슨 카노, 스캇 서비스 전 시애틀 감독 그리고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 등이 은퇴 축사를 전했다.

▲ 이대호가 롯데 신동빈 회장에게 자신의 글러브를 선물하고 있다. /뉴스1


이날 사직구장을 찾아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구단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직접 그라운드에 내려와 ‘10번’이 새겨진 커플 반지를 전달했다. 이대호는 본인이 직접 쓴 1루수 글러브를 신 회장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 롯데 이대호(왼쪽)와 그의 아내 신혜정 씨 / 송정헌 스포츠조선 기자


이어 이대호의 아내 신혜정씨, 딸 예서, 아들 예승군이 한마디를 더했다. 이대호는 가족들의 영상을 보면서 울먹거렸다. 꽃다발을 건네는 아내를 끌어안고 두 사람은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이대호는 이후 고별사를 읽었다.

“사실 오늘이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었다”는 말로 운을 뗀 이대호는 “기일에 은퇴식을 한다는 게 감회가 새롭고 슬프다”고 말했다.

팬들을 향해서는 “더그아웃에서 보는 사직구장 관중석만큼 멋진 풍경은 없고, 타석에서 들리는 부산 팬의 응원만큼 든든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그 함성을 들은 이대호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가족에겐 “남들처럼 여름방학 때 해운대에 못 데려가는 못난 아빠를 위해 늘 웃는 얼굴 보여준 예서와 예승, ‘독박 육아’라는 말도 모자란 아내에게 고맙다”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어린 이대호를 길러준 할머니를 떠올리며 “하늘에 계신 할머니, 늘 걱정하시던 손자 대호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박수받으며 떠납니다. 오늘 가장 생각나고 보고 싶다”며 오열했다.

영구결번식도 진행됐다. 이대호는 2005년부터 롯데에서 뛰는 내내 10번을 사용했다. 이대호의 10번은 롯데 구단 역사상 첫 번째 영구결번인 고(故) 최동원의 11번 옆에 자리할 예정이다.

▲ 이대호가 자신의 영구 결번된 10번 팻말 앞에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연합뉴스


롯데는 이대호를 위한 선물로 이대호의 등장곡인 ‘오리 날다’를 부른 가수 체리 필터의 깜짝 공연을 준비하기도 했다. 트럭에 드럼과 기타를 싣고 사직구장에 들어선 체리 필터는 보컬 조유진이 홈플레이트에 선 이대호에게 꽃다발을 건넨 뒤 ‘오리 날다’를 열창했고, 관중들은 따라 부르며 현장은 마치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 체리 필터의 보컬 조유진이 롯데 이대호의 은퇴식·영구결번식에서 '오리 날다'를 열창하고 있다. / 뉴스1


마지막에 이대호는 자동차에 올라 1루쪽부터 시작해 경기장을 쭉 돌며 팬들에게 손하트 제스처 등을 취하면서 인사했다. 롯데 팬들은 ‘이대호’를 연호한 뒤 이대호의 응원가를 불렀다.

은퇴식이 끝난 뒤 롯데 후배들은 이대호를 위한 ‘가장 무겁지만, 가장 힘찬’ 헹가래를 선물했다. 이대호는 후배들에게 헹가래에 앞서 연신 “떨어뜨리지 마라”고 하며 마지막 순간을 즐겼다.

▲ 팀동료들이 이대호 선수에게 헹가래를 하고 있다. / 뉴스1


불꽃놀이로 피날레를 장식한 이대호는 관중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뜨거운 안녕’을 마쳤다. ‘지상 최대의 노래방’이라는 사직구장에서 이대호와 팬들이 함께 부른 마지막 이별곡 점수는 100점이었다.

 

배영은 / 중앙일보 기자

+ 김평호 기자 kimrard16@dailian.co.kr

+ 박강현 기자 iamchosun@chosun.com

 

자료출처 : 일요신문 [제1587호]  + 데일리안 + 조선일보

 

‘에드먼턴 키즈’가 그라운드 접수

 

이대호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황금세대로 꼽히는 1982년생 '에드먼턴 키즈'의 핵심 선수다. 실력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모두 큰 성공을 거둬 진정한 '골든 에이지'로 통하는 이들의 역사는 모두 고교 3학년이던 2000년, 캐나다 애드먼턴에서 열린 제19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시작됐다.

▲ 이대호(맨 오른쪽)를 비롯한 추신수(가운데), 오승환(맨 왼쪽) 등 1982년생 동기들은 장기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구 스타로 활약했다. / 사진=임준선 기자

 

아무도 고교 선수들의 국제대회에 주목하지 않던 시절, 이들은 열악한 지원을 감내하면서 캐나다로 날아갔다. 대표팀 사령탑이던 고(故) 조성옥 감독을 중심으로 특급 기량을 가진 유망주들이 똘똘 뭉치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근성과 투지, 열정과 우정을 앞세워 야구 강국 미국, 캐나다, 멕시코, 쿠바, 일본 등을 차례로 꺾었다. 특히 그해 8월 13일 열린 세계 최강국 미국과 결승전은 그 '기적'의 백미였다. 한국은 연장 13회 접전 끝에 미국을 9-7로 꺾고 우승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역사에서 최고 명승부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경기다.

그때 우승을 완성한 한국 대표팀의 마무리 투수가 부산고 추신수였다. 그의 등 뒤에 있던 1루수 김태균(천안북일고), 2루수 정근우(부산고), 3루수 이대호(경남고)도 한달음에 추신수에게 달려와 역사적인 우승의 감격을 함께했다. 9년 뒤 열린 2009 WBC 대표팀의 내야 주전 라인업을 사실상 미리 본 셈이다.

추신수는 대회 최우수선수(MVP)와 최우수 왼손투수로 선정돼 2관왕에 오른 뒤 메이저리그(MLB) 스카우트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결국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마이너리그에서 4년간 기량을 갈고 닦았고, 그 후 MLB에서 16년을 뛰면서 공·수·주를 겸비한 외야수로 이름을 날렸다.

다른 동기생들 역시 KBO리그는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까지 누비면서 한 수 위의 실력과 이름값을 뽐냈다. 역시 1982년생인 오승환(삼성)은 애드먼턴 대회에 함께 출전하진 않았지만, 이들과 성인 국가대표팀을 함께 이끌면서 KBO리그 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우뚝 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대호, 김태균, 정근우는 은퇴했고 추신수와 오승환은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이했지만, 한국 야구의 인기는 1982년생 선수들의 활약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

관련글 더보기